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슬라프 니진스키

 

'''바슬라프 니진스키
Vaslav Nijinsky'''
'''본명'''
바츨라프 포미치 니진스키
Ва́цлав Фоми́ч Нижи́нский
'''출생'''
1890년 3월 17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
'''사망'''
1950년 4월 8일 (향년 60세), 영국 런던
'''국적'''
러시아 [image]
'''직업'''
발레리노
'''배우자'''
로몰라 드 풀츠키 (1913년–1950년)
1. 개요
2. 생애
2.2. 외설 논란
2.3. 디아길레프와의 결별
2.4. 정신병과 죽음
3. 평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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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간 춤췄다. 남은 30년은 암흑 속에서 살았다.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 무용의 신 '니진스키''''.

- e뮤지컬스토리

러시아의 발레리노.
니진스키는 '''역사상 가장 재능있는 발레리노'''로 손꼽히며, 그가 맡은 역할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니진스키는 그 당시 발레리노 중에서 보기 힘든 기술인 앵포엥트(en pointe)를 출 수 있었다. 중력을 거부한 듯, 높이 도약하며 춤추는 것도 니진스키의 전설 중 하나로 남았다.

2. 생애



2.1.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의 만남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계 무용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0년 그는 황실 발레 학교에 들어가, 엔리코 체케티(Enrico Cecchetti), 니콜라이 레가트(Nicholas Legat), 파벨 게르트(Pavel Gerdt)에게서 공부하였다. 니진스키는 18살 때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에서 주역을 맡았다.
'''장 콕토와 디아길레프'''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를 만나면서 인생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식인이자, 러시아 시각예술과 음악을 해외로 소개시키는 부유한 후원자였다. 이 두 사람은 연인이 되면서,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소유하려고 들었다. 후에 니진스키의 자서전에 의하면 '디아길레프가 처음부터 싫었다.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1] 1909년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를 주역으로 내세워, 파리에서 발레 공연을 가졌다. 그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의 유명 예술집단을 통해서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의 명성이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디아길레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창립하였고, 미하일 포킨의 안무와 함께 그 시대 가장 유명한 발레단 중 하나가 되었다.
'''세헤레자데 무대의 니진스키'''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함께'''
니진스키는 포킨이 안무를 맡고 니콜라이 체레프닌이 작곡한 《아르미드의 집》과, 안톤 아렌스키와 다른 러시아 작곡가들이 작곡한 《클레오파트라》와 막간극 《축제》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재능을 선보였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니진스키의 파 드 뒤(pas de deux) 연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10년 니진스키는 《지젤》과 포킨의 발레인 《사육제》,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 모음곡인 《세헤라자데》의 공연에서 빛을 발휘했다. 니진스키와 타마라 카르사비나(Tamara Karsavina)와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서 진행한 공연은 전설로 남았다.

2.2. 외설 논란


니진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으로 돌아갔으나, 무대 위에서 타이즈 차림으로 나타나자 퇴장당했다. 그 당시 남자 무용수들은 반바지 착용이 의무적으로 요구되었다. 한 왕족의 일원은 그 모습이 외설적이라 비난하였고, 이에 니진스키는 해고되었다. 이 스캔들은 니진스키를 자신의 발레단에 자유롭게 출연시키기 위해, 디아길레프가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서유럽에서의 많은 공연들이 니진스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니진스키는 포킨의 새 프로덕션으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음악이 사용된 《장미의 정령》에서 주역을 맡았고, 1911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로슈카》에서, 생명이 없는 춤추는 인형의 역할로 청중들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페트로슈카는 인형 페트로슈카가 마치 사람처럼 감정을 느낀다는 독특한 설정으로 큰 인기를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니진스키는 페트로슈카를 연기하며 기존 발레와 달리 손과 발의 관절을 이용한 동작과 마임을 통해 비통한 표정 연기를 선보여 인형의 양면성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이후 니진스키는 발레 작품의 안무를 맡았다. 1912년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이 사용된 《목신의 오후》와 《희롱》(Jeux), 1916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의 《틸 오일렌슈피겔》(Eulenspiegel),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등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니진스키는 전통적인 발레의 것과는 거리가 먼 안무를 만들어냈다.
'''레온 박스트가 그린 목신의 오후'''
'''목신으로 변신한 니진스키'''
1912년 니진스키는 말라메르의 시를 바탕으로 드뷔시의 음악을 사용한 《목신의 오후》에서 처음으로 안무를 창작했다. 참고로 이 작품은 목신이 어느 여름 오후 플루트를 불다가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니진스키는 신체에 집중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안무를 만들어냈다.
'''문제의 그 장면'''
특히 님프스카프를 이용한 자위 행위는 큰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단순 점프나 어려운 테크닉에만 치중한 발레의 틀을 깬 것이다. 하지만 파리 절반은 그를 외설죄로 비난하였고, 오귀스트 로댕, 오딜롱 르동, 로버트 프로스트같은 예술가들은 음악의 결을 잘 살린 안무라며 옹호했다.
1913년 《봄의 제전》은 현재 모더니즘 안무의 시초로 유명한데 그때 당시에는 《목신의 오후》와 더불어 혹평이 대다수였다.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봄의 제전》의 공연은 니진스키를 몰락의 길로 내몰게 하는 큰 계기를 주었다. 발레는 비례균형, 아름다움을 중시한다. 니진스키는 이 논리에서 벗어나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안무로 인간 집단의 본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표현해냈다. 관객들은 외설적이고 충격적인 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봄의 제전' 이후로 춤을 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봄의 제전을 '봄의 학살'이라고 혹평을 했지만 현재는 모더니즘 안무의 시초로 재해석되고 있다.

2.3. 디아길레프와의 결별


1913년 봄의 제전으로 시끌벅적했던 시기에 발레 뤼스는 남미를 순회 공연했는데, 디아길레프는 항해 공포증으로 그 항해 여행에 동반하지 않았다. 디아길레프가 옆에 없어지자 니진스키는 헝가리 풀츠스키 백작의 영양인 로몰라 드 풀츠키(Pulszky Romola)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니진스키의 열렬한 팬이던 로몰라가 니진스키와 결혼하기 위해서 계략을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니진스키와 가까워지기 위해 발레를 시작하고, 가족의 연줄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진스키는 로몰라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항해 기간 동안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로몰라 드 풀츠키와 니진스키'''
발레단이 유럽으로 돌아갈 무렵, 니진스키와 로몰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결혼했다.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의 결혼 소식에 격노했고 자신의 권력과 인맥을 이용하여 춤을 출 수 없도록 무대에서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춤만 출 수 있길 바랐던 니진스키는 어디에서도 춤을 출 수 없게된 것이다.

2.4. 정신병과 죽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니진스키는 러시아 시민으로 헝가리에 구금되었다. 디아길레프는 1916년 북미 순환 공연을 위해서 니진스키를 구출했고 틸 오일렌슈피겔의 무대에 니진스키를 세웠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이 과정에서 조발성 치매증 징후가 나타나며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1919년 29살인 니진스키는 신경쇠약으로 더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경력에 막을 내리게 된다.
'''파리 몽마르트 묘지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비석'''[2]
이후 그는 조현병 진단을 받고, 아내에 의해서 스위스로 옮겨진 후, 정신과 의사인 에브게니 뷰울러에게 치료받았다. 니진스키는 나머지 생애를 정신병원과 보호시설에서 출입을 반복하게 되었다. 로몰라는 일생을 니진스키의 간호에 헌신했다. 니진스키는 1950년 4월 8일 한 런던의 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후, 런던에 매장되었다. 1953년 니진스키의 유체가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의 묘지(Cimetière de Montmartre)에 옮겨져, 가에타노 베스트리스(Gaetano Vestris),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 엠마 리브리(Emma Livry)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

3. 평가


  • 니진스키가 살던 시대동안 확실히 뛰어난 무용수였지만, 그의 파트너였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말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왕립 발레 학교에서 막 나온 젊은 무용수들이, 이제는 니진스키가 그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기술을 출 수 있다.
>
> - 타마라 카르사비나(Tamara Karsavina)
예를 들어 잇츠코프스키는 니진스키만큼이나, 높이, 멀리 도약하며 춤 출 수 있었다. 니진스키의 활약으로 발레 무용수 실력의 표준이 다시 정해진 것이다.
  • 디아길레프가 없었다면 니진스키는 전설적인 발레리노로 활동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의견 또한 많다. 아무래도 디아길레프가 니진스키를 후원한 것이 니진스키에게 나쁜쪽이든 좋은쪽이든 큰 영향을 미쳤으니...
  • 니진스키가 여성 무용수와 만족스러울 만한 협연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지젤》처럼 무대 위에서 여성 무용수와의 호흡이 중요한 경우 니진스키는 성공적인 무대를 선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푸른 신(神)》에서 신의 역할, 《장미의 정령》에서 장미, 《세헤라자데》에서 사랑받는 노예같은 양성적인 역할에서, 니진스키를 뛰어넘을 이가 없었다. 여러면을 종합해볼 때, 니진스키는 의심할 여지없이 눈부시고 영향력있는 예술가다.
  • 그의 활동 기간을 계산해보면 60년 중 무대에 선 시간은 단 1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업적을 세운 것이다.

4. 기타


  •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1918년부터 1944년까지 니진스키와 로몰라가 살았던 집을 보존하고 있다.



[1] 니진스키의 이후 생애를 보면 확실히 그는 이성애자였다. 그러나 디아길레프, 류보프 왕자 등, 동성애 성향을 가진 권력자들은 그를 탐냈고, 그들이 니진스키에 대해 보인 감정은 소유욕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속된 말로, 니진스키와 그들의 관계는 연인이라기보다 스폰서에 가까운 것이었다.[2] 조각상은 페트로슈카로 분장한 니진스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