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티시 인베이전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초인 비틀즈의 첫 방미 당시의 실황.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도화선을 상징하는 순간이다.
1. 개요
2. 역사
2.1. 폭풍전야: 미국의 상황
2.2. 1차 침공: 1960년대
2.3. 2차 침공: 1970년대
2.4. 번외편
2.4.1. 1980년대~1990년대 전반
2.4.2. 1990년대 중후반
2.4.3. 2000년대 이후
3. 유사한 사례
4.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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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첫 방미 당시 미국 JFK 공항에 내리는 모습. 뒤에 팬암의 로고가 보인다.
국문으로는 '영국의 침략' 또는 '영국의 침공'으로 번역 할 수 있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란 단어는 영국록 음악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미국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얻게 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론 1960~70년대의 미국의 영국음악 강점기를 칭하곤 하며, 80년대 이후의 영국음악 열풍의 순간 넓게는 음악 외적인 분야의 영국 문화의 열풍을 의미하기도 한다.
1960년대의 1차 인베이전과 1970년대의 2차 인베이전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그 후의 시기에서는 1, 2차때만큼의 엄청난 영향력은 없기에 인베이전으로 칭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등에 대해 의견이 조금씩 갈린다.

2. 역사



2.1. 폭풍전야: 미국의 상황


1960년대가 개시되었을 때, 미국의 록은 완전히 전신마비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보수적인 미국 사회는 흑인음악에서 유래한 로큰롤을 더이상 좌시하지 않으려 했다. 제리 리 루이스는 만 13살밖에 안 된 질녀[1]과 결혼하다[2] 사회적인 비난을 받았고, 리틀 리처드는 비행기 사고를 당할 뻔한 경험을 한 뒤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며 음악계를 은퇴했다. 심지어 그는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다!'''라고 주장하며 자기가 해왔던 로큰롤을 배신해 버렸다.[3]
척 베리는 사실상 로큰롤 기타 연주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위대한 뮤지션이었지만, 미성년자 소녀와 커플이 되어 주 경계선을 넘다 수감되었으며[4], 리치 발렌스, 버디 홀리, 빅 바퍼라는 세명의 걸출한 로큰롤 거인들은 비행기 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에디 코크런과 진 빈센트는 로커빌리의 투톱이었지만 자동차 사고로 인해 에디 코크런은 즉사, 진 빈센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5]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데뷔 초기 때부터 성적 행위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무대 퍼포먼스와 시끄러운 음악, 껄렁껄렁한 태도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보수 세력들의 비난을 계속 받아왔는데, 이런 비토적인 기성세대의 지긋지긋한 비난을 일단 피하고 차후 더욱 폭넓은 계층으로 팬층을 확대시키려는 이미지 관리와 방향 모색의 일환으로 잠시 군대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렇게 1950년대 후반에 주요 로큰롤 뮤지션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리키 넬슨 같이 표백처리된 얌전한 음악이나 스탠더드 팝이 가요계를 탈환하게 된다. 대신 흑인들의 R&B/소울 음악이 차트를 지배하게 되는데, The Shirelles를 대표로 하는 걸그룹 열풍(Girl Group Era)과[6] 모타운 전성시대가 이때 시작되었다. [7] 하지만 락앤롤 정신은 이미 사라져 벤쳐스와 섀도우즈 같이 아예 가사가 없고 소재가 철저히 제한되어 있는 서프 음악이나마 기존의 로큰롤의 역할을 대신한다. 비록 소재와 폭은 좁은 장르였지만, 정교한 기타연주 테크닉적인 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의의가 큰 시기이긴 했으나,,[8] 테크닉적인 면모만을 중시해온 나머지 대중을 오래 사로잡지는 못하고 약 2년만에 단명하고 만다.[9]
하지만 서프 음악 말고도 기존의 락앤롤 음악, 그러니까 그 사운드 자체는, 락앤롤 정신을 잃고 R&B 음악과 결합해 트위스트 등의 댄스 음악으로 변질되었다. 처비 체커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트위스트 열풍, 락앤롤 댄스 열풍을 실질적으로 시작한 "The Twist"는 빌보드 지에서 '''역대 최고 히트곡'''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니까 1958년에 시작된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한 노래 중 제일 크게 히트한 노래로 선정되었단 말이다. 덕분에 로큰롤 1세대의 퇴장 이후로도 로큰롤 음악 자체는 한물 간 장르로 남을 벼랑끝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락앤롤은 음악만 남고, 그 정신 자체는 사라지고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기에 1959년~1963년은 사실상 미국 락앤롤의 암흑기였다.
이 당시의 상황으로썬 여담에 가까운 얘기긴 하지만, 각종 스쿨 로큰롤 밴드에서 맹위를 떨치고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리틀 리처드의 동료가 되길 갈망한다는 글을 써놓은 청년 '로버트 짐머맨'은 이런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로큰롤 가수에 대한 꿈을 접고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달고[10] 통기타를 들고 포크 가수로 전향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의 포크 운동 진영 또한 로큰롤을 경멸한 시선으로 보긴 마찬가지였는 데, 기성세대의 사고와는 정반대로 진정성 없는 가벼운 내용에 악기 본연의 소리를 돈 쳐발라서 죽인 상업적 음악이라는 게 주 이유였다. 포크 송의 가사가 주는 울림에 압도당한 밥 딜런은 당시 로큰롤의 가사가 가볍다는 인식에는 공감했지만, '''음악 자체만큼은 전혀 이야기가 달라'''[11] 밑에서 설명할 현상이 벌어지고 난 뒤 태도를 바꾸게 되는데...

2.2. 1차 침공: 1960년대


반면 당시의 영국은 문화적인 면에선 여러모로 미국보다는 개방적인 나라였다. 정작 로큰롤의 종주국이자 본토였던 '''미국에선 1950년대 후반~1960년경을 전후해서 로큰롤 열기가 급작스럽게 꺼져버렸고 그 뒤로도 부활의 기미조차 안 보여서 이젠 생명력을 다해 죽어버린 장르 취급'''을 받았으며 로큰롤을 하는 음악인 자체가 거의 없어서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그러나 영국에선 로큰롤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고 로큰롤을 계속 연주하는 청소년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비틀즈'''로서, 쿼리맨이라는 고교 스쿨밴드로 시작해서 졸업 후엔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리버풀독일함부르크에서 클럽 연주 활동을 하며 실력을 다지고 있었다. 그후로 비틀즈 외에도 리버풀 출신 밴드들이 여럿 나오며 이런 리버풀 출신 밴드들을 가리켜서 머시 비트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제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허먼즈 허미츠, 러빙 스푼풀[12], 프레디 앤 더 드리머스 등이 있다. 그리고 런던에서도 1963~4년경에 더 후, 롤링 스톤즈, 스몰 페이시스 같은 밴드들이 막 활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영국의 여기 저기서 다양한 밴드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영국식 로큰롤 음악이 태동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대중음악계에서도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먼저 세계 문화계의 중심인 미국에서 성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로큰롤쪽과는 거리가 먼 스탠더드팝 위주였고, 대학가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로큰롤은 철없는 10대나 듣는 생각없는 양아치 노래" 취급하며 무시하던 사회참여적인 '포크' 음악계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미국에서 이미 불이 꺼진지 수년이나 되는 로큰롤 음악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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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4일, 빌보드 핫 100 차트.
'''최초의 차트 줄 세우기임과 동시에 빌보드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주간 싱글 차트 (핫 100) 1~5위 동시 차지'''
그러나 1963년 캐피톨사에서 발매한 첫 비틀즈 미국 앨범 'Meet the Beatles'가 그 철없는 10대들의 열광적 호응에 힘입어 미국에서 대히트를 쳤고,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비롯한 여러 싱글곡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잘생긴 영국 청년들이 연주하는 기존의 흑인음악 원류와는 또다른 진화한 로큰롤 사운드에 대한 미국 청소년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드디어 비틀즈의 첫 미국 공연이 결정되었고, 1964년 2월 7일 비행기를 타고 뉴욕 JFK공항에 내려 당시 유명한 쇼 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s)에 출연하였다. 역사적인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비틀즈의 열광적인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비틀즈가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는 7,300만명 이상의 미국인이 이 쇼를 시청했다고 한다.[13]
미국에서 영국 밴드인 비틀즈의 이런 활약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영국 로큰롤 밴드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다른 여러 영국 밴드들도 뒤이어 미국으로 넘어와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이런 '''영국 록 밴드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받아 미국에서도 다시 록음악이 부흥하게 되어 많은 록 뮤지션들이 새로 쏟아져 나왔고, 영국과 미국의 이런 다양한 록 뮤지션들에 의해 저변이 넓어지면서 록 음악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록음악 열기가 영, 미 뿐 아니라 세계로 퍼지면서 '''전세계적으로도 록 음악 열풍이 불어서 록음악이 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게 된다.'''
즉 '''영국에서 시작된 로큰롤 부흥운동이 비틀즈를 계기로 미국에 전파되었고, 많은 인적 자원을 가진 미국을 거치며 더욱 거대한 태풍으로 확대되어 전세계로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션은 1960년대 미국 중서부, 서북부등 서부개발이 진행되던 당시의 서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각 동네의 괴짜 청년들은 "연주력이 되든 안되든" 무조건 밴드부터 일단 만들고, 음질이고 뭐고 부족한 부분은 열정으로 커버하는 기행을 일삼았다. 이것이 바로 개러지 [14]의 탄생이 되었다. 이 때가 1964~5년경으로서 바로 제 1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당시의 주요 밴드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 애니멀스, 킹크스[15], 그리고 조금 뒤로 크림, 더 후였다.
당시의 영국에선 단지 로큰롤뿐 아니라 그 밑바탕이 되거나 관련성이 있는 미국의 루츠(roots) 음악들에 대해 오히려 그 음악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보다 더 애정을 가질 정도로 열려있는 분위기가 많았다. 로큰롤의 뿌리가 되었지만 미국에선 전국적인 인기는 누리지 못했던 옛 블루스 음악들이나,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촌스럽다고 느끼며 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컨트리 앤 웨스턴, 블루그래스 계열의 음악들에까지 영국 뮤지션과 음악팬들은 애정과 존경심을 보이며 흡수하고 소화해 갔다.
이런 당시 영국 음악팬들의 개방적인 풍토가 영화 캐딜락 레코드 후반부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미국의 흑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머디 워터스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음악을 포기 직전이었는데 동료로부터 영국에서 공연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머디는 돈이 없어서 영국으로 갈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런 건 그쪽에서 다 지불한다, 넌 몸과 기타만 오면 된다."라고 한 것. 그리고 영국에 가보니 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인터뷰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심지어 다 백인 기자들이었다. 영국에서 이렇게 흑인 뮤지션들에 대한 대접이 좋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유명 흑인 기타리스트들이 영국으로 넘어가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에선 대접도 못 받으며 무명의 세션맨 시절을 지냈던 지미 헨드릭스도 이런 흐름을 타고 영국행 비행기를 탔으며, 영국에서 보여준 테크닉과 필링으로 영국 뮤지션들이 완전히 뻑가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렇게 영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후 미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그렇다고 미국 음악이 마냥 빌빌거리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위 언급했던 밥 딜런은 비틀즈와의 조우 이후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16] 일렉기타를 다시 잡아 포크 록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며 록 역사의 주역이 되었고, 밥 딜런의 지원을 받은 버즈라는 밴드 또한 빌보드는 물론 영국 차트까지도 정복할 정도로 상당한 위상을 보이긴 했다. 비치 보이즈의 영국에서의 성공 또한 고무적인 요소.[17]
한편으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프랭크 자파 등의 음악가는 지하에서 후대 록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실험을 시도하고 있었으며,[18] 도어즈, 재니스 조플린,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사이키델릭 밴드가 두각을 나타내긴 했으나 전부 영국음악의 위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전성기를 담은 영상. 더 후의 로저 달트리와 피트 타운젠드, 비틀즈의 존 레논,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가 메인 가수로 참여했으며 중간중간에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와 이미 사망한 롤링 스톤즈의 전 리더 브라이언 존스도 나온다. 1968년에 열린 로큰롤 서커스 이벤트이며, 이것이 브라이언 존스가 참여한 마지막 롤링 스톤즈 공연이었다고 한다.

2.3. 2차 침공: 1970년대


그 다음 1970년대에도 제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이어진다. 이전의 롤링 스톤즈는 각종 명반 행렬로 최고의 전성기를 여전히 누리고 있었고, 비록 해체했지만서도 비틀즈의 멤버들 또한 각자도생하며 제각기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존 레논Imagine 등을 필두로 반전 운동을 벌이며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점은 괄목할만한 행적.
그리고 70년대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밴드를 나열하자면, [19],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사바스 등의 하드록 밴드[20]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의 일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었다.[21] 이 당시 미국에서도 걸출한 밴드들은 많이 있었지만 위의 영국 밴드들에 비해서는 연주 실력이나 음악성에서 대체로 밀렸기에 영국 밴드들에게 안방 시장을 고스란히 내줬다.
70년대 중요한 음악의 동향중 하나인 파워 팝의 도래 또한 영국에서 발생한 장르. 특히 주요 밴드로 거론되는 빅 스타는 비틀즈를 추종하던 미국 밴드였는데, 1차 침공 당시 미국에 뿌려놓은 영국음악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22] 미국에 각종 유산을 남겨온 글램 록 또한 영국의 작품이었으며, 데이비드 보위 등 참신함을 보여준 스타들은 미국을 정복했고 빌보드 차트의 성과 또한 탁월했다.[23] 그리고 미국인도 섞여있는 밴드라 완전한 영국 밴드라기엔 애매하지만,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 또한 상업적으로 월등한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당시 미국의 주요 밴드로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그레이트풀 데드, 도어즈, 산타나, 레너드 스키너드, 올맨 브라더스 밴드, CCR,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마운틴, 에어로스미스, 이글스 등등이 있었다. 그들의 음악도 훌륭했지만, 그래도 앞서 나열한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등의 커다란 아성을 무너트리기엔 역부족이었다.[24] 그리고 이후로도 8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팝 메탈, 스래시 메탈 등 헤비메탈 음악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까지 록음악은 미국보다 영국이 훨씬 강세였다.
참고로 70년대 미국 가요계는 엄연히 자립에 성공한 상태로서 1970년 비틀즈가 해체하고, 히피 문화가 죽으면서 싸이키델릭 락의 자리를 소프트 락하드 락이 양분하게 되는데 소프트 락은 철저한 미국 음악이었고, 하드 락은 상술했듯 레드 제플린 등 소수의 영국 밴드를 제외하면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와 같은 현지화에 성공한 밴드들이 미국의 지분을 접수했다. 이 외에도 수요가 있던 컨트리, 포크 등의 미국만의 조류도 존재했다. 여기에 미국 흑인들의 음악인 소울, 펑크(Funk)는 70년대 초중반 락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70년대 중후반의 디스코는 약 5년 동안 락음악을 침체기에 빠지게 했고 유명 락 밴드들마저 한번쯤은 차용해볼 정도로 상당한 위세를 떨친 바 있었다.[25]
이런고로 위키피디아나 대다수의 영미권 음악 평론지에서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늦게 잡아도 1969년을 끝으로 종료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이 후 70, 80년대에도 인베이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매체는 이 나무위키를 포함한 극소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론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 한다면 60년대의 현상만을 칭하므로 이에 유의할 것.

2.4. 번외편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 하면 보통 1960년대의 1차 침공과 1970년대의 2차 침공을 의미하지만, 폭풍간지가 흐르는 이 명칭을 갖다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후 시대에도 이 명칭을 종종 사용한다. 그러나 이후에서는 영향력과 음악사적 중요성에서든, 인기와 열풍에서든 1, 2차때에 비하면 한참 약하기에 인베이전 시리즈(?)에 넣을 수 있을지 말지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2.4.1. 1980년대~1990년대 전반


70년대까지 승승장구하던 영국의 록 음악은 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그 위력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크로스오버를 실현한 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으로 대중음악의 중심이 다시 미국으로 기울어졌으며, 미국 내 메탈 밴드들이 떠오르면서 록 음악의 주도권을 미국 쪽이 탈환하게 된 것.''' 사실 이미 영국에서 70년대 후반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라는 메탈 무브먼트가 먼저 시작되어 도화선의 역할도 영국이라 칭할수는 있겠지만, 미국에서도 머틀리 크루 등을 필두로 팝 메탈, 글램 메탈 등 독자적인 조류가 주류가 되어버리면서 영국의 록밴드들은 자연스레 밀려나게 된것이다. 사실 80년대의 주요 밴드들을 꼽아보면 영국 밴드의 비중이 확실히 줄어든다. 당시 반열을 나열하자면 메탈리카, 메가데스, 본 조비, 건스 앤 로지스 등등...앞서 말한 NWOBHM의 대표주자인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모터헤드도 유명했지만 미국의 철옹성을 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이 시기의 영국에서도 조이 디비전, 더 스미스, 큐어, 스톤 로지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26] 같이 모던락 계열에서 족적을 남긴 밴드들이 활약했지만, 미국에선 전혀 인기와 관심을 끌지 못했다.[27]
그나마 영국 내에서 소수의 팝 메탈이나 블루스 밴드 정도가 미국에서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데프 레파드만이 미국 시장 내에서 미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특히 Hysteria 앨범은 건즈 앤 로지스나 본 조비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에도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는 등 위세를 떨쳤다. 이 이외에 1985년을 지배한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있다. 스팅과 함께 작업한 Money For Nothing이 빌보드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수록된 앨범인 Brother In Arms가 대박을 쳤다.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MTV를 비판하는 내용인데도 너무 잘 팔렸기 때문에 MTV가 이 노래의 뮤비를 계속 방영하기도 했다.
90년대가 되었지만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얼터너티브 록의 초반기 주도권도 미국쪽이 장악했다. 너바나로 대표되는 시애틀 그런지나 스매싱 펌킨즈와 같은 밴드들의 위력에 영국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록 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팝음악계 전체로 보자면 80년대 중후반, 뉴웨이브 계열의 영국 팝 뮤지션들에 의해 행해졌던 미국시장 침공은 상당한 위세를 떨치며 인기를 끌었다. 조지 마이클 같은 블루 아이드 소울 계열부터 릭 애스틀리, 디페시 모드, 듀란 듀란, 스팅의 폴리스,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 등이 그 대표적인 인기 뮤지션이었다. 이들을 제 3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칭하는 이들도 꽤 있는데,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다음 항목에 나오는 90년대의 브릿팝을 3차로 본다.

2.4.2. 1990년대 중후반


미국 록음악계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로 인한 그런지의 쇠퇴, 뉴메탈의 부흥으로 어지럽던 90년대 중후반에 영국의 모던록 밴드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때의 주요 밴드론 오아시스, 블러[28], 라디오헤드 등으로 특히 브릿팝 계열의 밴드가 많았다. 그러나 상업적인 성적은 선배들이 이뤄놓은 것에 비하면 미미했다. 오히려 영국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미국 적인 얼터너티브 음악으로 승부를 보았던 부시와 브릿팝의 대표격인 오아시스만이 미국시장에서 히트를 쳤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
추가하자면 95년, 영국의 최정상급 보이밴드였던 테이크 댓의 곡 Back For Good이 빌보드 싱글차트 7위까지 오르자 테이크 댓은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려 했지만 로비 윌리엄스의 탈퇴로 인해 그룹이 해체가 되면서 실패했다. 그리고 이들의 실패는 밑거름이 되어 역사적인 걸그룹을 탄생시켰는데, 스파이스 걸스야말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비로소 인베이전의 재림이라 칭할만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2.4.3. 2000년대 이후


2000년대에는 콜드플레이의 활약이 눈부셨다. 3집 X&Y가 2005년 최다 음반 판매량, 4집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가 2008년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전 세계를 지배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샘 스미스를 위시한 영국 가수의 복고풍 소울, R&B 장르 음악이 돌풍을 일으켰다. 이른바 '''소울 인베이전'''.
혹자는 영국에서 짧고 굵었던 장르였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씬도 인베이전의 후보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리버틴즈는 철저하게 내수용 밴드였고, 프란츠 퍼디난드는 미국 성적이 크게 시원치 않은데다가, 악틱 몽키즈는 그나마 빌보드 상위권에 들 정도로 히트를 치긴 했어도 해당 장르로 인기를 끌었다고는 보기는 힘드므로[29] 의미있는 성과라 보긴 힘들다. 사실 이 장르도 스트록스라는 미국 밴드에 의해 촉발된 장르였고 화이트 스트라입스, 킬러스 등 상업적으로나 평론적으로나 의미있는 성과물도 미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냥 브리티시 장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그리고 해당 시기에는 영국 록 밴드들의 미국내 약세가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위 언급했던 악틱 몽키즈를 제외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밴드 대다수를 비롯해 트래비스포스트 브릿팝 계열 밴드와 뮤즈, 플라시보, 스타세일러 등의 알려진 걸출한 밴드들도 영국에서 등장하긴 했지만, 유명세와는 대비되도록 미국내의 객관적인 상업적 성적은 상당히 저조했다. 이러는 와중에 블러의 자매 그룹인 고릴라즈 정도가 Demon Days로 빌보드 9위를 달성하는 정도로 체면은 살리기는 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클럽문화가 유행하고 힙합,EDM이 대세가 되면서 전반적으로 영국음악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아졌으나 원디렉션이란 보이밴드의 새로운 계보 등장과 함께 아델, 에드 시런 두 가수가 세계 음악시장을 휩쓸고 다니면서 영국 대중음악의 건재함을 알렸다.

3. 유사한 사례


  • 1980년 말엽쯤에 그랜트 모리슨, 앨런 무어, 닐 게이먼 등의 영국계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 코믹스계에 엄청난 인기와 반향을 불러일으킨 현상을 코믹스계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칭하기도 한다.
  •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나라가 몇 개 더 있는데 그 중 제일 두드러지는 것이 영미권 국가가 아닌, 스웨디시 팝, 블랙메탈으로 유명한 스웨덴이다. Swedish Music Miracle(스웨덴 음악의 기적)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이고 음악은 스웨덴의 대표적 수출품으로 미국, 영국 다음으로 음악 수출이 많다. 스웨덴 음악의 대표 뮤지션으로는 ABBA, Alesso, Avicii, Bathory, Brainbombs, Dungen, Eric Prydz, Europe, Jessica Folcker, Joakim Karud, Refused, Roxette[30] The Cardigans, Wannadies, 다크 트랭퀼리티, 더 리얼 그룹, 라쎄 린드, 앳 더 게이츠, 사바톤, 소일워크,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 에이스 오브 베이스,[31] 인 플레임스, 잉베이 말름스틴, 켄트#s-5, 토브 로, 피터 비외른 앤드 존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듀서 맥스 마틴 등이 있다.
  • 같은 영어권국가이자 영연방국가인 호주 역시도 미국 시장을 점령한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AC/DC, 비 지스, Men at Work, Little River Band, 바르도, Savage Garden, 시아 플러, 에어 서플라이, 올드맨 리버, 제이슨 도노반, 카일리 미노그, 트로이 시반 등이 미국과 전세계에 족적을 남겼다.[32] 그 외에 영국과 이웃나라인 아일랜드에서도 U2, 엔야, 로리 갤러거 같은 거물들을 배출한 바 있었고 독일스콜피온스, 크라프트베르크가 나름의 주목을 받는 등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다른 서방국가들에서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 미국은 아니지만 어느 나라의 음악이 다른 나라의 대중음악계에 침공이라 부를 만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례로 동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미친 한류열풍K-POP이탈리아이탈로 디스코, 유로비트계열이 일본을 휩쓸었던 것. 그리고 홍콩의 칸토팝(Canto Pop)이 중화권과 동남아의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 있다.

  • 또한 음악계는 아니지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인하여 한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심한 탄압으로 쇠퇴한 미국 로큰롤계에 로큰롤 팬들의 니즈를 비틀즈가 채워 줬듯이, 만화 검열제합동출판사로 인해 '무장해제'된 한국 만화계에 사실상 '무혈입성'한 것이기 때문.
  • 2017년 미국언론에서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두고 Korean Invasion, K-POP Invasion의 용어들을 쓰며 비틀즈와 비교하기도 한다. ## 둘 다 보이밴드이고[33] 팬덤 역시도 유사한 외국의 가수들에다가 비록 장르는 달라도 미국에서 대가 끊긴 부분을 공략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정작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같은 아이돌의 원조인 미국은 정작 2000년대 초반의 백스트리트 보이즈*NSYNC 이후로 현재 BTS 포지션의 그룹이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그룹 조차 대중적 영향력이 거의없다.[34] 비틀즈와는 아직까지는 큰 차이는 있으나 최초로 미국공항에 도착했을때 수많은 팬들이 모였으며 팬들의 충성도와 적극성이 매우 높은 등 비슷한 면이 많은것이 사실이다. 비틀즈는 이전의 가수들과는 다르게 매스미디어를 활용하여 파급력을 높였으며 BTS는 유튜브SNS같은 인터넷 뉴미디어를 통해 인기를 얻고 있는 점으로 새로운 마케팅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관련 문서



[1] 사촌 동생의 딸이었다.[2] 제리 리 루이스의 3번째 결혼이었고, 전부인과의 결혼 관계가 법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이라서 중혼이었다. 그래서 문제의 사촌은 제리 리 루이스를 근친상간 및 중혼 혐의로 고소하려다가 딸이 불행해진다는 이유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약 1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이혼했다. 사실 가장 문제의 근원인 것은 이 결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당시 미국의 가족법인 것 같다.[3] 물론 나중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록음악의 인기가 다시 폭발하자 그 정신 나간 말을 번복하고는 간간히 로큰롤 공연을 하면서 지낸다.[4] 당시 그가 있던 주의 법률에는 미성년자와 허락없이 주 경계를 넘으면 '''추행죄'''에 버금가는 취급을 받았다. 이게 아니라도 척 베리는 이 백인 소녀를 데리고 순회 공연을 했는데, 미성년자를 데리고 주 경계를 넘어 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것은 연방법 위반이었다. 척 베리는 이 소녀가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고(당연히 재판이 인종차별이라는 것도) 주장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5]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군 복무 중(6.25 전쟁 중에 주한미군에서 복무한 적은 있지만, 전장에 나간 적은 없다.) 오토바이를 몰다 다쳐 전역을 했는데, 이 사고로 다쳤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결국 진통제로 고통을 극복하다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6] 1961년 미국 흑인 R&B 걸그룹 "The Shirelles"의 대성공으로, 1964년까지 수많은 걸그룹이 미국 음악계를 차지했다. 슈프림즈는 이 걸그룹 열풍 때 결성되었지만 인기는 걸그룹 열풍 끝물이었던 1964년에 시작되었다. 슈프림즈의 히트로 기존의 걸그룹 열풍이 끝나고 모타운의 실질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7] 1960년 바렛 스트롱의 "Money (That's What I Want), 1961년 스모키 로빈슨과 미라클스의 "Shop Around", 1962년 Mary Wells의 대히트, 1963년 당시 13살이었던 스티비 원더빌보드 핫 100 1위, 마빈 게이가 "Pride And Joy"로 첫 빌보드 탑 10 기록, 마샤 리브스 앤 더 벤델라스의 빌보드 핫 100 4위곡 "Love Is Like A (Heat Wave) 등등. 슈프림즈, 템테이션즈,더 포 탑스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이듬해인 1964년 인기를 얻기 시작함.[8] 당시의 밴드들인 벤쳐스, 섀도우즈(클리프 리처드의 백 밴드로 시작한 영국 밴드)같은 경우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기타 연주곡을 정립하고 각종 이펙터의 등장으로 현대적인 기타사운드가 도래하기 시작한다.[9] 서프 음악의 전성기는 1962년 말~1964년 초반.[10] 훗날 예명 '밥 딜런'은 개명 신청으로 법적으로도 완전히 본명이 된다.[11] 이것말고도 포크 진영을 기성세대와 다를 바 없는 꼰대집단으로 인식한 탓도 있다.[12] 러빙 스푼풀은 미국 밴드였지만 영국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13] 이는 1964년 미국 인구인 1억 9천만 명의 4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물론 그 시절엔 미국도 TV 채널이 몇 개 안 되고 인터넷, 스마트폰, 게임, 비디오 등 다른 대체제 오락거리도 없을 때라서 전반적인 시청률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높았던 시절이긴 하다.[14] Garage(미국에서는 '거라지'쪽에 가깝게 발음)는 '차고'라는 뜻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젊은이들이 연습 공간이 없어 집 차고에서 연습한 것에 유래한다. 미국 청춘 영화 등에서 자주 볼수 있는 광경이다.[15] 영향력이 영국쪽에서 막강했고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 등 워낙 넘사벽 수준의 동시대 밴드들이 미국을 휘젓고 다녔던지라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여서 그렇지, 이들도 빌보드 차트 중상위권 정도는 개근했고 라몬즈 등 미국내 펑크 그룹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던 밴드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멤버임은 롤링 스톤지 등지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증된 바. https://www.rollingstone.com/feature/the-british-invasion-from-the-beatles-to-the-stones-the-sixties-belonged-to-britain-244870/[16] 비틀즈 입장에서도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게 밥 딜런과의 만남부터였다. 그리고 비틀즈는 밥 딜런에게 피우면 음악적 영감이 솟아오르는 담배 비슷한 것도 같이 배웠다.[17] 서프 록에서 벗어나 Pet Sounds라는 역작을 통해서 영국에서도 주목할만한 음악성을 보이는데 성공했으며, 미국의 빌보드 10위보다도 높은 영국 차트 2위를 기록하는 객관적인 수치가 증명해준다.[18] 그러나 이들의 차트 성적은 지금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영국은 물론 본토 빌보드 조차.[19] 퀸은 유독 미국에서만 죽쑨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죽쒔다는 것도 유럽에서의 월등한 성적과 비교해 그렇다는 거지 아래에 언급되는 블랙 사바스예스와는 비교하기 무안할 정도로 높은 성공이긴 하다. 81년에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빌보드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점이 대표적인 성과. 1981년에 4주 연속 1위는 지금의 10주 1위 정도 됐었다. 그러나 이때 이 곡이 히트했을 때 많은 미국인이 퀸을 흑인 디스코 밴드로 생각했다고 한다.[20] 사실 이 중에서 정말로 미국 음악계를 평정한 밴드는 레드 제플린밖에 없다. 딥 퍼플은 유럽에서 활약했으나 미국 성적은 조금 모자랐고, 블랙 사바스는 그 딥 퍼플에도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으며, 이후 오지 오스본의 솔로 활동이 성공하자 뒤늦게 빛을 본 케이스이다. 흔히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블랙 사바스를 70년대 하드 록의 대표적인 밴드들이라 하지만 이는 철저히 후대에 미친 영향력만을 고려한 평가이고, 실제 활동 당시에는 제플린과 나머지 둘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21] 미국 시장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가 유일하다. 제스로 툴이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르거나 Roundabout이 싱글 차트 8위에 오르는 등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지만 전반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은 미국에서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출신의 캔자스, 스틱스 등이 영국 밴드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킹 크림슨은 그 음악적 평가와는 별개로 미국은커녕 영국에서도 제대로 인기를 얻은 적이 없다. [22] 파워 팝은 당대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대표주자 중 하나인 배드핑거의 불운의 역사와 멤버 피트 햄의 자살이란 비극적인 밴드사는 유명한 이야기. 그래도 배드핑거의 대표곡 'Without you'는 해리 닐슨이 부른 버전이 빌보드 1위를 달성하는 위업을 달성하기는 했다.[23] 보위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소울을 받아들인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글램 뮤지션 중에서는 잘나가는 정도였으며 티렉스 등 대다수의 글램 록 밴드는 미국 진출에 실패했다. 조브리아스나 뉴욕 돌즈 등 미국에서 등장한 글램 록 밴드도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야 했고 루 리드의 글램 록 작품 Transformer 또한 영국에서 인정받은 반면에 정작 조국인 미국에선 밋밋한 성적에 그쳤다. 오히려 KISS, 앨리스 쿠퍼 등 글램 록 요소를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형한 미국 밴드들이 원본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당시 글램 록이 미국에 먹히지 않은 이유로는 글램 록 특유의 양성적인 외견이 보수적이었던 미국 대중의 성향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런 미국의 보수적 면모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해서 I Want to Break Free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퀸도 글램 록의 성격을 띄는 퍼포먼스도 줄곧 보여주곤 했다.)[24]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활동 당시 위의 미국 밴드들은 앞서 언급된 밴드들에 비해 미국 내의 인지도/평가에서 오히려 우위에 있었다. 참고로 이 단락에 언급된 밴드 중 미국내 판매고가 가장 높은 밴드는 이글스이다.[25] 76년 윙스Silly Love Songs, 78년 롤링 스톤스Miss You, 79년 KISS의 I Was Made For Lovin' You와 블론디의 "Heart of Glass", 80년 핑크 플로이드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II, 79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79년 자신의 곡 "The Main Event/Fight"과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와 함께한 곡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이다.[26] 아일랜드 밴드긴 해도 영국 본토에서 활동하고 영국 레이블에서 활동했기에 영국 밴드로 가정.[27] 사실 이들 중 조이 디비전, MBV는 영국에서도 상업적 성공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성공했다는 스미스 같은 밴드도 후술된 데프 레파드같은 팝 메탈 밴드와 비교하면 최소 '''수십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애초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디 밴드였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미국에서도 소닉 유스픽시즈, R.E.M., 리플레이스먼츠 등 모던록 내지 얼터너티브 록 부문에서 활약상을 보인 밴드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들 역시 주류까지 올라서진 못했다.[28] 사실 이 반열에 끼기엔 블러의 미국 시장 성적은 그룹의 인지도에 비해 처참한 수준이다. 오히려 버브는 Bitter Sweet Symphony가 Hot 100에서 12위라도 했지 블러는 그런거 없다. 그러나 Song 2는 블러의 노래 중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29] 주요작인 1집 앨범이 포펑 리바이벌의 끝물시기에 나온 앨범이기도 하고 그뒤로는 해당 장르에서 벗어나버렸다.[30] 락시트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빌보드 핫 100 1위곡 4개를 기록하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31]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명실공히 1994년을 지배한 음악 그룹이다... 그해의 연말차트 1위, 9위, 10위가 에이스 오브 베이스였다. 다만 히트곡은 이 3개밖에 없다...[32] 특히 70년대~80년대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AC/DC, 비지스, Men at Work 등 대다수의 그룹들의 주요 멤버들 대부분은 호주 태생이 아닌 영국 이주민 출신이다.[33] 물론 비틀즈가 현재의 아이돌 그룹과 같이 기획사 차원에서 보이밴드로 결성된 건 당연히 아니었고 멤버들 개인의 행보도 아이돌의 그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들 본연의 행동 양식과는 무관하게 대규모 흥행을 불러일으킨 마케팅 전략이 기획형 보이그룹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당장 최초의 기획형 보이그룹부터가 대놓고 비틀즈 벤치마킹이었으니...[34] 원 디렉션, 조나스 브라더스등이 공백을 메워준 보이그룹으로 거론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