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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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출입구인 내성 1관문.
西生浦倭城
1. 개요
2. 상세
3. 구조
4. 교통
5. 여담
6. 바깥고리
7.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8. 관련 문서


1. 개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하였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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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왜군은 속전속결로 한반도를 제압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장기전에 대비해 일본 본토와 바로 이어지는 한반도 남동해안에 많은 성을 지었다. 서생포 왜성도 그중 하나로 회야강 하구와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수군의 서생포만호진성[1]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발발 직후 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일본에서도 축성의 명수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가 1593년 세웠고 구로다 나가마사도 이 성에 주둔했다. 축성 과정에서 인근의 조선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서생포 만호진성이 헐려 그 석재가 이용되었다.
한반도의 왜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한반도의 다른 여러 왜성들[2]과 달리 비교적 원형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편이며[3] 대도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에서 가까워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왜성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오히려 일본 본토에 있는 성들보다도 16세기 센코쿠 시대 양식의 일본 성곽을 잘 보존해 가치가 높은데, 특히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의 존재로 일본 학계에서도 꽤 주목한다. 보급로 보호를 위해 산허리를 따라 지은 장벽인 노보리이시가키는 오늘날 일본에도 마쓰야마 성 등 소수의 성에만 남아 있는 희귀한 성곽 유적이다.
에도 막부 수립 이후 일본의 수많은 성들이 군사용 시설에서 다이묘의 거주용 시설로 변모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별 쓸모가 없던 노보리이시가키를 우수수 철거했다. 게다가 막부 정권의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신 정부의 '폐성령' 선포 및 태평양 전쟁도 수많은 일본 성들의 훼철 · 파괴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따라서 군사용 시설로서 센코쿠 시대의 노보리이시가키는 그 희소성이 매우 큰데, 이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서생포 왜성. 보존 상태 및 규모에 있어서도 일본의 노보리이시가키보다 훨씬 나은지라 일본 학자들과 일반 여행객들도 서생포 왜성을 종종 방문하며, 그 수가 꽤 많은 듯. 이들을 위한 일본어 가능 해설사도 현지에 상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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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의 노보리이시가키(일본식 석벽)이다.
왜란이 끝난 뒤 원래의 서생포 수군만호진은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로 승격되었으나, 본래의 만호진성은 폐성이 되었고 왜성의 성벽이 견고하다해서 이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구한 말까지 조선 수군의 대진(大鎭)으로 사용되었지만, 군략적으로 왜성은 조선군 성채와 많이 달라서 상당수 조선군에 맞게 이곳저곳 개조도 했다. 울산서생진지도(1872년작)#를 보면 내성은 비어 있고, 외성에 관청이 있으며 인근에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수있다.
성 안에는 중간 지점에 선조 32년(1599년)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애국지사 위패를 모셨던 창표당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헐려 터만 남았다가, 2018년 8월에 복원 완료하였다.
울산 왜성 ~ 서생포 왜성 ~ 죽성리 왜성 ~ 부산진성 간에 봉화를 이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하여 봉화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지명ㆍ유적들 '''봉화'''산 / 하산 봉수대[4], '''봉화'''산 / 나사 봉수대[5], '''봉대'''산 / 기장 아이 봉수대[6] '''봉대'''산 / 기장 남산 봉수대[7], 간비오산 봉수대[8], 황령산 봉수대[9], 구봉산 봉수대[10]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동남해안에는 익히 알다시피 봉수대 / 왜성이 매우 촘촘히 박혀있다.
일제강점기사적 제54호로 지정되었고 해방 후에도 유지되었지만, 우리 문화재도 아닌 일본이 남긴 왜성을 보존할 가치가 있겠느냐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1997년 사적에서 해지되어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등록되었다. 말하자면 강등.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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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화질 : https://blog.naver.com/yk020428/222245778002
연곽식 평산성이며, 마스가타와 우마다시가 공존하는 성이다. 크게 출성(데지로)과 외성, 내성으로 나뉘며, 내성과 외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각각 3곳씩 있다. 16세기에 회야강은 왜성 북측 체성과 딱 붙어 있었기에, 동문 바깥에 바로 선착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교통


서생포왜성앞 정류장에서 약 500m, 진하 정류장에서 약 800m 거리에 있다. 경사가 좀 있기 때문에 체감 거리는 그 이상.
진하해수욕장에서 도보로 좀 많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으며[11] 동해선 남창역이나 간절곶도 가깝다.

5. 여담


  • 승장 유정(惟政)과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세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 곳이다.
  •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울산에 오면 대부분 들르는 편이며, 인근 학교에서도 자주 찾는다. 특히 역사 매니아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 아예 부산부터 울산 ~ 경주시까지 해안선을 타고 올라가는 루트가 있다.
  • 내성에 올라가면 동해로 시야가 확 트여 있어 왜 왜군이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해맞이 장소로도 알맞다. 또한 낮은 가지를 가진 큰 벚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벚꽃놀이하러 많이 온다.

6. 바깥고리



7.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리에 있는 이 성은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돌로 쌓은 왜성이다. 기장죽도성과 부산진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서로 연락하였다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정상에 본성을 두고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2∼3겹으로 높이 6m의 성벽을 계단식으로 다시 쌓아 성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것은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안에는 중간지점에 선조 32년(1599)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애국지사 위패를 모셨던 창표당 터가 남아 있으며, 본성 맨 서쪽에는 장군수라는 우물터가, 외성 남쪽에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가 있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8. 관련 문서




[1] 위치는 왜성의 북쪽 1km 회야강과 바로 만나는 서생 삼거리 옆 산기슭이다. 삼거리에서 진하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표지판이 있다.[2] 왜성은 우리 문화재도 아니라는 인식이 커서, 보존하자는 인식 자체가 최근까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왜성은 군략적으로도 별 가치가 없었기에, 많이 헐어서 재활용했다. 임직왜란 직후는 수군을 위한 진성을 축조할 여력이 되지 않아 몇몇 왜성은 진성으로, 서생포왜성은 서생포진성에 편입되는 식으로 활용되었다. [3] 당연히 천수각을 비롯한 건물들은 없다. 전국시대를 거쳤던 일본에게 성구조는 군사기밀에 해당하기에, 함락되거나 철수할때 많이 파괴하는 편이다. 원형 그대로의 천수각은 일본 전국에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실정. 그 밖에 잔해 일부만 남았으나 순천왜성이 그럭저럭 잘 보존된 편이다.[4]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 산 66[5] 울산 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산 36[6]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산51-1. 고리원전 바로 뒤에 있다. 도로의 안내 표지판에 봉수대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고리 원전을 방어하는 군 부대가 있어 들어갈 수 없다.[7]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52[8] 부산 해운대구 우동 산146-76[9]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 50-1[10] 부산 서구 동대신동3가 산1-2[11] 해변 최단거리 기준 1.1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