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Drusus Iulius Caesar / Drusus Julius Caesar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신상 정보'''
'''휘'''
NERO CLAVDIVS DRVSVS[1]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DRVSVS IVLIVS CAESAR[2]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출생'''
기원전 14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23년 9월 14일 (37세)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배우자'''
리빌라
'''자녀'''
율리아 리비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
'''아버지'''
티베리우스
'''어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형제'''
티베릴루스, 게르마니쿠스(입양형제, 사촌형제, 매형)
1. 소개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2.2. 공직 경험과 아버지의 즉위
2.4. 일리리쿰 파견과 도나우 강 방어 전선 체제 정비
2.5. 게르마니쿠스의 사망과 황태자 등극
2.6. 사망


1. 소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Drusus Julius Caesar)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제위계승권자, 정치인, 행정가이자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이다. 보통 친삼촌이자 장인인 대(大) 드루수스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小) 드루수스'''라고 불리며, 조카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드루수스 2세'''라고도 통칭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상속자인 그는 AD 19년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에서 급사한 황태자 게르마니쿠스 사후 그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황실의 한축인 클라우디우스 가의 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의 장손이었다. 그는 입양형제이자 사촌형인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태생적으로 부모 양쪽 모두에게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3]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그의 사촌여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의 여자형제인 리빌라와 결혼시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양가 모두와 인연을 맺도록 했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의 양숙부이자 5촌 당숙이며 고모부이다. 또한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사촌형이자 매형이다.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로 출생 당시에는 친삼촌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사촌형 게르마니쿠스와 이름이 거의 똑같은 이름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였다. 그러다가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공식적인 양자로 입적된 AD 4년, 그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로 입적돼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했다.
드루수스는 AD 10년에 재무관을 시작으로 공직 경험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정치적 경력을 그대로 뒤따랐는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두 사람을 신화 속 등장인물이자 쌍둥이자리의 주인공인 디오스쿠로이 형제[4]에 비유하면서 이들을 지지했다고 한다.
드루수스는 인기가 없던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달리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역량이 뛰어난 후계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세야누스의 야심을 눈치채고 그와 대립했는데 AD 23년 9월 14일 갑작스레 사망했다. 훗날 세야누스가 몰락한 뒤, 그의 죽음이 세야누스의 전처의 폭로로 독살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는 그의 아내 리빌라와 세야누스의 공모였음이 드러났다.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통칭 '''소(小) 드루수스, 드루수스 2세'''라고 불리는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14년 로마에서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티베리우스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첫 아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동복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5]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라고 지어줬다.
소(小) 드루수스는 태생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친누나 옥타비아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지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었다. 그의 친할머니는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였으며 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 외할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복심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며 율리아의 두번째 남편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이 당시, 그의 친부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공식적인 양자가 되지 않았고, 클라우디우스 네로가의 수장이었기에 소 드루수스가 제위를 이어받을 확률은 희박했다.
외조부 아그리파가 BC 12년 급사하고 작은아버지 대 드루수스마저 BC 9년 낙마사고로 게르마니아에서 요절한 이후,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던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부모가 강제로 이혼했다. 새로 맞이하게 된 계모 율리아와 친부 티베리우스의 사이에는 이복동생인 티베릴루스가 태어났지만 얼마 안 가 사망했다. 갓 태어난 동생의 사망 후, 아버지와 계모가 갈등 끝에 결혼 생활이 파탄나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BC 6년 도망치듯 모든 것을 포기하고 로도스 섬으로 도망치듯 떠났는데 드루수스는 아버지와 달리 로마에 남아 황실 식구들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7년이 지난 뒤인 AD 1년, 소 드루수스가 성년식을 치룰 나이가 되었을 때 의붓할아버지와 친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로마로 귀환한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입회 아래 로마에서 성년식을 거행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인 가아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한 이후, AD 4년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공식적인 후계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되면서 자동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입적돼 이름을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따라 AD 5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요절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미망인이 된 사촌누이동생 리빌라와 결혼했다.

2.2. 공직 경험과 아버지의 즉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양손자인 소 드루수스에게 공직의 각종 특권들을 부여했다. 티베리우스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은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처럼 2살 터울인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형제가 티베리우스 사후, 카이사르 가의 두 후계자로서 함께 로마 제국을 운영하길 바랬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일찍부터 차차기 황제로 확정된,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가 밞았던 공직 코스와 사제직을 그대로 따라 밞았다[6].
드루수스는 AD 10년부터 재무관을 시작으로 2살 위인 ‘형’ 게르마니쿠스가 경험한 공직 코스를 그대로 따라 밞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사무실을 로마에 개설했다. 최고 제사장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는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제사관에 두 사람을 임명했고, 두 사람이 파트너로서 함께 제국의 각종 명예와 훈장들을 선사받도록 했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남은 드루수스를 옆에 두고 행정 업무처리, 원로원을 상대하는 정치술 등을 지도했는데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의 또 다른 후원자는 아우구스타였던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였다. 그래서 음모론을 펼친 호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리비아가 친아들과 친손자 두명을 제위에 연달아 올리기 위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했으며, 아우구스투스마저 독살했다고 말했다.
친사촌형제지간이기도 한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는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 이상으로 유독 사이가 좋았는데, 이런 관계는 두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입적되고 나란히 후계자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더 깊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잘 몰랐던 로마 민중들은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제왕수업을 받고 있던 두 사람을 선의의 라이벌이라고 인식했다. 이런 가운데 아우구스투스는 재무관을 시작으로 공직에 오른 손자 드루수스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하면서 장차 드루수스가 원로원 내에서 확실한 발언권과 위상을 갖추게 힘을 실어줬다, 따라서 그는 손자에게 AD 13년 새롭게 창설된 원로원 내 상임 이사국 위원 자리를 선사했다. 이는 과거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에게 원로원 의석을 부여하고 이들의 발언권을 특권으로 부여해준 것과 비슷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 조치는 어린 드루수스의 원로원 내 위상을 높여줬으며, 드루수스의 발언권을 보장해줬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소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황실의 뜻에 따라 국장으로 치뤄진 장례식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대표로 로스트라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후 한달 뒤,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프린켑스 지위에 오른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등극에 참가해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자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황실 식구들과 함께 소개됐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도나우 전선의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군단병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실행과 보너스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게 되자 26살에 불과한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의 대리인으로 판노니아에 파견됐다.

2.3. 판노니아 반란


파견 당시 드루수스는 나이에 비해 정치짬밥이 상당했고, 아우구스투스 옆에서 직접 제왕교육을 받으면서 일찍이 그 능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늘 로마 또는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속주 파견이나 군복무는 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판노니아 군단병들의 파업문제는 파견된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제왕교육을 직접 받은 사람이고,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대표로 파견되어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난도 높은 협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군인들의 파업에 파견된 비무장상태의 원로원, 정부 대표였다.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그리고 드루수스 본인의 예상처럼 판노니아 반란은 시작부터 상당히 분위기가 험악했다. 따라서 근위대와 비슷한 수준의 봉급 인상을 요구하던 도나우 전선의 판노니아 3개 군단의 군단병들을 설득하기 위해 파견된 드루수스는 도착한 숙영지에서 반란을 주도한 주모자들에게 첫날부터 협박을 당했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협박과 야유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고, 손을 들어 자신을 협박하던 1만 8천여명의 군단병들을 조용히 시킨 뒤, 차분하게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낭독했다. 서한에는 티베리우스에게 군단 사령관의 권한을 부여받은 드루수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며, 권한 밖의 요구사항은 원로원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서한 속 내용이 낭독된 이후에도 모욕과 협박은 가라앉지 않았고, 드루수스가 숙영지에 도착한 직후부터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낭독하고 막사로 들어갈 때까지 반란 주도자들은 드루수스와 수행원들을 협박했다. 이들은 드루수스 일행에게 돌을 던졌고, 협상의 목적으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드루수스를 포로로 잡아두려고 했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포로처럼 반란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령관 막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와중에 하늘에서 월식이 진행됨을 발견한 뒤, 자연현상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드루수스는 군단 내 인망 높은 백인대장들을 은밀히 만나 이들을 설득해 기본적인 질서마저 사라진 군단의 군율부터 재정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백인대장들을 월식으로 두려움에 떤 병사들에게 보내 ‘달이 사라진 현상은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뒀기 때문이다’라고 알려주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백인대장들에게 병사들을 다독이고 그들 스스로 반란에서 스스로 이탈하게끔 만들었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월식이 끝난 다음날 아침 연설을 통해 혼란에 빠진 판노니아 군단병들의 군율을 잡았다. 이후 전열을 갖춘 군단병들 앞에 서서 연설을 통해 차분해진 군단병들을 다시 한번 설득하면서, 군단병들의 불만 사항을 로마에 있는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반란주동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반대했지만 병사들 대부분은 드루수스의 뜻을 지지했기에 파발병을 로마로 보내기로 한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얻어냈다. 드루수스는 파발병을 로마로 보낸 직후, 예정대로 사령관 막사에서 반란을 주도한 페르켄니우스 등 2명에게 면담을 요청한다며 부른 뒤 이들이 막사 안에 들어온 직후 군법에 따라 즉시 죽였다. 이후 백인대장들에게 명령을 하달해 페르켄니우스를 지지하면서 설득 이후에도 반란에 참가 중인 군단병들을 색출해 군법대로 처분케 했으며, 눈치를 채고 숲으로 도망간 강경파 반란병들을 추격해 제거했다. 드루수스는 판노니아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로마로 귀환했다.

2.4. 일리리쿰 파견과 도나우 강 방어 전선 체제 정비


드루수스는 로마 귀환 후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예정대로 공직을 경험하면서,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AD 15년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으로 로마 민중들에게 검투 경기와 전차 경기를 주최했다. 이때 그는 형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자신들이 주최한 경기를 과잉으로 즐긴다고 할 정도로 열정을 선보였다. 따라서 민중들은 대회 기간동안 드루수스를 말을 다루는 재능이 있었던 신화 속 인물 ‘카스토르’에 빗대 카스토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그를 지지했다. 이때 폴룩스라는 별명이 붙은 게르마니쿠스도 드루수스와 함께 민중들에게 열광적으로 지지받았다. 민중들에게 짠돌이라고 불리며 인기가 없던 아버지와 달리 민중들의 인기를 얻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공동으로 키르쿠스 경기를 주최해 성공할 당시, 티베리우스는 황실의 이름으로 성공리에 경기를 주최한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얼굴이 도안된 화폐를 주조해 두 사람과 카이사르 가문을 홍보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지역과 달리 오리엔트 정책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는 과거 아우구스투스가 황태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파르티아, 아르메니아, 유대 문제 해결을 맡긴 것처럼 자신의 황태자 게르마니쿠스에게 AD 17년 오리엔트 문제라는 군사, 외교적 중책을 맡겼다. 이때 드루수스 역시 아들이 수도에 머물면서 안락한 로마 생활에 벗어나길 바라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뜻과 오키덴트 정책의 일환으로 일리리쿰 총독으로 파견됐다.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차차기 황제’로 확정된 형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제왕교육을 받은 드루수스는 전쟁 이외의 실적이 뚜렷했다. 하지만 과거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그 역시 군무와 관련된 제왕교육을 뚜렷하게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파견 전까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남성 황족들의 군사적 업적과 각종 명예를 쌓는 무대로 여겨지던 게르마니아 일대를 판노니아 항명 사태 외에는 견습 형식의 군무 교육조차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말해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때부터 꾸준히 정치, 행정과 관련된 제왕교육을 받았고 실적도 뚜렷했지만, 정작 군무와 관련된 실적이나 경험이 현저히 부족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장래에 로마를 이끌어가야할 친아들이 익숙지 않은 군무를 익히고, 로마군 내에서의 인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라도 그를 과거부터 아우구스투스의 남성 황족들이 군사적 명예를 쌓았던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파견시켰다.
일리리쿰으로 파견된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라 3년간 도나우 강 방어선을 정비했으며, 새롭게 정비될 일리리쿰 일대의 판노니아 속주와 달마티아 속주의 행정 사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이때 그는 군사적 수단 외에도 자신의 외교적 역량과 그동안 배웠던 정치술을 통해 아르미니우스를 꾸준히 고립시켰다. 그가 파견될 당시, 로마는 이 일대에서 게르만족의 일파인 마르코만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당시 마르코만니족의 족장은 마로보두스였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서 유학한 까닭에 되도록 로마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반 로마 공동 연합 제안을 거절했는데, 결국 부족 내 강경파들의 반란으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따라서 마로보두스는 일리리쿰 총독인 드루수스와 로마 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드루수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라 마로보두스의 직접 개입 요청은 거부하되, 마로보두스와 그 가족들의 망명을 받아들여 이들을 이탈리아 내 도시 라벤나에 살게 했다. 이후 마로보두스를 반란으로 내쫓고 족장이 된 카투아르다스도 반란으로 쫓겨나자 드루수스는 그의 망명 역시 받아들여 그와 그 가족들이 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 포룸 율리에서 살도록 했다.

2.5. 게르마니쿠스의 사망과 황태자 등극


AD 17년에서 20년까지 3여년간 드루수스는 꾸준히 로마를 위협하던 아르미니우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담당해 성과를 이뤄냈다. 그 사이 AD 19년 10월 10일 안티오키아에 머물던 게르마니쿠스가 갑작스레 고열에 시달리다가 급사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본국 이탈리아로 급히 돌아와 사촌인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죽은 형 게르마니쿠스의 유해를 만나기 위해 테라치나까지 달려갔다. 테라치나에 미리 도착한 그는 클라우디우스, 원로원 의원 중 집정관을 포함한 국가 인사들과 함께 미망인이 된 대 아그리피나와 그 자녀들을 위로하고 유해와 함께 이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귀환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수도 로마에서 100km나 떨어진 테라치나까지 도나우 전선에서 말을 타고 달려가 다시 로마까지 귀환했고, 국장으로 열린 게르마니쿠스의 장례식을 총괄했다.
게르마니쿠스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두터웠던 드루수스는 불참한 티베리우스,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안토니아와 달리 장례식 내내 황실 대표로 국장을 치뤘으며, 추모 연설을 직접 낭독했다.[7] 얼마 안가 그의 아내 리빌라가 쌍둥이 아들들을 낳았는데 티베리우스는 아들 드루수스와 쌍둥이 손자들이 새겨진 화폐를 통해 아들의 가족들을 홍보했다. 드루수스의 일란성 쌍둥이 아들 중 한명은 일찍 사망했고 한명은 생존했는데 그가 바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이다. 한편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 사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내 두번째 연장자로서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었다.
일리리쿰에서 로마로 귀환한 다음해인 AD 21년, 드루수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뽑혔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확에 따라 게르마니쿠스와 파트너로 3년마다 집정관에 뽑혔는데, 이 해 처음으로 티베리우스의 파트너로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로마를 떠나 네아폴리스(나폴리) 근교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를 대신해 원로원 내 갈등을 제어하고 공공사업 업무를 담당했는데, 정치와 행정 모두에서 유능함을 선보였다. 특히 그는 공공사업에서 발생한 불필요한 비용의 원인을 찾아내고 수주 과정에서 발생한 부패를 찾아내 관료들의 부패와 도급업자들의 횡포를 처벌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난 다음해인 22년,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처음으로 부여받았는데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라 34살의 나이에 접어든 드루수스를 황태자로 확정지었다.

2.6. 사망


23년 9월 14일 건강하던 드루수스가 시름시름 앓더니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그는 세야누스와 대립 중이었다. 이 당시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의 아내인 리빌라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지 못했던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의 행동과 의도가 수상함을 느끼고 갈수록 세야누스를 신뢰하던 티베리우스에게 논리적으로 따지며 그를 중용하는 것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한편 세야누스 역시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드루수스가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노리는 자신의 유일한 걸림돌이라고 생각해 그를 견제했다. 따라서 드루수스와 세야누스는 서로 사이가 나빴다.
드루수스가 죽은 이후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은둔 정치를 펼쳤으며, 이때부터 세야누스 주도로 대대적인 고발이 빈발해 게르마니쿠스 일가와 그 측근 등이 연이어 반역죄로 고발됐다. 이때 드루수스의 장조카이자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 역시 세야누스에게 반역죄로 고발돼 유배지로 추방되었고, 드루수스의 둘째 조카인 드루수스 카이사르 역시 세야누스가 그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른 뒤 함정을 만들어 무고하는 방식으로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켰다. 이후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의 유일한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마저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 음모는 소 안토니아에 의해 저지되었다.[8]
드루수스가 죽은지 8년이 지난 31년, 세야누스의 아내 아피카타는 자신의 맏아들이 세야누스와 반역을 주동한 공범으로 처형되자 그 충격으로 자살하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드루수스의 아내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불륜관계였으며,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이 공모해 걸림돌인 드루수스에게 조금씩 독을 먹여 급사하게 만들었다고 폭로했다. 당시 카프리 섬에서 은둔정치를 펼치던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사후 세야누스가 리빌라와의 재혼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한 일을 거절했던 사실, 다른 문제에서 자신에게 정면으로 대들지 않던 아들이 꾸준히 논리적으로 세야누스의 문제점을 거론했던 사실 등을 상기한 뒤, 그 폭로가 사실이라고 결론내렸다.
외아들이자 합법적 후계자의 죽음에 관한 전모를 알아차리고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그때까지 아직 살아있던 세야누스의 어린 두 자녀뿐만 아니라 세야누스 가문 사람 전체와 그 노예들, 친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솔들을 남김없이 몰살시켰다. 또한 드루수스 암살 사건의 공범인 며느리 리빌라 역시 자살[9]토록 했다.

[1] 태어날 당시 본명[2]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양자가 된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함께 나란히 손자로 입적 후의 공식 이름. 본인 역시 모든 공문서, 사문서에 이 이름을 서명했고, 원로원 역시 그를 드루수스 카이사르라고 부름.[3] 소(小) 드루수스의 사촌인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경우, 어머니 소(小) 안토니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아그리파의 딸 빕사나아와 티베리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소(小) 드루수스는 혈연상 아우구스투스와는 남이었다.[4] 카스토르폴룩스.[5] 이 당시 그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원로원에게 부여받지 않아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고 불렸다.[6] 정확히 말하면, 게르마니쿠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수순을 밞고, 소 드루수스가 루키우스 카이사르 수순을 밞으며 포스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코스를 밞았다고 한다.[7] 당시 티베리우스는 장례식 불참 이유에 대해 게르마니쿠스의 친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아들의 요절에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 참여하지 못했고, 할머니인 리비아는 고령임에도 소 안토니아를 병간호하느라 참가하지 못했으며, 자신은 고령인 노모와 아들의 죽음으로 몸져누운 소 안토니아 모두를 간호하던 중이라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8] 이때 소 안토니아는 목숨을 걸고 티베리우스에게 상황을 전달해 세야누스의 위협에서 자신의 혈육들을 지켜낸 충성스러운 노예 팔라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유를 줬다. 따라서 팔라스는 해방노예로서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막내 아들 클라우디우스를 모셨는데, 클라우디우스는 훗날 황제가 된 뒤 영리한 팔라스를 재무장관에 임명해 크게 중용했다.[9]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리빌라를 그녀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보내, 소 안토니아가 방 안에 가둔 뒤 굶어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