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디아길레프
1. 개요
러시아의 발레 프로듀서이자 무대미술가.
20세기 초 발레 뤼스라는 발레단으로 유럽을 평정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등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곡을 의뢰해 엄선된 발레 작품을 선보였고 러시아 출신 전설적인 무용수들이 알려지게 된다.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를 창단하여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런던, 파리, 뉴욕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2. 상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훗날 음악으로 꿈을 바꾸어 그 곳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2] 1898년 잡지 『예술세계』를 발행했는데 훗날 이 잡지는 러시아판 아르누보 운동을 상징하는 잡지가 된다.[3] '예술세계'의 성공 덕분에 190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마린스키 극장의 특별고문이 됐으나 낙하산이라는 비난 속에 1년만에 사직해야 했다.
1908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러시아 음악가 살리아핀과 함께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했고 그 후 본격적으로 발레를 전문으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1909년 5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를 소개하기 위해 디아길레프는 모스크바 최고의 무용수 35명을 이끌고 첫 공연을 했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디아길레프는 파리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일회성으로 끝날 수 있었던 팀을 발레단 '발레 뤼스'로 정식 창단했다.
그 후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기용해 <세헤라자데>, <불새> 등의 작품을 런던, 파리 등 다양한 곳에서 발표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디아길레프는 해외에 머물렀다. 새로운 소비에트 정권은 그를 부르주아 퇴폐의 특히 교활한 예로 디아길레프를 비난했다. 이 영향으로 소련 미술 사학자들은 60년 넘게 예술에서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1929년 57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발레 뤼스도 사라졌다.
3. 기타
- 동성애자였다. 그는 서구에서 처음으로 공인된 게이였는데, 유명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문제로 감옥살이를 한지 얼마 안 됐을 때라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 발레 뤼스가 유럽 사회에 워낙 센세이션을 일으킨 덕분이다.
4. 발레 뤼스의 예술가
출저 : The Great Composers Their lives and times
4.1. 음악가
- 림스키코르사코프 : 디아길레프가 그의 사후 세헤라자데를 편곡해서 공연했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불새, 페트로슈카, 봄의 제전
-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 마누엘 데 팔랴 : 에스파냐의 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