모타운

 

'''Motown Records'''
'''모타운 레코드'''
[image]
'''설립일'''
1959년 1월 12일
'''설립자'''
베리 골디
'''장르'''
다양
'''본사'''
[image]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모기업'''
유니버설 뮤직 그룹
1. 개요
2. 역사
3. 음악 스타일
4. 영향
5. 여담
6. 출신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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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나는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모타운 레코드를 세우는 꿈을 생각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부품들이 조립된 후 완성된 새 차로 공장 문을 나가듯이, 모타운 레코드의 문을 들어선 누군가가 비록 길 가던 꼬마 아이더라도 결국 문을 나갈 때는 스타가 되는 것이다." '''

— 모타운의 창립자, 베리 골디

모타운(영어: Motown)은 원래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 기반을 두었던 레코드 레이블이다. 탐라 레코드로서 1959년 1월 12일에 베리 골디 주니어에 의해 창립된, 회사는 1960년 4월 14일에 모타운 레코드 법인이 되었다. 단어 모터와 타운에서 비롯된 혼성어인 회사 이름은 또한 디트로이트의 별명이기도 하다. 훗날 이곳에서 음악 활동을 했었던 마이클 잭슨은 백인과 흑인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국제적인 슈퍼스타로 자리잡는다.[1]
모타운은 대중 음악의 인종적 결합에 기여했다.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들을 특징으로 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소유한 최초의 레코드 레이블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슈프림즈, 잭슨 5, The Four Tops, 템테이션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라이오넬 리치, 코모도어스 등이 소속돼 있었다. 2005년에 유니버셜 뮤직 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어 '유니버설 모타운 레코드'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2011년 다시 모타운 레코드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디트로이트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인지 칼하트 WIP와 협업을 한 적이 있다.

2. 역사


50년대부터 알앤비 밴드에서 활동하던 베리 골디재즈 음반을 주로 취급하는 레코드 가게를 열지만, 금세 빚만 남기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부채 상환을 위해 디트로이트의 GM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며 작곡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58년 알앤비 가수 재키 윌슨에게 "Lonely Teardrops"라는 로큰롤 곡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 곡이 1958년 밀리언셀러를 기록, 그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뜻을 굳힌 그는 백인들에게 장사가 되는 알앤비를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단돈 8백 달러로 레코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2] 그는 자신의 회사명을 모타운이라 명명하게 되는데, 모타운이란 모터 타운 즉,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초기에는 Motown과 Tamla 두 개의 조그마한 산하 레이블을 운영했지만, 1959년부터 회사의 첫 아티스트로 있다가 1961년 "Shop Around"로 전국적인 히트를 거두며 모타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스와 Money (That's What I Want)로 모타운 최초 히트곡을 거둔 바렛 스트롱, 뒤이은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마샤 리브스 앤 더 벤델라스,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포 탑스 등의 대박 행진으로 점차 대형 레이블로 성장해 간다. 소규모의 인디펜던트 레이블을 단 십 년 만에 명실 공히 대기업의 위치로 이끈 베리 고디의 탁월한 사업 수완은 히츠빌리 USA라 불리던 레이블 사옥의 효과적인 운용에서 잘 드러난다. 그곳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구조였다. 1층에는 작곡가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2층엔 펑크 브라더스라 명명된 백업 밴드가, 3층엔 안무가들이, 그리고 지하엔 레코딩 스튜디오와 휴게실이 있었다. 소속 가수들은 각 층을 오가며 하드 트레이닝을 했으며, 연주가와 작곡가들은 대량으로 악곡을 생산, 그것을 가장 잘 소화하는 가수에게 주는 식이었다. 따라서 모타운 레이블의 곡들은 가수가 다른 동일 곡이 여럿 존재한다.
모타운 사운드는 "The Sound of Young America"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으로서, '최대한 넓은 수용층'을 겨냥한 '양질의' 상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수들은 사장의 방침에 따라, 기품 있는 의상을 입고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으며(정확히 말해 백인 관점에서의 흑인다운 행동은 일체 금지였다), 에드 설리번 쇼 등 많은 TV 음악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 레이블 전반적으로 동시대의 비틀즈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고, 대중음악의 흐름을 선도했다. [3]
모타운 사운드의 음악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곡 트리오 H-D-H와 연주자 집단 펑크 브라더스는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모타운 레이블에서 발표된 빌보드 탑 텐 히트곡 79곡 중 28곡을 썼다. 또한 넘버원에 랭크된 21곡 중 무려 12곡이 바로 그들의 작품이었다. H-D-H란 홀랜드, 다져, 홀랜드의 약자로 에디 홀랜드 브라이언 홀랜드의 홀랜드 형제와 라몬트 도지어 등 세 명의 멤버로 구성된 작곡가 팀이었다. 그중 에디 홀랜드가 작사를, 브라이언 홀랜드가 작곡을 주로 담당하고, 라몬트 도지어가 작사, 작곡, 양쪽에 모두 참가하는 형태로 곡을 완성했다. 이 세 명이 한 팀을 이루어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2년경의 일이었고, 바로 그 무렵부터 디트로이트의 작은 레이블에 불과했던 모타운은 기적의 대약진을 시작했다.
재즈에 일가견이 있던 피아니스트 알 반 다이크, 수많은 명 프레이즈를 만들어 낸 베이시스트 제임스 재머슨, 그리고 모타운 사운드 특유의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모타운 비트 라고도 한다. 슈프림스의 〈You Can't Hurry Love〉가 대표적) 베니 벤자민, 〈My Girl〉의 저 유명한 기타 리프를 완성시킨 기타리스트 로버트 화이트를 중심으로 한 펑크 브라더스는 H-D-H가 가져온 노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양념을 치며 1일 3곡이라는 엄청난 스피드로 무수한 히트를 쳤다.
펑크 브라더스는 히트곡 제조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가장 숙련된 근로자였고, 그들의 부재는 생산 라인의 마비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모타운의 해외 공연 등에 동참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으며, 언제나 녹음을 위해 컴컴한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그들에 대한 댓가는 몇 푼 안 되는 시급이 전부였다. 게다가 모타운이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기며 그들은 결국 활동의 장마저도 빼앗겨 버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골디의 1인 독재 체제하에서 H-D-H에게 주어진 보상 역시 그들의 공로에 비하면 한없이 미미한 것이었다. 과도한 업무와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날대로 난 H-D-H는 1968년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불구, 모타운의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모타운으로부터 독립한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레이블을 설립한다. 그것은 인빅터스와 핫 왁스라는 두 개의 레이블로써, 거기에서 곧장 자신들의 작품을 제작, 캐피틀 레코드와 붓다 레코드를 통해 발매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레이블을 세우는 동안, 모타운에서는 본사를 디트로이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H-D-H라는 기둥을 잃은 모타운은 자신의 뿌리인 동시에 정체성이기도 했던 지역의 흑인 커뮤니티와도 완전히 결별하며 느닷없는 노선 변경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베리 고디의 모든 도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72년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긴 모타운은 급격하게 예전의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잭슨스와 다이애나 로스 같은 간판급 스타가 일찍이 다른 회사로 이적해 버리고 난 뒤, 지독한 경영난에 허우적댔다. 이따금 코모도어스나 드바지, 라이오넬 리치 같은 재능 있는 신예들이 레이블을 위기에서 구하는 듯했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80년대에 접어들자 음악 산업은 점점 다국적 기업에[4] 의해 주도되기 시작하며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갔다. 1988년 모타운은 결국 소규모 독립 레이블의 처지로 MCA에 매각되어 버리고 만다.
MCA에 매각된 이후에도 모타운의 이름 자체는 유지되었는데, 매각 이후의 모타운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바로 보이즈 투 멘이다.

3. 음악 스타일


R&B소울, Funk, 디스코 등이 주력 장르였다. 기본적인 모토는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먹히는 흑인 음악.''' R&B의 형식 위에 클래식이나 스탠더드 팝 같은 백인 음악의 화성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시도를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쉽고 친숙하게 다가올 음악을 연구했었다. 이에 연장선상으로 특정 코드나 멜로디 등을 반복하는 후크송의 기법을 선호하기도 했다.

4. 영향


1964년 시작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시작으로 히피 문화의 주축이 된 싸이키델릭 락, 1970년대 히피 문화가 끝나고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하드 락 음악 등 1960~70년대의 락 음악 전성 시대에 대항해 흑인 음악 전성 시대를 불어일으켰다. 1960년대 미국 음악은 말 그대로 모타운을 주축으로 한 흑인 음악과 영국 밴드와 히피 밴드를 주축으로 한 락 음악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또한 70년대에 펑크(Funk) 붐 등을 주도한 집단 중 하나. 슈프림즈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비틀즈만큼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5]
이 레이블 출신인 마이클 잭슨이 베리 골디의 프로듀싱 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나얼 역시 이 레이블에 많은 애착을 드러내기도 한다. 박진영은 JYP를 한국의 모타운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모타운은 YG엔터테인먼트, JYP, SM엔터테인먼트 등 현대의 K-POP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회사 소속의 전속 작곡가 집단이 트렌드를 분석해 팔릴만한 곡을 만들고, 전속 밴드가 반주를 녹음하면, 체계적인 하드 트레이닝을 받은 전속 가수들이 파트를 나눠서 부르는 방식은 바로 모타운이 처음 선보인 것이다. 모타운은 당시 사무실 뿐만 아니라 음반 도서관이나 트레이닝 룸까지 회사에 마련하기도 하는 등 획기적인 시도들을 많이 했다.
마빈 게이의 노력 덕분에 사회 문제를 다룬 음악을 시도해 성공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혹자는 '현대 흑인 대중음악 뮤지션 중에서 이 레이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5. 여담


모타운의 사장이던 베리 골디 주니어의 아들이 LMFAO의 DJ 레드푸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친구이기도 한 가수 락웰(Rockwell)도 바로 베리 고디의 아들로 본명은 케네디 윌리엄 골디이다. 그가 1984년 발표한 데뷔 앨범 <Somebody's Watching Me>에 수록된 곡에 수록된 '나이프(Knife)'가 한국에서 더 유명하다.

6. 출신 뮤지션



[1] 마이클 잭슨은 잭슨 파이브 때는 모타운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솔로 1집인 Off The Wall 부터 Epic Records에 소속되어 있었다.[2] 이 돈은 자신의 동네 친구이자 훗날 모타운의 첫 스타 그룹이었던 Miracles의 리더 스모키 로빈슨이 빌려준 것이었다.[3]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점령당하고 있던 미국 음악계의 자존심을 세워 준 게 바로 모타운이다. 1964년 미국 음악계가 비틀즈에 의해 완전 침공당했던 시절 비틀즈의 유일한 대항마는 슈프림즈였다. 1964년 초중반 비틀즈의 1위 행진 및 차트 완전 정복을 슈프림즈가 막으면서 (그러니까 슈프림즈의 1위로 비틀즈의 1위가 저지되었다.) 슈프림즈는 미국 음악의 자존심을 되살려 줬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실제로 1960년대 비틀즈가 빌보드 1위곡을 20개 기록하는 동안 슈프림즈 역시 12개나 기록했다. 전성기 역시 비틀즈는 (1964~1970년) 슈프림즈 (1964~1970년)으로 같다! 참고로 빌보드 1위곡이 10개가 넘는 아티스트는 단 10명밖에 되지 않는다. 20개의 비틀즈, 19개의 머라이어 캐리, 18개의 엘비스 프레슬리, 14개의 리아나, 13개의 마이클 잭슨, 12개의 마돈나슈프림즈, 11개의 휘트니 휴스턴, 10개의 자넷 잭슨스티비 원더이다.[4] 소니, 유니버셜 등.[5] 둘 다 전성기가 1964년~1970년이고, 그 기간동안 비틀즈는 빌보드 핫 100 1위 20개, 슈프림즈는 빌보드 핫 100 1위 12개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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