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2세

 



[image]
제210대 비오 2세

'''제211대 바오로 2세'''

제212대 식스토 4세
[image]
'''교황명'''
바오로 2세 (Paulus II)
'''본명'''
피에트로 바르보 (Pietro Barbo)
'''출생지'''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사망지'''
교황령 로마
'''생몰년도'''
1417년 2월 23일 ~ 1471년 7월 26일 (54세)
'''재위기간'''
1464년 8월 30일 ∼ 1471년 7월 26일 (6년 330일)
'''문장'''
[image]
211대 교황.
1417년 2월 23일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상업에 종사할 작정이었으나 외삼촌이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된 것을 보고 자신도 성직자가 되었다. 에우제니오에 의해 그는 순식간에 볼로냐의 수석부제, 체르비아의 주교, 비첸차의 주교, 로마 교회의 대서시관으로 승품했고, 불과 23세 때인 1440년에는 산타 마리아 누오바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
1451년에 니콜라오 5세는 그를 산 마르코 대성당 명의성당의 주임사제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니콜라오 5세와 갈리스토 3세 아래에서는 영향력이 있었으나, 비오 2세 아래에서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비오 2세의 사망에 따른 콘클라베 첫 투표에서 예기치 않게 그가 선출되었다.
비오의 독선적인 통치방식에 불만을 느낀 추기경단은 교황 선출자의 양후 행동과 교황과 추기경단의 관계를 규정하고, 3년 내에 세계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18개 조항에 서명했으나, 바오로는 선출되자마자 그 규정을 단지 지침으로만 받아들이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추기경단에게 규정을 수정하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추기경단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톨파 인근에서 발견된 대규모 명반 광산을 사용하여 그 전비를 조달한다는 조항은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는 즉시 자금을 모아,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헝가리알바니아를 지원했다. 이탈리아의 평화를 유지시키고자 그는 1469년에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사망으로 불안정해진 북부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군사작전을 지휘할 최상의 적임자인 보헤미아 왕 포데프라드의 지르지가 후스파라는 이단 혐의를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바오로는 즉위했을 때 평화적으로 이 사건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1466년 12월 교황은 왕을 파문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심지어 그와 대적할 십자군을 요청했다.
레반트에서 베네치아의 전조기지인 그리스의 네그로폰테 섬이 1470년에 메메트 2세에게 넘어가자, 바오로는 그에 맞서기 위한 십자군 소집을 발표했고 이탈리아의 군주들을 로마로 소집해 회의를 열었으나, 1470년 12월 22일에 방어 동맹을 체결한 것 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그의 외교는 중동에서 더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란의 군주인 우준 하산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한 것이었다.
바오로는 준수한 외모에 허영심 많은 남자였다. 그는 장난 삼아 '포르포소 2세'라는 이름을 택하겠다고도 했다.[1] 그는 지적으로 뛰어나지 않았고 고대 로마 황제들처럼 과시를 좋아하고 운동경기와 오락으로 민중의 환심을 샀다. 그는 사육제를 장려했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의무적으로 돈을 내라고 압박했다.(...) 1470년 4월 19일에는 1475년을 기점으로 25년마다 성년을 개최한다는 교령을 발표했다.
웅장함과 허례허식을 좋아했던 그의 취향은 산 마르코 궁전(현 베네치아 궁전)에서 드러난다. 그는 추기경 시절인 1455년에 이 궁전을 건축하기 시작했고, 1466년부터는 주요 거처로 삼았다. 그는 주로 학자들이나 문인들이 일하던 교황의 약식 교서 작성 부서를 1466년에 폐지했다. 역사학자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가 이에 항의하자 그를 투옥하고 고문하여 인문주의자들의 증오를 샀다. 또 로마 학술원이 이교도의 예식과 사상을 설파하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와 공모한다는 혐의로 학술원을 탄압하고, 로마의 어린이들이 이교도의 시를 공부하는 것을 금지해 공분을 샀다.
그러나 문화와 인문주의에 적대적이기는커녕, 그는 학자들을 항상 자기 주변에 두며 고대 기념품을 복원했으며, 예술품을 열심히 수집했다. 그리고 로마에 최초로 인쇄소를 세웠다. 1469년부터 그는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로마의 법규들을 개정했다. 교황령 관리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을 꺼렸고, 1470년에는 성직록을 소유한 법인들에게 퀸데미아라는 납세주기 15년의 세금을 부과했다.
바오로는 부르주의 국본 조칙 아래 있는 프랑스 교회가 주장하는 '자유'를 억제하기 위해 루이 11세와 어렵고도 긴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 버렸다. 말년에 바오로는 러시아이반 3세와, 모레아의 전 군주이자 가톨릭 신자가 된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 사이에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로마와 러시아 교회의 화해를 계획했으나,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바티칸의 사서이자 전기작가인 플라티나는 그의 초상화를 검은색으로 칠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1] 포르모소는 '잘생긴'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