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야누스
Lucius Aelius Sejanus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티베리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최고급 행정관료이자 권신, 간신.
티베리우스 황제의 부하. 프라이토리아니의 대장(근위대장)으로 오늘날까지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로마사 전체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음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외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했다고 하며, 율리우스 가문의 대다수 남자 황족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제3대 황제가 되는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이자 칼리굴라의 사촌동생이었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씨를 말려버린 사람으로 악명높다.
세야누스는 에퀴테스 계급 출신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이후 '''근위대장이 근위대를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칼리굴라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킨 이후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미다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에게 고발당한 뒤, 즉시 체포돼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사후 그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으로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으로 임명되는 등 총애를 받았다. 세야누스 역시 어렸을 때부터 당시 제위 계승 후보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동행하는 등, 차기 관료로서 친분과 경력을 쌓았다. 티베리우스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근위대장이었던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공동 근위대장이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을 유일한 근위대장에 임명해줄 것을 주장해 1~2년 뒤에 단독으로 근위대장이 되었다. 단독 근위대장이 된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쌓으면서, 이전까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해온 9개의 보병대가 로마시 동쪽 교외의 근위대 막사에 함께 주둔하는 것을 이용해 서서히 권력을 키워나갔다. 14년에 판노니아의 로마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유능한 모습을 보여 티베리우스에게 중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야심도 드러냈다.
20년에 자신의 딸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1] 와 약혼시켜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약혼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질식사로 급사해 결국 무산되었다.[2] 이 무렵부터 세야누스를 경계하는 티베리우스의 장남 소 드루수스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22년 폼페이우스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자, 화재의 진화에 노력했으며 티베리우스에게 공적을 칭찬받았다.
23년 당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제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로는 친자식이자 율리우스 가문 남성 중 가장 연장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3]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삼남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가 있었다. 그 외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도 있었는데,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뇌성마비 장애인이어서 제위 후보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 소 드루수스는 아직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과는 달리 나이와 경험이 출중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티베리우스 사후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제왕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요절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여서 권좌에 대한 야망을 이루려는 세야누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를 제거할 계획을 짜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내이자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었던 리빌라(Claudia Livia Julia)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 이후 그는 온갖 말로 리빌라를 구워삶아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세야누스에게 푹 빠진 리빌라의 요구에 따라 세야누스는 3명의 아이를 낳았던 아내 아피카타와 이혼하고 리빌라와 결혼 약속을 했다.
그는 리빌라의 할아버지 에우데모스, 환관 류그도스도 끌어들여 소 드루수스 암살을 계획했으며, 리빌라가 소 드루수스에게 약간의 독을 서서히 먹여서 병사로 위장하는 방법으로 암살에 성공했다.
25년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었던 리빌라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티베리우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받으며 공식 후계자가 되었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했다. 따라서 고령이었던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자연스레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가운데 이미 성인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로 좁혀졌다.
근위대의 힘과 정보력을 이용해 세야누스는 이 2명과 그들의 후원자인 대 아그리피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이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측을 이간질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빌라 역시 오빠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이용했으며, 시누이 대 아그리피나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리빌라 역시 이 음모에 가담했다.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게르마니쿠스 일가의 파멸을 위해 고발과 협박, 음모를 통해 '게르마니쿠스 파'들을 제거했다. 먼저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들, 대 아그리피나의 동조자를 차례차례 고발하여 실각시키면서 대 아그리피나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다.
25년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로 출발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낙반 사고가 일어났는데,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
27년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떠나 카프리 섬에 거처했다. 이때부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거대한 권세를 누렸다. 세야누스의 생일은 공식적으로 경축되었고, 티베리우스의 동상과 함께 세야누스의 동상이 놓이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파벌도 급격히 성장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형과 대립하고 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 포섭했다.
29년, 로마에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이었던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가 사망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대 아그리피나 일파를 숙청할 수 있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위조한 증거를 내밀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큰 아들이자 죽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죄로 고발해 유죄를 받아낸 뒤 추방해서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때 아그리피나의 친구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손녀 등도 함께 묶여 추방하거나 자살로 내몰아 제거했다.
네로 카이사르는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폰티아로 추방된 이후,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인 31년 폰티아에서 자결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24년 티베리우스의 후원과 격려 속에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역임하며 인품과 능력 모두 평가가 상당히 좋았다. 그는 먼 친척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는데, 세야누스는 리빌라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밀리아를 유혹해 간통을 한 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함정에 빠뜨렸다. 이때 악명높은 카시우스 세베루스가 위조된 증거로 만들어진 스캔들을 이유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고발했고, 세야누스에게 포섭된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공격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에게 고발당해 30년부터 로마의 팔라티누스 궁전 지하실에 유폐되어 병사의 감시 아래 놓였다.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콘술(집정관)이 되었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비록 황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집정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 세력은 권세의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티베리우스는 점차 세야누스를 경계하게 되었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무렵,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인 소 안토니아[4] 는 티베리우스에게 은밀히 자신의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노예 팔라스를 보내 죽은 대 드루수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세야누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마저 파멸시키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끝장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간청이었다.
티베리우스 역시 섬에 틀어박혀 있어도 돌아가는 정국을 손바닥보듯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좌를 위협하며, 자신의 가문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관습적으로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은 로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세야누스는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때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의 서신, 면회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세야누스의 통제가 사라지자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야누스 일당의 힘은 티베리우스조차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 표면적으로는 세야누스를 신뢰하며 모든 속주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프로콘술 명령권(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5] )과 함께 향후 5년간 공동 집정관 권한을 주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황제의 3가지 권위 가운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31년 그간 반대했던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자 세야누스의 불륜관계였던 리빌라와의 약혼을 허락해 한층 세야누스의 경계심을 늦추었다.
화려한 권력을 누리던 세야누스는 그 최후도 극적이었다.
31년 5월 초,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집정관을 사임했다.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사임하게 되었다. 5월 9일, 2명의 후임 보궐 집정관이 취임했으며 이 중 1명이 그만두고, 6월 1일 세야누스의 동료인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가 취임했다. 10월 1일, 또 한 명의 집정관으로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가 취임했다.
이 시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경계하게 되어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사트리우스 세쿤두스에 의해 누설되어 티베리우스에게 입수되었다.
10월 17일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에 의해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가 세야누스 대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에 임명되어 서한을 가지고 로마에 갔다. 밤에 도착한 마크로는 그날 밤 집정관 레굴루스, 소방대장(Praefectus Vigilis)[6] 그라이키누스 라코 등에게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전달했다. 마크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권을 접수한 다음, 세야누스에게 찾아가서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도 알려주었다. 이는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였고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집정관 레굴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서한 낭독을 시작했다.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해 혹시 모를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레굴루스는 낭독을 계속했다.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은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다음 세야누스는 경비병들에게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단은 큰 장애없이 이루어졌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근위대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대처도 치밀했는데 세야누스가 근위대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게 대항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다만 이때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미 지하실에서 굶어 죽은 뒤였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속주의 군단으로 도망치는 상황까지 고려해 선박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세야누스의 시체는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르 강에 버려졌으며, 세야누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었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형 이후, 그의 가족과 일파 역시 반역죄로 숙청되었다.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블라이수스는 세야누스가 처형될 때 즉시 처형됐고, 아직 어린 차남과 장녀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녀는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도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때 아피카타는 유서로 소 드루수스 암살의 정황을 밝혔다. 따라서 모든 정황을 알아낸 티베리우스에 의해 세야누스의 남은 가족 전체와 그 노예들까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됐고, 그를 지지했던 친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들, 세야누스와 간통해 소 드루수스 암살과 게르마니쿠스 아들들의 몰락에 일조한 며느리 리빌라까지 몰살당했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1. 개요
티베리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최고급 행정관료이자 권신, 간신.
티베리우스 황제의 부하. 프라이토리아니의 대장(근위대장)으로 오늘날까지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로마사 전체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음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외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했다고 하며, 율리우스 가문의 대다수 남자 황족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제3대 황제가 되는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이자 칼리굴라의 사촌동생이었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씨를 말려버린 사람으로 악명높다.
세야누스는 에퀴테스 계급 출신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이후 '''근위대장이 근위대를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칼리굴라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킨 이후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미다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에게 고발당한 뒤, 즉시 체포돼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사후 그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출신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으로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으로 임명되는 등 총애를 받았다. 세야누스 역시 어렸을 때부터 당시 제위 계승 후보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동행하는 등, 차기 관료로서 친분과 경력을 쌓았다. 티베리우스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근위대장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근위대장이었던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공동 근위대장이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을 유일한 근위대장에 임명해줄 것을 주장해 1~2년 뒤에 단독으로 근위대장이 되었다. 단독 근위대장이 된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쌓으면서, 이전까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해온 9개의 보병대가 로마시 동쪽 교외의 근위대 막사에 함께 주둔하는 것을 이용해 서서히 권력을 키워나갔다. 14년에 판노니아의 로마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유능한 모습을 보여 티베리우스에게 중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야심도 드러냈다.
20년에 자신의 딸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1] 와 약혼시켜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약혼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질식사로 급사해 결국 무산되었다.[2] 이 무렵부터 세야누스를 경계하는 티베리우스의 장남 소 드루수스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22년 폼페이우스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자, 화재의 진화에 노력했으며 티베리우스에게 공적을 칭찬받았다.
2.3.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23년 당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제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로는 친자식이자 율리우스 가문 남성 중 가장 연장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3]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삼남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가 있었다. 그 외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도 있었는데,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뇌성마비 장애인이어서 제위 후보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 소 드루수스는 아직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과는 달리 나이와 경험이 출중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티베리우스 사후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제왕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요절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여서 권좌에 대한 야망을 이루려는 세야누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를 제거할 계획을 짜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내이자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었던 리빌라(Claudia Livia Julia)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 이후 그는 온갖 말로 리빌라를 구워삶아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세야누스에게 푹 빠진 리빌라의 요구에 따라 세야누스는 3명의 아이를 낳았던 아내 아피카타와 이혼하고 리빌라와 결혼 약속을 했다.
그는 리빌라의 할아버지 에우데모스, 환관 류그도스도 끌어들여 소 드루수스 암살을 계획했으며, 리빌라가 소 드루수스에게 약간의 독을 서서히 먹여서 병사로 위장하는 방법으로 암살에 성공했다.
25년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었던 리빌라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티베리우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2.4. 티베리우스의 은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받으며 공식 후계자가 되었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했다. 따라서 고령이었던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자연스레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가운데 이미 성인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로 좁혀졌다.
근위대의 힘과 정보력을 이용해 세야누스는 이 2명과 그들의 후원자인 대 아그리피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이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측을 이간질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빌라 역시 오빠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이용했으며, 시누이 대 아그리피나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리빌라 역시 이 음모에 가담했다.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게르마니쿠스 일가의 파멸을 위해 고발과 협박, 음모를 통해 '게르마니쿠스 파'들을 제거했다. 먼저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들, 대 아그리피나의 동조자를 차례차례 고발하여 실각시키면서 대 아그리피나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다.
25년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로 출발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낙반 사고가 일어났는데,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
27년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떠나 카프리 섬에 거처했다. 이때부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거대한 권세를 누렸다. 세야누스의 생일은 공식적으로 경축되었고, 티베리우스의 동상과 함께 세야누스의 동상이 놓이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파벌도 급격히 성장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형과 대립하고 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 포섭했다.
2.5. 권세의 절정
29년, 로마에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이었던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가 사망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대 아그리피나 일파를 숙청할 수 있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위조한 증거를 내밀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큰 아들이자 죽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죄로 고발해 유죄를 받아낸 뒤 추방해서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때 아그리피나의 친구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손녀 등도 함께 묶여 추방하거나 자살로 내몰아 제거했다.
네로 카이사르는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폰티아로 추방된 이후,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인 31년 폰티아에서 자결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24년 티베리우스의 후원과 격려 속에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역임하며 인품과 능력 모두 평가가 상당히 좋았다. 그는 먼 친척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는데, 세야누스는 리빌라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밀리아를 유혹해 간통을 한 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함정에 빠뜨렸다. 이때 악명높은 카시우스 세베루스가 위조된 증거로 만들어진 스캔들을 이유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고발했고, 세야누스에게 포섭된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공격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에게 고발당해 30년부터 로마의 팔라티누스 궁전 지하실에 유폐되어 병사의 감시 아래 놓였다.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콘술(집정관)이 되었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비록 황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집정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 세력은 권세의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티베리우스는 점차 세야누스를 경계하게 되었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무렵,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인 소 안토니아[4] 는 티베리우스에게 은밀히 자신의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노예 팔라스를 보내 죽은 대 드루수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세야누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마저 파멸시키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끝장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간청이었다.
티베리우스 역시 섬에 틀어박혀 있어도 돌아가는 정국을 손바닥보듯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좌를 위협하며, 자신의 가문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관습적으로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은 로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세야누스는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때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의 서신, 면회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세야누스의 통제가 사라지자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야누스 일당의 힘은 티베리우스조차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 표면적으로는 세야누스를 신뢰하며 모든 속주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프로콘술 명령권(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5] )과 함께 향후 5년간 공동 집정관 권한을 주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황제의 3가지 권위 가운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31년 그간 반대했던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자 세야누스의 불륜관계였던 리빌라와의 약혼을 허락해 한층 세야누스의 경계심을 늦추었다.
2.6. 세야누스 처단
화려한 권력을 누리던 세야누스는 그 최후도 극적이었다.
31년 5월 초,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집정관을 사임했다.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사임하게 되었다. 5월 9일, 2명의 후임 보궐 집정관이 취임했으며 이 중 1명이 그만두고, 6월 1일 세야누스의 동료인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가 취임했다. 10월 1일, 또 한 명의 집정관으로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가 취임했다.
이 시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경계하게 되어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사트리우스 세쿤두스에 의해 누설되어 티베리우스에게 입수되었다.
10월 17일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에 의해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가 세야누스 대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에 임명되어 서한을 가지고 로마에 갔다. 밤에 도착한 마크로는 그날 밤 집정관 레굴루스, 소방대장(Praefectus Vigilis)[6] 그라이키누스 라코 등에게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전달했다. 마크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권을 접수한 다음, 세야누스에게 찾아가서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도 알려주었다. 이는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였고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집정관 레굴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서한 낭독을 시작했다.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해 혹시 모를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레굴루스는 낭독을 계속했다.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은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다음 세야누스는 경비병들에게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단은 큰 장애없이 이루어졌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근위대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대처도 치밀했는데 세야누스가 근위대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게 대항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다만 이때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미 지하실에서 굶어 죽은 뒤였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속주의 군단으로 도망치는 상황까지 고려해 선박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2.7. 사후
세야누스의 시체는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르 강에 버려졌으며, 세야누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었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형 이후, 그의 가족과 일파 역시 반역죄로 숙청되었다.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블라이수스는 세야누스가 처형될 때 즉시 처형됐고, 아직 어린 차남과 장녀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녀는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도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때 아피카타는 유서로 소 드루수스 암살의 정황을 밝혔다. 따라서 모든 정황을 알아낸 티베리우스에 의해 세야누스의 남은 가족 전체와 그 노예들까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됐고, 그를 지지했던 친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들, 세야누스와 간통해 소 드루수스 암살과 게르마니쿠스 아들들의 몰락에 일조한 며느리 리빌라까지 몰살당했다.
[1] 클라우디우스가 첫번째 결혼에서 맞이한 아내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사이에서 얻은 장남이었다. 풀네임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와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에서 각각 따와 지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동복 여동생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장녀이자 파우스투스 술라의 아내였던 클라우디아가 있었다.[2] 배를 공중에 던지고 입으로 받아먹는 놀이를 하다가 과일이 기도에 박혀 질식사했다고 한다. 세야누스가 몰락한 이후 세야누스가 그를 살해했다고 하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장애인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이 없었던 점을 들어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주장은 현실성없는 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3] 본명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으며 삼촌 대 드루수스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소 드루수스'라고 불린다.[4]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리빌라의 어머니이다.[5] Imperium proconsulare maius. 이 권한의 직책명이 임페라토르이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가리킬 때 임페라토르란 말을 쓴다.[6] 치안까지 관할하는 집단이라, 근위대와 함께 로마의 무력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