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 12도
1. 개요
사학 12도(私學十二徒), 십이공도(十二公徒)는 고려시대의 사학으로 고려 문종 시기부터 공양왕 재위기인 1391년 6월까지 존속했다.
2. 특징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는 국학(국자감, 성균관, 학당[1] , 향교)의 학생이 아니더라도 응시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과거 제도의 관례로 좌주(座主, 스승이자 시험관)와 문생(文生, 학생이자 과거 응시자)의 관계가 밀접했던 점은 사학의 유지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문벌귀족들은 사학을 적극 이용해 스승인 시험관이 뽑아주는 것으로 중앙 관직에 나아갔으며 그들 자신이 또 시험관이 돼 다른 문벌귀족들을 중앙으로 진출시켰다. 합격자들은 부모가 살아있더라도 반드시 좌주를 먼저 찾아뵙는 것이 예법이었으며 사학은 청탁이 오가거나[2] 당파를 이루게 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고려 중기 국학의 필요에 의문을 가지며 국고의 낭비만 가져오는 국자감을 폐지하자는 재상 소태보의 상소로 국학과 사학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숙종같이 왕권 강화에 힘쓴 왕들은 국학을 적극 밀어줬으며 이후 무신정권의 득세로 주춤했지만 고려 후기에도 사학과 연관된 관례는 마찬가지로 유지됐다. 공민왕 시기 진사 이색은 국학의 생도가 아니면 과거 응시 기회를 주지 말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3] 이색은 성인을 만들기 위한 유학이 벼슬하기 위한 학문으로 변질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12도를 나온 학생들 모두 다시 성균관을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교육 제도를 바꿀 것을 건의했다.[4]
성리학 이념과 맞지 않다고 여겨진 사학은 신진 사대부들이 권력을 잡은 뒤 전면 폐지된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원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교육사에서는 사학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인다.
3. 목록
대부분 사학이 창립자의 시호에서 유래한 이름이 붙었으며, 그 외 남산(南山), 서원(西園), 구산(龜山) 등은 사학이 위치한 개경 인근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