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칼리가리스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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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아돌포 발론체리
(1927~1930)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1931~1934)
'''

비르지니오 로세타
(1934)

'''유벤투스 FC 역대 감독'''
비르지니오 로세타
(1935~1939)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1939~1940)'''

페데리코 무네라티
(1940~1941)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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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34'''

[image]
이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Umberto Caligaris)
생년월일
1901년 7월 26일
사망년월일
1940년 10월 19일
국적
[image] 이탈리아
출신지
카살레 몬페라토[1]
포지션
풀백[2]
신체조건
175cm / 70kg
등번호
-[3]
소속팀
AS 카살레 (1919-1928)
'''유벤투스 FC (1928-1935)'''
브레시아 칼초 (1935-1937)
국가대표
59경기 / 0골 (1922-1934)
감독
브레시아 칼초 (1935-1937)
AS 루케세 (1937-1938)
모데나 FC (1938-1939)
유벤투스 FC (1939-1940)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생활
2.2. 아쉬운 월드컵
2.3. 감독 생활 그리고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개요


이탈리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유벤투스 FC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선수 생활


칼리가리스는 12살 때부터 출신 지역인 카살레 몬페라토를 연고지로 하는 AS 카살레와 인연을 맺었다. 이미 17살 때 지역 육상 대회에 참가하여 100m 달리기와 멀리뛰기​​에서 우승하여 탁월한 운동능력을 선보인 칼리가리스는 지역 라이벌인 발렌사나와의 경기에서 성인팀에 첫 선을 보이며 데뷔전을 3대1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이야 AS 카살레가 세리에 A에서 참으로 보기 힘든 팀이지만 칼리가리스가 데뷔하기 전인 1913~14 시즌에는 이탈리아 1부 리그에서 우승한 적도 있는 나름 강팀이었다. 하지만 카살레의 역대 최고 스타인 칼리가리스가 팀에 들어왔음에도 세리에 A 우승은 칼리가리스가 있을 때도 그래왔고 아패로도 께속 못했다.
하지만 카살레에서만 우승을 못했지 실력도 인정을 못 받은 건 아니라서 1922년에는 아주리 유니폼도 입는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비르지니오 로세타땜빵으로 발탁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로세타에 비해 능력이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곧 증명해냈고, 로세타의 복귀 이후에는 2년간 로세타와 라이트 풀백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었다. 게다가 승자는 오히려 칼리가리스였다. 로세타를 밀어내고 라이트 풀백 자리를 차지한 것. 2년 후 이 문제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 초기의 전설적인 수비수 렌초 데베키[4]가 은퇴한 후에 칼리가리스가 데베키의 자리였던 레프트 풀백으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칼리가리스는 경쟁자였던 로세타, 새로 들어온 잔피에로 콤비 등과 함께 대표팀에서 견고한 수비진을 구축했고, 아예 1928년에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이후에 라이문도 오르시와 같이 유벤투스 FC로 팀을 옮겼다.[5] 유벤투스에는 이미 콤비와 로세타가 주전 멤버로 활약하고 있어서 칼리가리스가 새 팀에 적응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렇게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들을 채워서 팀 스쿼드의 질을 끌어올린 유벤투스는 당장에 새로 창설된 세리에 A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1930년부터 35년까지 5년 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2.2. 아쉬운 월드컵


칼리가리스는 월드컵 준비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주장인데다 소속팀도 이탈리아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느덧 칼리가리스는 국가대표 선수로써 60회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6]
하지만 칼리가리스의 명예로운 마지막을 막은 팀이 바로 당시 유럽에서 매우 잘 나가던 분더팀 오스트리아였고, 그들은 토리노에서 총력전을 펼친 이탈리아를 4:2로 깨뜨렸다. 이후에 칼리가리스는 대표팀에 소집은 되었지만 푸른 유니폼을 입고는 다시 경기장에 나서지는 못했고, 월드컵 명단에도 역시 선발되었지만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주장완장 역시 로세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2.3. 감독 생활 그리고 사망


월드컵이 끝나고 1935년에는 브레시아 칼초에 플레잉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2년간 더 활약한 뒤 루케세, 모데나를 거쳐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칼리가리스의 건강은 이미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는데 1936-37 시즌에는 패혈증 증세로 고생한 적도 있었다. 결국 1940년 칼리가리스는 39세란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옛 동료들인 로세타와 콤비 등과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다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으로 신속히 옮겼지만 이미 동맥류로 사망한 뒤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수비수로서는 모든 포지션을 뛸 수 있을 정도로 수비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으며 그의 시대에선 단연 이탈리아 최고의 수비수였다. 강하고 집요하며 강력한 태클을 가진 수비수였으며 빠르고 공중볼에도 능하며 체력도 좋았다. 또한 훌륭한 테크닉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비토리오 포초는 이런 그를 두고 검투사같다고 칭하기도 했다. 외모, 별명이나 수비 스타일 면으로 미뤄보면 존 테리가 칼리가리스의 면모와 비슷한 면이 있다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A매치 출전 기록인 59회는 자친토 파케티가 돌파하는데 37년이 걸렸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피에몬테 주 소속으로 토리노 동쪽에 있다.[2] 주 포지션은 레프트 풀백(현재의 센터백)[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4] 렌초 데베키는 1894년생이니 대략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파울리노 알칸타라등과 비슷한 나잇대의 선수이다. AC 밀란에서 데뷔했지만 제노아에서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고, A매치에도 43경기에나 출전한 초기 이탈리아 대표팀의 간판 수비수였다. 스위퍼로써, 빅싸커의 네임드 톰 스티븐스가 매우 좋아하는 수비수이기도 하다.[5] 물론 오르시와는 목적지가 같은 것일 뿐 동시에 팀을 옮긴 것은 아니었다.[6] 지금이야 A매치를 정기적으로 치르고 각종 국제 대회들이 있지만 이 당시에는 새로 생긴 월드컵, 올림픽을 제외하면 A매치가 가끔 열리는 친선 경기밖에 없었다. 브라질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초대 월드컵을 앞둔​ 5년 동안 대표팀이 아예 소집되지 않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A매치 출전 횟수가 50회를 넘는 선수를 찾아보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