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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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정종의 9남이다. 어머니는 숙의 윤씨이다. 친형제로는 형 수도군과 임언군 및 남동생 장천군과 여동생 인천옹주가 있다. 생전에는 석보정이었으며, 석보군은 사후에 추증된 것이다. 전주이씨 석보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본성이 청렴검소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가’라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늘 산간에 은거하고 세상 일에 관여치 않았다.
그러나 사건사고는 꽤 일으켰던 듯하다. 1427년(세종 9년) 음행으로 원주로 귀양을 갔다.# 1436년(세종 18년)에는 세종에게 황해도 해주에 있는 온천에 목욕한다고 말하고서는, 하라는 목욕은 안하고 기생이 있는 춘천으로 가서 며칠간 머무르며 사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저 때 자신을 형 순평군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이 일은 문제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저 일이 벌어진 때가 자신의 아버지인 정종의 기일이었다.(...) 그리고 형을 사칭한 사칭죄도 저질렀으며, 무엇보다 왕을 속인 기군망상죄를 범한 것이었다.# 기군망상죄는 기본이 사형으로 다스리는 엄청난 중죄였다. 그럼에도 종친이라 하여 직첩을 회수당하고 외방으로 유배되는 것에 그쳤다. 사헌부에서는 왕을 속인 그를 대죄로 다스려야한다고 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444년(세종 26년)에 명선대부 석보정에 봉해졌다.# 이후 그와 관련한 기록은 없다.
3. 사후
묘는 처음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미아리에 있었다. 한동안 실전되어 위치를 모르다가 11대손 이우형이 찾아서 정비했다. 이후 석보군 묘역이 1.4 후퇴 때 내려온 실향민들의 주거지로 결정되자 1959년 2월에 현재의 자리인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로 옮겼다.#
1872년(고종 9년) 3월에 석보군(石保君)으로 추증되었고#,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4. 여담
- 석보군의 11대손 이우형이 석보군의 묘를 찾는 과정이 극적이다. 이우형이 석보군의 묘소를 찾아 여러 날을 헤매던 중, 우연히 미아리에서 “우리 석보골로 나무하러 가자”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었다. 아이들에게 무슨 뜻이냐며 물었고, “저 고개를 넘으면 울창한 숲이 있는데 거기에 묘가 있어 옛날부터 석보골이라고 불렀다”는 답을 들었다. 이에 이우형이 어린이들과 함께 석보골로 가보니 황폐해진 묘가 하나 있었다. 비석은 땅에 떨어져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석보정(石保正)’ 3글자가 분명하게 보였다고 한다.
5. 가족과 후손
대경공 김연지의 딸인 학성군부인 원주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다. 딸들은 각각 성숙, 송계장, 홍맹손, 손효장, 정윤서와 혼인했다.
장남은 연산부정이고 차남은 인양부정이며 3남은 곡성군이다. 곡성군은 숙부 임성군의 양자로 출계했다. 남은 아들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석보군파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