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군

 



'''조선 정종의 왕자'''
'''수도군
守道君'''

'''작호'''
수도정(守道正) → 수도군(守道君)
'''시호'''
희정(僖靖)
'''본관'''
전주(全州)
'''이름'''
덕생(德生)
''''''
회부(晦夫)
''''''
묵은(默隱)
'''부왕'''
조선 정종
'''생모'''
숙의 윤씨(淑儀尹氏)
'''부인'''
여성군부인 여산 송씨(礪山 宋氏)
'''자녀'''
3남 1녀
'''묘소'''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림2리
'''생몰
기간
'''
'''음력'''
1393년 2월 15일 ~ 1449년 7월 10일
'''양력'''
1393년 3월 27일 ~ 1449년 7월 29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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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정종의 7남이다. 어머니는 숙의 윤씨이다. 친형제로는 남동생 임언군, 석보군, 장천군, 그리고 여동생 인천옹주가 있다. 생전에는 수도정이었으며, 수도군은 사후에 추봉받은 것이다. 전주 이씨 수도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1430년(세종 12년)에 원윤(元尹)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세종이 종친들 교육을 위해 설립한 종학에 잘 안나간다는 이유로 종부시[1]에서 지적받았다.# 그리고 1433년(세종 15년)에는 병을 이유로 반열에 참예하지 않아 종부시의 탄핵을 받았다.# 1444년(세종 26년)에는 명선대부(明善大夫) 수도정(守道正)에 봉해졌다.#
1449년(세종 31년) 2월에는 박만(朴萬)과 원생(元生)이란 사람이 그의 집에서 불법으로 등을 도살한 일로 종부시의 탄핵을 받아#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지는 처음에 전라도 담양군으로 정해졌다가 다시 강진현으로 바뀌었다.# 유배지로 가던 중 그해 7월 10일에 용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는 원래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미아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잊혔다가 1806년(순조 6년)에 10대손 도정공 이정인(都正公 李廷仁)이 도평군종의군 후손들의 도움으로 발견했고#, 뒷날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림2리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묘역에 수도군을 모시는 사당인 묵은사(黙隱祠)가 있다.
1872년(고종 9년) 3월에 고종이 수도군(守道君)으로 추봉했고, 현록대부 영종정경(顯祿大夫 領宗正卿)으로 추증했다.##

4. 가족과 후손


여성군부인 여산 송씨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딸은 안동 김씨 현감 김선손과 혼인했다.
장남은 어산부정 이검(語山副正 李儉)이고 차남은 동림군 이엄(東林君 李儼)[A]이며, 3남은 풍산군 이외(豊山君 李偎)[A]이다. 증손 종남부수 이창수(終南副守 李昌壽)는 김굉필의 문인으로 조광조와 친교를 맺었으며 당시 학문이 뛰어나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수도군 후손에서는 문과 12명, 무과 8명의 급제자가 나왔으며,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전주 이씨 수도군파를 이루고 있다.
수도군의 7대손인 이민후(李敏厚)[2]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서5남 안창부정 이심(安昌副正 李諶)의 6대 종손으로 입적한 것을 시작으로, 수도군파의 후손들 중 양녕대군 후손의 양자로 들어간 경우가 더럿 있었다.[3] 그래서 안창부정 이심의 후손들은 법적으로는 양녕대군 후손이지만 실제 혈통은 수도군의 직계 후손들이다. 또한 수도군파와 양녕대군파의 항렬자가 같다.

[1] 宗簿寺. 왕실 족보 및 종친들의 잘못을 관리하던 부서.[A] A B 원래 부정(副正)이었다가 1872년에 고종이 '군(君)'으로 추증했다.[2] 증(贈) 이조참판.[3] 거꾸로 양녕대군파에서 수도군파로 입계한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