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피에로 콤비

 

'''잔피에로 콤비의 감독직 및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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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비르지니오 로세타
(1934)

'''잔피에로 콤비
(1934)
'''

아틸리오 페라리스
(1934~1935)

'''잔피에로 콤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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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34'''

'''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
'''이름'''
'''잔피에로 콤비
Gianpiero Combi'''[1][2]
'''출생'''
1902년 11월 20일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image]
'''사망'''
1956년 8월 12일 (향년 54세)
이탈리아 토리노
'''국적'''
이탈리아 [image]
'''신체'''
174cm, 72kg
'''직업'''
축구선수(골키퍼 / 은퇴)
''' 소속 '''
''' 선수 '''
'''유벤투스 FC (1921~1934)'''
''' 국가대표 '''
47경기(이탈리아 / 1924~1934)
1. 개요
2. 생애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여담
5. 수상
5.1. 클럽[3]
5.2. 국가대표
5.3. 개인


1. 개요


'''"내가 기억하는 콤비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쉽게 골을 막아냈고, 이것은 게임에서 완벽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주세페 메아차

'''고무 인간'''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월드컵 우승을 이끈 주장. 또한 유벤투스 FC원 클럽 맨이자 초기 전성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유벤투스에서도 이런 콤비를 잊지 않고 레전드로 대접하고 있다.

2. 생애



2.1. 클럽


토리노에서 태어난 잔피에로 콤비는 1921년에 처음 유벤투스 FC 1군 엔트리에 들었고 시즌 중이던 1922년 2월 5일, AC 밀란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콤비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가 버티는 수비진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그대로 활약했고, 유럽 최고라는 평가를 듣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유벤투스에서도 물론 그들의 활약은 대단해서 그들이 버틴 수비진은 철옹성이었고, 그를 바탕으로 세리에 A 5연패를 이끌었다. 이 기간에 콤비는 367경기에 출전하여 잔루이지 부폰, 디노 조프, 스테파노 타코니의 뒤를 이어 유벤투스의 골키퍼 출장 순위 4위에 올라있다. 그는 최초로 세리에 A 4연속 우승을 달성한 골키퍼이며, 1925~26시즌에 기록한 934분 연속 무실점 기록은 부폰이 974분 무실점 기록을 만들기 전까지 80년간 지속되었다. 또한 토리노 로컬 보이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2.2. 국가대표팀


콤비의 A매치 데뷔전은 1924년 4월 6일, 상대는 헝가리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7:1로 대패했다.(...)[4] 이 덕분에 이후 1년간 국가대표팀에 발탁이 되지 않았지만 이듬해 프랑스와의 시합에 다시 발탁되었고, 콤비는 은퇴무대였던 1934년 월드컵까지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28년 올림픽에 콤비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고, 4강전에서 남미 최강팀 우루과이를 만나 분전했지만 3:2로 아깝게 패배하고 동메달에 그쳤다.

2.2.1. 1934년 월드컵


'''FIFA 월드컵 최초의 골키퍼 위닝 캡틴'''
콤비는 토리노에서 있었던 오스트리아 전의 실망스러움을 뒤로 한 채 선수 은퇴 선언을 하였다. 그렇게 월드컵에 나갈 계획이 없었던 콤비. 그리스와의 지역 예선전에서도 콤비, 로세타, 칼리가리스가 모두 빠지고 알레만디, 체레솔리 등의 신진 선수들로 대체되었고 이탈리아는 4대0의 낙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콤비의 자리를 물려받을 젊은 골키퍼 카를로 체레솔리가 훈련 중에 슈팅을 막다가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콤비가 급하게 수혈되었다. 원래 포초의 요청을 고사했지만 콤비도 마음을 바꾸었고, 결국 월드컵이 콤비의 은퇴무대가 되었다.
첫 경기인 미국전에서 이탈리아는 7:1로 미국을 대파했다. 하지만 주장이었던 비르지니오 로세타가 출전하지 못하자 콤비가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다.[5] 그는 8강에서 만난 스페인리카르도 사모라와 함께 대단한 선방대결을 펼쳤고, 결국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4강전에서는 토리노에서 망신을 주었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결정적인 선방을 2개 기록하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체코슬로바키아까지 꺾고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콤비는 최초로 주장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골키퍼가 되었다. 이 기록은 이후 디노 조프, 이케르 카시야스, 위고 요리스가 재현해낸다.

2.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유벤투스에서 골키퍼 코치 및 스카우팅을 담당하였다. 1951년에는 이탈리아축구협회의 기술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뛰어난 탄력과 안정감을 모두 갖춘 골키퍼로 그의 탄력은 174cm라는 골키퍼로서 상대적으로 작은 키를 상쇄시키기에 충분했다.[6] 그 덕분에 붙은 별명이 Uomo di Gomma. 즉, 고무인간이었다.
그 외에도 수비 조율 능력, 판단력, 슈팅 방어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당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사모라, 플라니치카와 함께 30년대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떨쳤다.
국가대표로는 통산 47경기 65실점, 리그에서는 351경기 336실점을 기록하였다.[7]

4. 여담


  • 193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만난 이탈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두 팀 모두 골키퍼 출신 주장[8]을 보유한 팀이었고, 골키퍼 출신 주장을 가진 팀끼리 월드컵 결승에서 만난 것은 현재까지 이 대회가 유일하다.
  • 유로 1980을 전후해서 당시 유벤투스의 홈구장이었던 스타디오 올림피코 디 토리노의 이름을 잔피에로 콤비로 헌정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기각되었다.

5. 수상



5.1. 클럽[9]


  • 세리에 A 우승 5회: 1925-26, 1930-31, 1931-32, 1932-33, 1933-34

5.2. 국가대표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34
  • 올림픽 3위 1회: 1928
  •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 우승 2회: 1927-30, 1933-35

5.3. 개인


  • 이탈리아 기사 작위: 1955
[1] 콤비의 기록을 보면 잔피에로와 잠피에로라는 이름이 둘 다 사용되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원래 잔피에로라는 이름은 잔니-Gianni와 피에로-Piero의 합성어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어의 발음 특성상 P앞의 N은 M으로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잔피에로와 잠피에로가 동시에 쓰이는 것이고, 잠파올로도 같은 식의 유래를 가진다. 따라서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도 넓게 보면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위키, 유벤투스 공식 홈페이지와 같은 이탈리아 웹사이트에서는 전부 잔피에로 콤비로 등재되어 있고 잠피에로 콤비라는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2] 영어발음을 따르면 지안피에로로 불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탈리아 발음에 무게를 두고 잔피에로 콤비로 항목을 작성하였다. 물론 이 문서는 지안피에로 콤비로도 연결되었다.[3] 콤비는 유벤투스 원 클럽 맨이므로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4] 그리고 이 경기가 이탈리아 대표팀 역사상 최다점수차 패배이다.[5] 1934년 월드컵이 개막할 무렵의 이탈리아의 공식 주장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였고, 비르지니오 로세타가 부주장. 콤비는 다음 순위였다. 하지만 토리노에서 오스트리아에 패배한 이후 칼리가리스는 대표팀에는 뽑혔지만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고, 로세타는 미국전이 마지막 A매치 출전이 되었다.[6] 당시 서양인들의 평균키가 대략 170cm 정도였다. 현대 축구 골키퍼들의 키와 비교하면 대략 김병지 수준의 키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7] 집계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리그 통산 실점률이 1이 안 되는 것은 공통이다.[8] 체코슬로바키아의 주장은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9] 콤비는 유벤투스 원 클럽 맨이므로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