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대형
일반대형과 사선대형 차이 (빨간색이 정예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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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좀 과장되이 표현하자면 서구권 전술 역사의 시발점과 같은 전술. 사선 대형은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 바르카를 거쳐 망치와 모루 전술로 이어졌다. 망치와 모루는 현대전에서도 아직까지 유효한 개념이며, 사선대형은 가히 전쟁에서 전술의 중요도와 개념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사선 대형 이후로 인류는 개인의 강함보다 전술이 전쟁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전술을 처음 써먹어 격파한 상대가 전사 한 명 한 명의 강함을 극까지 갈고닦는 스파르타라는 점에서 더욱 상징성을 가진다.[1]
사실 그 개념 자체는 매우 단순한데, 선택과 집중이다. 사선대형은 대각선 형태로 병력을 배치하는 진법으로서,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상대로 처음 써먹은 진형이다. 팔랑크스 진형에서 병사들은 각자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 창을 든다. 이 때 노출된 우반신은 자기 오른쪽에 선 병사의 방패 뒤에 밀착시켜 방호한다. 대열 속에서 가능한 오른쪽으로 밀착하려는 이러한 개별 병사들의 방어 본능 때문에 전투 중에 팔랑크스 진형은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은 진형을 이룬 양 측이 격돌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양 진형은 함께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따라서 양 쪽 모두 중앙이나 좌익에 비해 상대적으로 돌출되는 우익에 강한 정예 병력을 배치하게 마련이었고, 아군 좌익이 얼마나 적 우익을 잘 묶어두며 버티는지가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는 역발상으로 좌익에 주력을 배치하였다. 종심 50열의, 적 우익에 배치된 정예병력의 4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중앙과 우익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배치하면서, 그 대신 좌익이 적을 완전히 분쇄할 때까지 최대한 교전을 늦추기 위해 사선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이 때 적이 취약한 아군 좌익의 측면으로 우회하지 못하도록 신성부대가 좌익의 노출된 왼쪽을 지켰다. 그 결과 주력인 좌익이 적의 우익을 분쇄할 때쯤 시간차를 두고 적 좌익과 아군 우익이 조우하게 되고, 적의 정면을 우익이 압박하는 동안 좌익은 그 측면을 유린해서 적의 남은 대형을 무너뜨린다. 이것이 사선대형의 기초다.
이후로 응용된 사선대형은 상기 에파미논다스의 사선대형처럼 극단적이지는 않고 중앙과 우익에도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한 정도의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소한 적의 공격을 견디며 공격을 맡은 축이 적을 분쇄할 시간은 벌어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실전 사례
상기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 왕 클레옴보로토스를 상대로 벌인 레욱트라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여 그 효용성을 증명했다. 테베군 6천 명은 스파르타군 1만 명을 맞아 레욱트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에파미논다스는 일반적인 병력 배치를 포기하고 종심 50열에 달하는 병력을 적 주력을 맞을 좌익에 배치, 중앙과 우익에는 적은 병력만을 배치했다. 그리고 적을 맞아 적과 서로 마주보며 이동할 때에 중앙과 우익은 의도적으로 좌익보다 행군 속도를 늦추었다. 사선대형은 그렇게 완성됐다.
이 전투로 클레옴보로토스는 치명상을 입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이 한 번의 전투로 중장보병대에서만 500명이 사망했다. 큰 희생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중장보병대에서만 나온 수치로, 스파르타 중장보병대의 25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2] 주력인 중장보병대에서 저만한 희생이 나온 뒤로 스파르타는 다시는 그리스의 패권을 노리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응용되어 많이들 써먹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사선대형의 응용판을 써먹었다. 좌익과 중앙을 구성한 중장보병대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버티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섰고 우익의 기병대가 빠르게 전진하여 사선대형을 구축하고 페르시아 기병대가 빠져나가 비어버린 틈을 파고들어 적의 중앙을 공략, 다리우스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적을 분쇄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7년 로스바흐와 로이텐 전투에서 썼는데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취약한 한 축은 서서히 물러나고 공격력을 강화한 한 축이 적을 분쇄하는 식이었다.
나폴레옹은 사선대형을 아예 전술이 아니라 전략의 범위까지 키워버렸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한 개의 프랑스 군단이 프로이센 주력 군단을 묶어둔 사이 공격을 맡은 군단이 예나의 프로이센군을 휩쓸었다.
3. 창작물에서의 등장
창세기전 시리즈의 흑태자가 비슷한 전술을 사용한다. 게임상에서 사선대형이라고 명명된 전술인데 마법사와 기병대 등 공격력과 기동력이 강한 좌익이 적을 밀어붙이고 오크나 중보병대 등 방어력이 강한 우익이 적의 공격을 견디면서 서서히 물러섬으로써 실버애로우를 격파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알렉산더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써먹은 전술을 종족과 구성만 살짝 바꾸어 비튼 느낌이다. 단 '흑태자가 실버애로우를 깨부순 전술이 사선대형이다'고 언급만 될 뿐 실제 게임상에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은하영웅전설에서는 키포이저 성역 회전 당시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 상급대장이 빌헬름 폰 리텐하임 후작을 상대로 써먹었다. 코르넬리우스 루츠 함대와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함대로 사선대형을 짠 뒤 리텐하임 후작 함대로 전진시켜 리텐하임 후작이 루츠 함대와 교전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소수의 고속순항함으로 리텐하임 후작 함대의 중앙을 돌파하여 내부를 휘저어놓고 바렌 함대와 루츠 함대가 공격을 퍼부어 리텐하임 후작을 패퇴시켰다.
나무 위키에 일본 라노벨에 나온 어이없는 포위섬멸진문서에서 포위섬멸진이랑 비교된 한국 양판소 전투#[3] 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나온 전술이 사선진이다.
이세계 건국기에서 주인공이 선택한 전술이 왼쪽에 주력을 넣은 사선대형이다. 실제 상대한 적도 스파르타와 유사한 상대인지라 테베와 스파르타 전투를 모델로 삼은듯 하지만 실제 전술은 사선진에 더해 질이 좋은 기병을 이용해 후방을 노린 알랙산더 대왕 시절에 완성되기 시작한 전술에 더 가깝다.
4. 관련 문서
[1] 어디까지나 덜 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영향이 없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이 사선 대형이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정예병인 신성 부대의 힘이 컸다. 전술만 믿고 무슨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아서 스파르타의 정예병들을 때려잡은 게 아니다.[2] 스파르타 특유의 엄격한 신분제가 문제였다. 중장보병은 오로지 시민만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시민이 되려면 부모 모두가 시민으로 인정받는 혈통이어야 했다. 어느 한 쪽이 외국인이나 노예라면 절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스파르타 말기까지 가면 시민의 숫자가 천 단위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500명 사망한 것 만으로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25%가 상실된 것이다.[3] 링크에 들어가기 귀찮은 위키러들을 위해 적자면 작중 내 나온 전투 내용을 요약하면 정복당해버린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부흥군이 진압군과 전투를 하는데 '''수는 많지만 대다수가 징집병인 부흥군VS수는 모자라지만 정규 병사인 진압군'''구도다.결과는 한쪽 날개가 사라져서 포위되어 결판이 나는 내용이다.싸우기전 부흥군 쪽에서 진형을 편성하는데 징집병들이라 편성이 늦어졌고 이로인해 진압군쪽 지휘관이 '''의도를 눈치까게 돼서''' 전투 내내 부흥군 쪽이 수싸움에서 밀리게 된다.이때문에 '''좌익 쪽 징집병들이 먼저 모랄빵 나서 도주'''하게 되고 좌익이 비게 되자 진압군들이 남은 부흥군의 중앙과 우익을 공격하여 이긴 것.쉽게 말해 모랄빵+사선진으로 다수 쪽이 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