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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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대 비오 6세

'''제251대 비오 7세'''

제252대 레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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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비오 7세 (Pius VII)
'''본명'''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키아라몬티
(Barnaba Niccolò Maria Luigi Chiaramonti)
'''출생지'''
교황령 체세나
'''사망지'''
교황령 로마
'''생몰년도'''
1742년 8월 14일 ~ 1823년 8월 20일 (81세)
'''재위기간'''
1800년 3월 14일 ~ 1823년 8월 20일 (23년 164일)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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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


가톨릭의 제251대 교황. 재위 1800년 3월 14일 ~ 1823년 8월 20일(23년 5개월 6일). 교황 즉위와 선종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18세기 최후의 교황이자 19세기 최초의 교황이다.
전임 교황 비오 6세나폴레옹에게 협력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에 감금된 상태에서 교황의 권위가 극도로 실추된 상태였다. 그 판국에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1799년 12월 1일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비오 7세가 선출되었다.

2. 생애


비오 7세의 본명은 루이지 바르나바 키아라몬티(Luigi Barnaba Chiaramonti)이며, 1742년 태어났다. 16세에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고 비오 6세의 총애를 받아 1782년 티볼리 주교, 1785년 이솔라 주교를 역임하고 그 해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800년 3월 14일 교황으로 선출된 뒤 4달 만인 7월 3일 로마에 입성했으며, 시민들은 교황의 귀환을 환영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제위에 오르자 그 대관식에 초청되었고, 800년의 샤를마뉴와는 달리 나폴레옹이 본인 스스로 제관(帝冠)을 들어 써버렸기에 교황으로서 할수 있는 일은 강복 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나폴레옹은 14세기 프랑스 왕실이 제공한 아비뇽의 옛 교황령[1]에 거주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로마로 돌아왔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1년 7월 15일의 정교(政敎)조약[2]을 이탈리아에서도 시행하라며 교황을 압박했다. 특히 프랑스 전체를 관리하는 총대주교를 설정하고 그 임명권을 자기에게 위임할 것, 추기경단의 최소 1/3은 프랑스인으로 채울 것 등을 요구하였는데 교황은 이를 모조리 묵살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교황이 자기 요구를 몽땅 씹어버리자 분노한 나폴레옹은 군대를 파병, 1808년 2월 12일 로마를 점령하고, 9월 6일 교황 역시 억지로 성좌에서 끌려나와 감금당해야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황제 칙령으로 교황의 권한은 오로지 영적 영역에 한정된다고 선언했다. 그에 대해 교황은 1809년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칙령을 공표'''해 대응했다. 나폴레옹의 어그로를 있는 대로 끈 셈이 된 교황은 즉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809년 8월 17일 사보이 공국에 이송되어 감금생활을 강요받았다.
교황이 감금, 유폐된 상태에서 나폴레옹은 유력한 추기경들에게 파리로 이주하도록 강요하고, 1811년 6월 17일 파리에서 국가 공의회를 열어 자기 뜻대로 가톨릭 교회를 주무르려고 했다. 허나 나폴레옹이 소집한 공의회임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온 주교들은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뮌스터 주교가 교황의 석방을 제안, 공의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7월 11일 공의회를 휴회(休會)시키고, 결의안을 주도한 주교 3명을 체포해 구금했다. 이어 8월 5일에 다시 국가 공의회를 열었으나 이번에도 주교들은 황제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0월에 다시 공의회를 해산시켜야 했다.
공의회를 통한 교회 통제가 뜻대로 안 되자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코앞에 둔[3] 1812년 6월 19일 교황을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로 이송해 더 엄격한 관리 하에 두었으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하면서 위기를 겪게 되자 교황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래서 1813년 1월 19일 나폴레옹이 교황을 예방하였고, 신(新) 정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이 때 교황은 오랜 유폐생활로 심신이 쇠약해져서 그런지 나폴레옹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였는데, 보수파 추기경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교황도 잘못을 인정하고 나폴레옹에게 재협상을 요구했다. 정치, 군사적으로 점차 수세에 몰리던 나폴레옹은 교황의 지지라도 얻고자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여 1813년 3월 24일 재협상을 시작했고, 1814년 1월 교황을 사보이로 보냈으며, 그 해 3월 10일 교황은 드디어 약 5년 동안의 유폐에서 풀려나 석방되어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교황은 저항 정신의 화신이 되었다. 비오 7세 본인이 겪은 고초에 대해 유럽의 군주들은 동정적이었고, 그 덕에 비오 7세는 빈 회의에서 생각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빈 회의를 통해 구체제의 복귀를 열강이 결정했기에 비오 7세도 나폴레옹이 없애버린 교황령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15년 6월 9일 교회 국가가 다시 세워졌고, 교황은 1773년 열강의 압력으로 해산시켰던 예수회도 다시 조직할 수 있었다. 다만 중세 이래 세속 군주와 팽팽히 대립했던 주교 서임권은 이 무렵 완전히 잃어버렸다. 수도회 출신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었던 비오 7세는 종전 후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가 로마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고, 나폴레옹이 임종을 앞둔 때에는 절해고도에 고해 사제를 파견하여 나폴레옹의 마지막을 지켜주도록 함으로써, 원수를 은혜로 갚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의 파멸과 구 체제의 부활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해체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독일권에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 '오래된 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 각국과 정교 협약을 체결하였다. 교황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석이 되어버린 주교들을 다시 임명했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재건하는데에 힘썼다.
교황은 전쟁으로 훼손된 로마 시가지의 재건축, 고대 로마 유적의 발굴과 복원작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세계 선교사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이에 따라 1822년 로마에 신앙의 전파를 담당하는 새로운 성(省)이 설립되었고, 1823년 교황청의 공식관청으로 인준되었다. 바티칸 미술관 내의 키아라몬티 미술관이 개관한 것도 비오 7세의 재위기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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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7세의 무덤, 베르텔 토르발센, 1823~1831년, 성 베드로 대성당
1823년 8월 20일, 81살을 일기로 선종했으며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당시에는 프랑스에 합병된 상태였다.[2] 프랑스 내 교구는 60개로 제한하고, 교구를 관리하는 주교들의 서임권은 나폴레옹이 가지며, 정부에 충성서약을 해야 한다. 교황의 칙령, 공의회 결정사항, 지역 시노드의 결의는 정부의 사후승인이 있어야 효력이 생긴다, 등등.[3] 러시아 침공은 1812년 6월 24일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러시아 지배에 놓인 폴란드를 공격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