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조선)

 


[image]
'''유정
惟政
'''
'''출생'''
1544년 10월 17일
조선 경상도 밀양도호부
'''사망'''
1610년 10월 12일
조선 경상도 합천 해인사
'''본관'''
풍천 임씨
'''속성과 속명'''
임응규(任應奎)
'''자'''
이환(離幻)
'''호'''
송운(松雲), 종봉(鍾峯)
'''당호'''
사명당(泗溟堂)
'''사시(私諡)'''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1. 개요
2. 생애
2.1. 의병 활동
2.2. 전후의 외교 활동 및 말년
2.3. 야사
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4. 관련 문서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올이라도 탐하지 마라.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종이와 부채를 건네며 유정에게 글을 요구하자 써 준 글귀 중[1]


1. 개요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장(僧將).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존경하는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지칭할 때가 많다. 승려의 몸으로 국난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민족 의식을 발현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KBS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에서는 임진왜란 관련 주제를 다루던 편에서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劉綎)의 초상으로 사명당의 초상이 나온 적이 있었다. 제작진이 사명당의 법명인 유정(惟政)과 헷갈린 듯.

2. 생애


그대 보지 못했던가?

세거리 마을에 형 형 하면서 절하고

떠들썩한 저자에 아버지 아버지 하며 아는 것을.

또 보지 못했던가?

주리면 밥 생각 목마르면 물 생각하여

앉으나 누우나 움직이나 고요하나 항시 따르는 것을.

고래가 성내어 바닷물 모두 마셔버리면

밝은 달에 산호가지는 훤히 드러난다네.

종문[2]

의 옛 곡조 어떻게 부를 건가 생각컨데

돌 조각상 한밤중 옥피리를 불리라.[3]

송원의 가장 큰 어르신인 노승에게 준 글귀

중종 39년(1544) 경상도 밀양부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명종 11년(1566) 13세 나이로 황여헌(黃汝獻)에게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명종 16년(1561) 선과(禪科)에 급제했는데 조선 시대의 승과라는 점에서 특이할만한 일이다.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잠깐 불교가 부흥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문정왕후 시기 승과로 휴정과 유정 등 임진왜란 시기 승병을 이끈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했으므로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승과 합격자들의 이후 활약만 봐도 문정왕후의 호불 정책은 적어도 본전은 건지고도 남았다. 사명당은 당시의 학자이자 시인들이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 하곡(荷谷) 허봉(許篈), 백호(白湖) 임제(林悌) 등과 교제했다.
선조 8년(1575) 32세 나이로 선종(禪宗)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서 가르침받아 각성했다. 이 일화에 설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져 사명대사가 자기 재주를 과시하다가 서산대사와 도술 대결을 벌인 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야사가 나왔다. 이후 유정은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유람했다. 선조 19년(1586)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로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했다. 선조 22년(1589)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모에 죄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2.1. 의병 활동


10월에 상남(湘南)[4]

으로 의병이 건너가니

나팔소리, 깃발(旗) 그림자. 강 옆 성에 흩날린다.

칼집 속 보검은 한밤중에 울부짖나니

원컨대 요사(妖邪)를 베어 성명[5]

에 보답코자….

의승병을 이끌고 평안도 순안으로 가던 유정대사가 읊은 시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순안에 가서 휴정의 휘하에 활약했다. 휴정이 늙어서 물러나자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문답이 희대의 명언으로 남았다. 자신의 진으로 몸소 찾아온 유정에게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오?"''' 하고 묻자, 사명당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이오."''' 하고 답했다. 가토가 의아하게 여겨 그 보배가 무엇인지 묻자, 사명당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오."''' 하고 답했다. 조선에게 최악의 적장[6]인 가토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받고 부유하게 살 수 있음을 뜻하는 것. 이 대답을 듣고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명언은 일본에도 널리 퍼져 유정이 포로석방을 타진하고자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다고. 당시 일본에서도 이 문답이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을 하기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하기 힘들다. 유정의 대범함이 잘 드러나는 말.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되돌리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架善大夫)[7]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8]에 올랐다.

2.2. 전후의 외교 활동 및 말년


有約江湖晩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었지만)

紅塵已十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白鷗如有意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듯)

故故近樓前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일본 교토의 고쇼지(興聖寺)가 소장하고 있는 한시 유묵. 선조 38년(1605)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에게 남긴 것으로, 2018년 BTN불교TV가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촬영 중에 존재를 확인하여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 전시.

1604년(선조 37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직위와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
그 뒤 휴정이 입적한 이듬해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광해군이 국토 서쪽을 지키게 했으나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입적했다. 사명당에게 약을 지어 보내는 등 병세를 걱정하던 광해군은 입적 소식을 매우 슬퍼했다고 하니, 조선시대 숭유억불이 일상인 가운데 왕에게 이렇게까지 대우받았던 승려도 없었다.실록의 기사 입적 후 다비한 사리는 합천 해인사 인근의 홍제암 부도에 안치했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9]가 있다. 이 비석은 한국 불교사에서 큰 의의가 있으니, '''무려 2백 년 만에 세워진 고승비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신라, 고려 때는 활발히 제작되다가 숭유억불을 채택한 조선 시대 들어서는 건국 직후인 태조 연간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세기, 16세기 200여 년 동안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하였다. 이 홍제존자비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고승비가 세워져 19세기까지 고승비 170여 개가 세워졌다.
인터넷상에 흔히 선조 또는 광해군이 유정에게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허균이 홍제존자비의 비문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올린 사시(私諡)이다.# 유정이 입적하자 광해군이 안타까워하며 장례에 쓸 물품을 적당히 지원해주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광해군이나 이후의 조선 임금이 법호나 시호를 내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법명 '유정'으로만 기록했다.
저서로는 문집 《사명당대사집》7권, 《분충서난록》이 있다.

2.3. 야사


유정이 승려로 활동하게 된 사연을 두고 희한한 야사가 하나 있다.
그가 진사로 있었을 때 아들 하나를 낳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후처와 후처가 낳은 아들을 맞아들였을 때 후처는 전처에 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할 것 같아서 임 진사 아들이 장가를 갈 때 종을 불러서 그 아들을 살해했다. 그 바람에 같이 자던 며느리는 신랑을 살해했다는 살해 누명을 받게 되었으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집에서 묵을 때 그 종이 후처의 명령으로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 임 진사 집으로 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임 진사는 종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을 죽인 증거를 찾아낸 다음 후처와 후처 소생들을 다 곳간에 가두어서 불태워 죽인 다음에 재산의 일부는 며느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 사용한 뒤 인생 무상을 느껴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이야기에 따라 며느리가 자결하거나, 며느리가 자결하려고 할 때 사명 대사가 설득해서 며느리를 잘 돌려보냈다는 버전이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사명당이 승려가 된 건 13세 때니 이건 그냥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외교 활동 때의 야사가 제법 많고 판본도 다양하다. 실질적으로 사명 대사 이야기하면 이 외교 이야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사명당이 일본에 사절단으로 입국할 시 일본에서 높은 지위의 우두머리가 "영험하다던데 어디 시험 좀 해볼까?"라는 생각에서 항구에서 궁궐로 오는 길에 1만여 자가 넘는 글씨가 빼곡히 쓰인 병풍을 쭉 세워 놓고 사명당을 가마를 태운 다음 그 병풍 옆을 겁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궁궐에 오자 일본 최고위 인사는 "사명당께서 오셨구려 어디 오시는 길에 병풍이 있던데 보았소? 하긴 뭐 빠르니 보지도 못 했겠지요."라고 비아냥 거리자 사명당은 "아 그거?" 하면서 병풍 속 글의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 포함 모든 글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밤새도록 좔좔 읊더니 심지어 틀린 오타 하나까지도 완벽히 짚어내어 일본인들을 데꿀멍시켰다. 판본에 따라서는 줄줄 외우다가 딱 한 폭만 말하지 못하자 왜왕이 사명당을 의심했는데 그의 대답은 "보지 못한 것을 어찌 외우겠는가?"였고, 사람을 보내 병풍의 상태를 살핀 결과 사명당이 외우지 못한 그 한 폭만 바람 때문에 접혀서 가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열받은 일본인들이 ㅂㄷㅂㄷ을 시전하면서 애써 참는 척 "오셨으니 대사 목욕이나 하셔야죠?" 하면서 독사들이 드글드글한 욕탕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사명당이 태연하게 쥐고 있던 염주를 탕 안에 던져 넣었더니 독사들이 다 도망가서 편안하게 목욕하고 나와 일본인들을 더 열폭하게 만들었다. 뱀이 온열탕에서 무사히 있을 리가 없단 점을 고려해 욕탕의 밑바닥에 독사를 넣고 두꺼운 유리판을 덮어놓아 욕탕에 독사가 들어 있는 것처럼 꾸며 사명당의 담력을 시험하려 했으나 쥐고 있던 염주를 욕탕에 던져 유리판이 덮인 것을 알아챘다고 하는 버전도 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숙소를 마련해주고 사명당을 태워죽이려고 그 숙소 안에 불을 잔뜩 지폈다.[10][11] 그러자 사명당은 "이놈들이 역시나..." 하면서 얼음 빙(氷)자와 겨울 동(冬)자를 쓴 부적을 천장, 벽에다 붙여놓고 명상에 잠겼다. 다음날 일본인들이 "이쯤 되면 지도 못 견디고 죽었겠지." 란 희망을 가지고 "대사 계시오?" 하고 문을 열어봤더니 사명당이 붙여놓은 "차가움"을 의미하는 글귀의 부적의 효과로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사명당은 "어 춥다. 너희 왜놈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이 자는데 불도 안 지피느냐?"라고 했다'''.[12] 일본엔 온돌이 없어서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걸 고려해서 특별히 무쇠로 만든 방을 준비했다는 판본도 있다.[13]
그러자 이번엔 얼려죽이려고 방 주위에 얼음으로 둘러싸고 소금을 뿌려서 아주 차갑게 했더니 거꾸로 '''방 안은 찜질방 안이 돼있고 사명당은 "어 덥다. 너희들은 냉방도 안 하느냐?" 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일본인들이 "아이고~ 대사님! 저희가 위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하며 굽신굽신했다고 한다.
이것도 다른 판본에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명당을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마 위에 앉히려 하자 사명당이 결국 폭발하여 팔만대장경을 외우자 일본 전역에 태풍이 불어 대홍수가 나버리고,[14] 도쿠가와가 그제서야 잘못을 빌자 일본인의 대를 끊기 위해 매년 일본인 여자 아이의 가죽 300장과 일본인 남자 아이의 불알을 석 섬 서 말씩 조공으로 바치라 해서 결국 도쿠가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간신히 모면했다고도 전한다.[15] 이후 귀국한 사명당은 금부도사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16]
상당수 내용이 임진록과 겹치고 거슬러 올라가면 최고운전의 흔적까지 보인다. 소설을 바탕으로 야사를 지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 심지어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생겨난 야사도 있다.
사명당이 절에 거주할 때, 왜군이 쳐들어와서는 행패를 부리는데, 장수와 필담을 나눴던 일화가 있다. 장수가 '''"죽고 싶지 않거든 이 절의 보배를 가져오라."'''라고 했으나, 사명당이 '''"절에서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배를 채우는 승려들에게 무슨 보물이 있겠는가?"''' 한 후, '''"그대도 학식과 견해가 있을진대, 장수된 이로서 이쯤하고 물러가라."''' 하고 필담을 끝낸 후, 탄복한 장수가 절 앞 귀퉁이에 "이 절에는 고승이 계시니, 왜군은 굳이 올라가 절을 뒤지지 말 것."이라 적어 그 절은 안전했다고 한다.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도술 내기를 한 이야기가 있다. 사명당이 서산대사가 머무는 암자로 올라가며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있었는데 어린 상좌 한 명이 내려오며 '스승님께서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며 올라오는 분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 때 사명당은 소매 속에 새를 한 마리 숨겨가서 서산 대사에게 '이 새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라고 묻자 서산 대사는 '그야 당신 마음에 달린 것이지요.'라고 대답한 후 돌계단 중간에 서서 '내가 내려갈까요, 도로 올라갈까요?'라고 반문했다. 사명 대사는 한참 생각한 후 '손님을 맞으러 오셨으니 응당 저를 맞이하려 내려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서산 대사는 그 말대로 내려와 사명당을 맞아들였다.
이후 사명당은 계란 백 개를 쌓았올렸는데, 서산 대사는 계란 백 개를 허공에서 거꾸로 쌓아내렸다. 사명당은 바늘 백 쌈을 가져오게 하더니 그것을 국수로 변하게 했다. 그러자 서산 대사는 그 국수를 먹더니 입에서 바늘 백 쌈을 뱉어냈다. 사명당이 손을 들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산 대사가 손을 들자 떨어지던 비가 모두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날이 개었다. 이에 사명당은 서산 대사의 도술에 감탄하고 서산 대사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이 도술 이야기는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갔을 때 나눈 선문답에 살이 붙은 듯하다. 원래 내용은 서산대사 항목 참조.
이 외에도 서산대사에게 강의받던 시절에 그에게 불손하게 굴다 역관광당하고 감복하는 내용의 일화도 있다.
이런 야사들의 공통점으로, 기본적으로 성격이 괄괄하게 묘사된다. 와전되고 변질되는 과정에서도 인물상 자체가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
한편 밀양시에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가 있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하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3.1. 게임 임진록 2


게임 임진록에서는 지팡이에서 나오는 번개로 공격하는 장수로 낙뢰술과 기우제를 쓸 수 있다. 기우제와 지진술을 쓸 수 있는 사이쇼 조타이와 쌍벽을 이루는 스님 장수. 조반에 와서는 미션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못했다. 등장했던 미션이 전혀 없는건 아닌데 워낙 적었다. 정확히는 메인 브리핑에 나오지 못한 탓이다.
거상에서는 레벨 90이 되면 자신의 스승인 휴정으로 전직한다. 제자와 달리 휴정의 뇌격진은 엄청난 범위 + 엄청난 데미지로 등장과 동시에 조선 대미지 딜러 역할을 바로 가져왔다.
사람들이 잘 눈치를 채지 못하는 부분인데, 소환시 대사가 "사명 '''대사''' 대령했습니다."이다.

3.2. 만화 아스피린(만화)


김은정(만화가)만화 아스피린에서는 단군이 다스리는 조선의 수석 마법사이자 왕의 조언자로 등장한다. 사실상 실존했던 사명 대사에게서 이름만 빌려온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이다.[17]
단군, 사방신 등과 함께 이 만화의 흑막을 이루는 인물. 수석 마법사답게 강력한 마력을 지녔고 단군처럼 성격은 대체로 능글맞고 교활한 성격. 단군처럼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아직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다. 전 수석 마법사는 사명당과 단군의 짜짜꿍에 의해 숙청당했다.
작중 내내 단군의 곁에 붙어다니며 그와 함께 정국을 논하거나 무엇인가 음모를 짜는 듯하다.

4. 관련 문서



[1] 1594년 왜군이 서생포(울산), 거제도, 창원 등에 성을 쌓으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유정이 권율 도원수의 지시에 따라서 서생포(울산)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가서 네 차례 회담을 하였다.[2] 선종[3] "종문(선종)의 옛 곡조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서 노승이 사명당에게 선종의 가르침을 물어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매우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이는 일종의 선문답이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해석하자면 고래가 바닷물을 다 마실 리도 없고 돌 조각상이 옥피리를 불 리도 없으니,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 또한 그렇게 신비하게 숨겨져 있고, 또한 밝게 빛나며 아름다운 노래로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4] 평안남도(平安南道) 중화군(中和郡). 평양(平壤)에서 불과 40여 km 떨어진 곳.[5] 임금이 내린 명령[6] 가토는 한양을 점령한 뒤 왕릉을 파헤치고 경복궁을 불태웠으며 조선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다.[7] 종2품 하계의 계급 이름.[8] 중추부의 동지사 보직.[9] 홍제는 사명대사의 다른 별칭이다. 널리 구제한다는 뜻.[10] 임진록에서는 구리로 만든 방에다 넣고 밖에서 불을 피워 방을 달궜다고 한다.[11] 맹꽁이 서당에서는 숙소에 불을 지피라고 명령받은 부하가 '''''맹꽁이 서당처럼 말이죠?"''' 라고 개그를 친다.[12] 이 일화는 머털도사와 108요괴에서도 나온다. 내기 요괴가 머털이를 오래 못 버티게 하려고 장작을 마구 쑤셔넣어서 온돌방을 데웠는데 문을 열어 보니까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머털이가 "으. 춥다. 문 닫아라."라고 한다.[13] 이 야사에서 몹시 추운 것을 빗대는 '사명당의 사첫방'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사첫방'은 손님이 묵는 곳을 뜻하는 '사처'의 방이라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에 등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잘 안 쓰이는 속담이다.[14] 임진록에서는 용이 내려와 왜왕이 기대고 있던 누각을 신나게 흔들어댔다고 한다.[15] 하도 쇼킹한 스토리라서 아동용에서는 다시는 전쟁 못일으키게 철을 왕창 뜯어냈다고 바꾸었다. 왜왕이 "어떻게 그 많은 쇠를 마련하겠습니까?" 라고 변명하자 "전쟁 일으키려고 만든 무기 녹이면 되지 않나?" 라고 데꿀멍을 하게 만든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봐도 이런 요구는 말도 안 되는데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일본 아니더라고 그 어느 패전국이라도 차라리 죽을 각오로 다시 싸울지언정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리 조선이 일본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그 과정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사명대사가 인피를 공물로 요구하자 일본의 공주 하나가 "나부터 벗겨라"라고 저주하며 자진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이만큼 컸다는 반증이다.[16] 참고로 판본에 따라서는 바다 위에 구리 방석을 올려놔 그 위에 앉도록 했는데 사명당은 구리 방석을 가볍게 들어 바다에 내던지고 태연하게 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철로 지은 집에 가두고 불을 질렀는데도 무사했다는 얘기도 있다.[17] 뭐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