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1. 소개
- 코코 샤넬
- 코코 샤넬의 모토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매종 샤넬의 설립자이다. '코코'라는 이름은 샤넬이 가난하던 시절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 부르고 하던 시절에 자주 부르던 <Ko Ko Ri Ko>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예명이다. 본인은 성공한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본명 대신 코코 샤넬이라 부르는 걸 죽을때까지 아주 싫어했지만 미국에 그렇게 알려져서 굳어버린 이름.'''샤넬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아 현대 여성의 모습, 행동, 옷 입는 방식 등을 제시했다. 소년 같이 슬림한 몸매와 짧은 헤어스타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그을린 피부와 활동적인 생활 방식, 경제적 자립 또한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샤넬은 자기 삶의 태도와 스타일을 마케팅하며 자신의 경력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세기 여성들의 취향을 형성했다.'''
- 2004년 10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 디자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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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은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2]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00년~191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비실용적인,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껴[3]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 영국에서 남성용 정장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하여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적 여성복 ''''샤넬 수트''''로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현대 여성복의 시초'''.[4] 여기에는 개인적인 원인도 있는데 원래 마르고 볼륨감이 전혀 없던 샤넬은 자기 몸매를 큰 콤플렉스로 생각하고 이를 커버하기 위한 여성적인 디자인을 많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선택한 향수인 샤넬 No.5[5] 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3. 생애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집안에서는 어린 그녀를 수녀원의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존심과 독립심이 투철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이라 비유하여 꺼려했고,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3.1. 패션 디자이너 시절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6] 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집에 보관했는데 로랑생 사후 초상화는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으로 넘어가서 현재까지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4년에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샤넬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온 그녀였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넬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코코 샤넬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3.2. 사망
1971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4. 논란과 평가
인생 자체가 너무나도 아이러니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습과 실제와의 간극이 큰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재 샤넬의 대중적 이미지는 전적으로 샤넬의 과거에 관심이 없던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상당 부분 페미니즘 정치적 그리고 패션 마케팅적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크다.
흙수저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상업적 재능이나 디자인 쪽의 천재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실제로 많은 돈을 벌게 해준 원천은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보다는 자신의 동업자가 만들고 자신은 상표만 붙인 향수였다.
정치적으로는 극우 성향에,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나치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나치를 이용해 유태인이었던 자신의 동업자를 사업에서 퇴출시키려 했을만큼 전쟁 기간 동안 나치 고위층과 친분을 유지하며 정권에 협력하며 최고급 리츠 호텔에서 지냈으나 종전 후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실 독일 협력자들을 만 명 단위로 사형시킨 프랑스에서 코코 샤넬도 그렇게 될 뻔한 위기였지만 결국 자신의 과거 애인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가까운 친구였던 윈스턴 처칠 수상의 도움으로 풀려나 스위스로 도피, 10년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한다.
극우적 성향이었던 만큼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여성 인권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마를린 먼로 덕에 얻은 갑작스런 인기와 페미니즘 운동의 이미지 덧입히기의 혜택을 크게 봤다.
사생활 또한 좋게 말하면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복잡하였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신여성처럼 포장되지만, 실제 코코 샤넬의 삶은 재벌급 상속자, 귀족, 정치장교들을 스폰서로 삼아 그들의 자금과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키우고 성공시켰으며 위기에서도 그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코코 샤넬 스스로도 유부남이었던 그들과 결혼이나 정상적인 관계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충분히 알고 연인 관계를 이어나갔다.[7]
그 밖에 당시에 같이 활동했던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들하고 사이도 안 좋았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디자이너들의 물건을 보고 진부하고 한심하다며 공개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다녔고, 특히 당시 세계 패션의 정점이던 폴 푸아레와 사이가 안 좋았다.[8] 그 밖에 엘자 스키아파렐리[9] 하고도 라이벌이 되어 그녀를 싫어했으며, 파코 라반[10] 을 보고 금속공이나 다를 바 없다고 비하했다. 반대로 이브 생로랑을 두고는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며 칭찬했다. 후에 엘자 스키아파렐리가 은퇴하자 그제서야 인정하는 말[11] 을 했을 정도.
한마디로 미국 타임지에서는 20세기 100대 인물로도 선정될 정도로 세계적 유명인사지만, 그녀의 인생과 철학에 대해 속속들히 잘 아는 본국 프랑스에서는 그리 평가가 훌륭하지 못하다. 단적으로 프랑스 대표 훈장 레지옹 도뇌르는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업적이 있는 프랑스인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수여하는 훈장으로 크리스티앙 디오르, 이브 생로랑, 위베르 드 지방시, 엠마누엘 웅가로, 잔느 랑방, 피에르 발망 등 수많은 프랑스 남녀 패션 디자이너들 뿐 아니라 외국인이자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2010년 수상하기도 했지만, 정작 샤넬의 창시자인 코코 샤넬은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받지 못했다. 참고로 이 상은 에어버스를 잔뜩 구매한 공로(?)로 대한항공 회장도 받았다. 샤넬이 프랑스에서 얼마나 백안시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례.
5. 나치 부역
5.1. 나치 독일 스파이
2014년에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France 3에서 방영한 TV 다큐멘터리《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에서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방송됐다. 요원 번호는 '''F-7124''', 암호명은 '''웨스트민스터'''.[12]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녀는 1940년에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을 한 이후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면서 스파이가 되었고, 1943년에는 독일이 영국에 휴전을 제안할 때 비공식 사절로 윈스턴 처칠과 만났다.
샤넬은 전쟁기간 동안 파리의 호텔 리츠에 머물렀다. 이곳은 나치 장군들과 요원들의 숙소와 가까웠다. 그 중에는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박사도 있었다. 1941년 여름에 가브리엘은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세계 2차대전 중, 샤넬은 독일 스파이로 잘 알려진 '바론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Baron Hans Günther von Dincklage)'와 사귀었었다. 한편 샤넬의 행적을 고발한 <Sleeping with the Enemy, Coco Chanel and the Secret War>라는 책은 애초부터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나치 스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이라며 풀려났다. 그 이유 중에는 물론 그녀가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게 아니었던 점도 있을 지도 모르지만[13] 그녀가 처칠을 비롯한 영국 및 여러 유럽 상류층과 인맥이 있었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샤넬의 제품은 그때 당시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샤넬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럽에 들어온 미국 병사들을 위해 NO.5(향수)를 푸는 등의 이미지 마케팅을 세웠다.
그녀가 나치와 협력한 이유 중 가장 근거있는 부분으로는, 그녀의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샤넬의 코스메틱 권리를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샤넬의 사업의 첫 성공에 핵심적 기여를 하고 전후 복귀에도 엄청나게 투자해준 동업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일. 사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는 판단력이 빠르며[14] 물불을 안가리는 사업가였고, 코코 샤넬이 한번 배신을 때렸는데도 베르트하이머는 자기를 싫어하는 샤넬을 그래도 계속 후원하며 15년 뒤의 복귀도 후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샤넬은 프랑스에서 사실상 추방되었고,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로 복귀해 샤넬을 계속해서 이끌었고 후에 샤넬은 샤넬의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 가문에게 팔아버린다.
현재까지도 샤넬 브랜드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 두 명이 반반씩 실소유하고 있는데 둘 모두 세계 부자 순위에서 항상 이름을 찾을 수 있다.
6. 관련 항목
[1] 상당히 의미가 깊은 모토이다. 코코 샤넬이 최초로 여성용바지를 만들었을 때,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은 이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비실용적인 모습에 미를 추구한 복장이었다. 이에 실용성을 담은 여성용 바지를 고안하여 만든 샤넬은 새로운 아름다움의 바탕을 만듬과 동시에, 유럽의 비실용적인 전통적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와 여성의 아름다움을 비실용적인 전통적 미의 기준에 끼워넣어 폄하하지 말자는 의미를 세상에 던진 셈이다.[2] 초경을 시작하기 이전의 여자아이에게는 무릎 길이의 치마를, 초경을 시작하여 성인 여성으로서의 대우가 시작되면 발등까지 덮는 긴 치마를 입는 것. 이것은 동서남북을 막론한 유럽의 오랜 전통이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유럽 각국 왕실이나 귀족들이 남긴 전신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역으로 남자의 경우 어린 남자아이 혹은 어린 소년에게만 반바지를 입혔고, 그가 노동력과 분별력을 갖춘 성인 남성으로 성장해야 긴 바지를 입는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유럽 남성들이 편하다는 이유로 툭하면 반바지를 입는 미국 성인 남성들을 비웃던 시선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 여담이지만 어린 남자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 전통은 이후 한창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3] 사실 이건 샤넬의 독자적인 생각이 아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노동력 제공이 늘어났는데, 이렇게 움직임이 많고, 기계류가 많은 공장에서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연히 치마는 짧아지고 소매는 폭이 줄거나 짧아졌다. 여기에 헤어스타일도 단발로 바뀌고 모자도 챙이 작아지게 되었다. 당연히 장시간 움직이는데 불편한 코르셋은 퇴출. 우리가 아는 샤넬 스타일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근본은 공순이(...) 패션인 거다. 물론 공장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귀족층 여성들의 스타일은 전혀 그런 트렌드를 따르지 않았다.[4] 실제 그녀가 디자인에 영감을 얻은 것들은 대부분 서민층의 아이템이었는데, 그렇게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제품들이 오늘날 명품의 최정점에 있다는 게 엄청난 아이러니.[5] 1920년대 초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런칭하려고 했고, 당시 유명 조향사였던 Ernest Beaux에게 의뢰하여 몇 가지 샘플을 건네받았다. 그 중 그녀가 선택한 향이 바로 5번이다. 그래서 제품명이 간단하게 5번이 됐다는 이야기.[6] 젊은 시절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기도 했던 인물로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로랑생은 샤넬과 동갑이다.[7] 이에는 샤넬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몸이라는 이유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8] 폴 푸아레는 우아하고 여성적이지만 덜 실용적인, 파티에 입고 갈 옷을 만들었다. 샤넬과 정반대의 디자인을 한 사람. 하지만 그는 자타공인 세계 패션의 왕이었고, 여성복에서 최초로 코르셋을 뺀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들 그것을 샤넬의 공으로 알고 있지만 최초는 그. 코코 샤넬이 코르셋을 없앴다고 알려진건 미국에서 잘못 알려진 이미지로 일부러 마케팅적으로 거짓으로 그렇게 이미지를 구축한 면이 있다. 이런 이미지는 미국의 전후 페미니즘 유행과 더불어 사업적으로 상승 효과를 냈다.[9] 초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옷의 대가. 역시 샤넬의 철학과는 맞지 않았다.[10] 재질을 초월해 옷을 만드는 전설급 디자이너.[11]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 생각했고, 그녀만한 창의성을 가진 이가 없었다."[12] 당시 만나던 연인이 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인 휴 그로스베너였다. 영국의 국회의원이었으며 꽤 깊은 관계를 가졌었다.[13]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동업자인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부터 일단은 도망갔다 돌아와서 다시 회사를 되찾았다. 다만 이는 나치 패망 이후 이야기라 전범 재판의 선후관계를 알아봐야 할 일이고 이것이 참작됐는진 알아봐야 할 일.[14]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 사업을 명분으로 미국 출장을 간 후 잽싸게 회사를 처분하고 망명해버렸다. 그리고 피에르 대신 회사를 대신 맡고 있었던 프랑스 기업가 Félix Amiot는 나치 부역 혐의를 받았으나 '''당연히'''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