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종

 



삼창(三昌)
밀창부원군
박승종
문창부원군
유희분
광창부원군
이이첨

<colbgcolor=#94153e> 제101대 영의정
퇴우당 박승종
退憂堂 朴承宗 | Park Seung-jong

성명
<colbgcolor=#ffffff>박승종(朴承宗)

효백(孝佰)

퇴우당(退憂堂)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562년
시호
숙민(肅愍)
붕당
[ 역대 소속 붕당 ]
小北]] (1599 - 1623)

사망
1623년
제101대 영의정
재임기간
제101대 영의정
1619년 3월 13일 ~ 1623년 3월 16일
군주
광해군
전임
제100대
정인홍
후임
제102대
이원익
1. 개요
2. 생애
2.1. 벼슬의 시작
2.2. 불운의 시작
2.3. 광해군 당시 정치 상황
2.4. 드디어 영의정
2.5. 이이첨과 극한 대립
2.6. 영의정 당시 대내 정책, 대외 정책
2.7. 대청 정책
3. 사극에서
4.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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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朴承宗 (1562년 ~ 1623년)
조선 중기의 문신 관료. 자는 효백(孝佰)이며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유일한 밀양 박씨 출신 정승으로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명종 당시 홍문관, 도승지, 대사헌, 관찰사, 판서 등을 역임한 박충원[1]의 증손자이고, 이와 똑같은 관직을 지낸 박계현[2]의 손자이며, 벼슬없이 한량으로 지낸[3] 박안세의 아들이다. 북인의 핵심 인물이나, 이이첨을 제외한 여타의 인물들이 모두 그렇듯 대중적 인지도는 전혀 없다. 사실 광해군의 며느리의 할아버지이고 광해군 말기 5년간 마지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라, 광해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다.

2. 생애



2.1. 벼슬의 시작


23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문명이 높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벼슬길[4]이 그러하였듯이 봉교(奉校. 왕의 칙서를 기록), 지제교(知製敎. 왕이 내리는 교서 초안) 등으로 벼슬을 시작하는데, 정여립의 절친인 이진길(李震吉)을 사관으로 추천한 죄로 한 번 짤리나 곧 복직되고 대사간,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으로 별탈 없이 승진한다. 애초 명론과 교격(矯激 : 글과 말을 과하게 화려하게 쓰는 것)을 싫어하는 가풍 탓도 있어 북인에 속하게 되는데, 애초 정치색이 크게 없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심지어 생전에는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 이귀하고도 은근히 친했다.[5]

2.2. 불운의 시작


북인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으로 갈리고, 소북은 또 강경 지지파인 유영경의 탁소북, 온건 지지파인 남이공의 청소북으로 갈리게 되는데, 이 때는 또 탁소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선조 사망 직후 탁소북 내에서도 광해군을 몰아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이들이 많아 탁소북은 그냥 자멸하게 되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의 처남이자 청소북 소속인 유희분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광해군 정권은 이이첨이 중심이 된 대북보다는 소북과 남인의 연합 정권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해군의 세자빈 책봉이 이루어지는데, 대북과 소북의 타협 속에서 그나마 온건파인 박승종의 손녀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게 된다.

2.3. 광해군 당시 정치 상황


임진왜란에 따른 전후 복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상황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영의정은 광해군 즉위 후에는 유영경(소북)이 유임되었으나 대북세력에 의해 탄핵된 뒤 이원익(남인),[6] 이덕형(남인)[7]으로 이어지고, 좌의정은 허욱(소북)과 기자헌(대북) 등 북인계열이었다가 이항복(서인)과 이덕형(남인)인 상황에서 대북은 이들의 집권 내내 극심한 공격을 가한다. 그리고 우의정은 한응인(서인)이었다가 심희수(남인), 이항복(서인)이었으나 봉산옥사 이후 정인홍(대북)이 우의정을 차지하게 된다. 결국 광해군 5년에는 인목왕후의 폐위 문제로 이들은 순차로 사직, 탄핵된다.
그 다음 영의정은 기자헌(대북), 좌의정은 정인홍[8](대북), 우의정은 정창연(대북)인데, 문제는 기자헌이 대사헌 때 정여립 모반 사건에 관련된 서인을 모조리 탄핵하고, 좌의정 때 선조광해군 세자 폐위를 극렬하게 반대한 대북임에도 정작 인목왕후의 폐모론은 물론 영창대군의 피살까지도 심했다 여겨 반대한 온건책을 냈다. 후에 기자헌은 박승종, 유몽인과 함께 대북 내에서도 폐모살제를 반대한 온건파인 중북으로 분류된다. 또한 정창연은 우의정에 재임 중에 대북세력의 횡포에 반발하면서 사직을 하고 다음 우의정은 한효순(대북)이 되는데 한효순은 이이첨에게 영합해 폐모론에 참여하였다.[9]
결국 대북 강경파의 극렬한 공격을 못 버티고 3년만에 정권이 갈린다. 기자헌이 탄핵당하면서 영의정에 정인홍(대북), 좌의정에 정창연(대북)이 앉지만 정창연이 인목왕후 폐위에 반발하여 사직하면서 좌의정에 한효순(대북), 우의정에 민몽룡(대북)이 앉게 되면서 완전한 대북 정권이 수립되지만 대북 정권의 횡포에 반발하는 이들이 늘면서 좌의정에 다시 민몽룡(대북)이 앉고, 우의정에 박승종(소북)이 오르면서 박승종은 정승 직에 오르게 된다. 그 뒤 다시 좌의정에 박승종(소북), 우의정에 박홍구(소북)가 오르면서 이이첨 세력의 세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2.4. 드디어 영의정


결국 영의정은 박승종이 되는데, 사람들은 광창부원군 이이첨(李爾瞻 1560년 ~ 1623년, 예조 판서 겸 대제학), 밀창 부원군 박승종(朴承宗, 1562년 ~ 1623년, 대제학을 거쳐 정승), 문창부원군 유희분(柳希奮 1564년 ~ 1623년, 대사간, 도승지)을 묶어 "삼창"이라고 부르니 일단 이이첨의 일파로 분류된다. 실제 맏아들인 박자흥이 이이첨의 딸과 혼인하여 이이첨과 사돈이기도 했다.
광해군이이첨의 사돈인 박승종이 영의정이 되니, 대북은 이제 잘 될 줄 알았다. 출신이 탁소북이라 좀 찝찝하긴 한데, 그 동안 행보가 타인과 다툼을 싫어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니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때도 그냥 조용히 있을 줄 알았다. 박승종은 심지어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될 때도 "반드시 은퇴한 명신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다였다.

2.5. 이이첨과 극한 대립


다 물러나고 혼자만 남으니 박승종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데, 항상 오리 알만한 비상을 품고, 대북이 싫다며 대문을 외문이라고 부르며 인목왕후 폐위 및 더 이상의 옥사는 없다며 이이첨과 극한 대립을 선포한다. 애초 정치적 입지가 불안하였던 광해군 14년에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윤인 등이 인목왕후를 죽이려고 한 것을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막은 적이 있던 터이라 자신들의 가솔을 데리고 교대로 인목왕후가 기거하던 서궁에 변란이 없는지 보살피도록 한다. 더불어 기존에 계축옥사, 해주옥사[10] 등이 반복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옥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변은 철저히 조사하여 무죄 방면한다.

2.6. 영의정 당시 대내 정책, 대외 정책


대북의 업적으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뽑는데, 공식 기록에는 의외로 대북 관련 관료들은 "청나라(후금)와 한판 뜨자"는 의견[11]이 많았다. 당시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지지하던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강홍립이 광해군 11년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도 이러한 입장은 계속되었고, 심지어 비변사의 입장 역시 초반에는 강경일변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단 영의정이었던 박승종이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인 모문룡을 절대 내륙으로 들이지 말 것, 이미 도착한 후금의 국서는 정식 국서를 보내어 답할 것, 이후 후금에서 사신이나 국서를 보내오면 국경 지대 고위층 관료들이 즉시 후금으로 넘어가 답례하도록 할 것(그래야 정식 국서를 안 남길 수 있으니),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는 후금의 정탐 목적 때문에 이들이 후금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말해 놓을 것 등을 주장하였고, 비변사가 광해군께 이를 보고하니 광해군은 이를 따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게 과연 광해군이 중립 외교를 생각하고 박승종을 시켜 이를 공론으로 내놓게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박승종이 중립 외교를 생각하고 광해군이 이에 따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들 생각보다는 중립 외교라는 것이 대북 내에서도 인기가 정말로 없었다.
대체로 집에서 술만 먹고 놀다가, 이이첨이 서궁을 급습하려거나 옥사를 기획하여 선비들을 떼죽음시키려 하는 조짐이 보이면 부리나케 관청에 나와 풀어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이이첨은 이후 자기의 사돈 겸 광해군의 사돈인 박승종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손발이 묶인 상태가 된다. 이 때 또 의외로 이 시기에 남인, 서인 계열이 외직 겸 하급 관직을 많이 제수받는데 문제는 이들이 인조반정의 주축이 된다.

2.7. 대청 정책


사르후 전투 이전부터 후금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사람이다.[12] 주요 대책은 국경 지대에 쫙 깔린 성과 진에 병사를 흩어 놓지 말고 그 중 요충지를 골라 병사와 병졸을 모으고 대비하자였다. 광해군 집권 초기 병조판서이기도 했고, 광해군일기에는 사관이 병조판서로 일한 적이 있어 병졸들의 신망이 높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르후 전투로 병사들이 모조리 녹아내리자 "새로 군사를 뽑아 훈련시키기보다는 각도의 정예병을 한 곳에 모아 즉시 주둔지를 만들고 훈련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광해군과 함께 정충신, 남이흥, 장만, 정준 등 당시 유명한 무장들을 국경지대에 열심히 깔았다. 이괄인조반정 직전에 함경도 병마절제사로 임명이 끝난 자[13]인데 국경 지대에 안가고 생까다가 인조반정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국경지대 무장들로 하여금 후금에 사신 혹은 밀사로 자주 다녀오게 했고, 명나라에 들키면 "염탐 및 적진을 살필 목적 등도 있다"고 잘 설명하라고 지시한다.
광해군과 박승종이 국경 지대에 열심히 심어놓은 국경지대 고위층 관료들은 인조반정 직후 모조리 갈린다. 후금과 내통하는 프락치라고 죽은 사람도 많다. 실제 프락치는 맞긴 하다. 명나라 몰래 "우린 너희랑 싸울 생각이 없다"는 국서를 열심히 보냈으니. 이괄도 부원수로 부임하고 나서는 막상 이들이 없어 곤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나마 남은 무인들도 이괄의 난 때 한 차례 더 갈리는데, 인조반정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도 이괄의 난에 함께 참여하였다가 죽는다. 광해군 때 출세했던 사람들인 만큼 애초 북인 출신이 많기는 했다.
덕분에 살아남은 무장은 서인 계열이었던 정충신, 사위가 인조반정에 참가한 최명길이었던 장만,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남이흥 정도인데 이들은 이후 죽을 고생을 하여 정묘호란을 그럭저럭 넘긴다. 나중에 벌어지는 병자호란은 이들의 은퇴 및 사망 트리로 다들 알다시피 대참사.[14]

2.8. 인조반정 전후


박승종도 인조반정 때 손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 당시 한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던 훈련대장은 심복이었던 이흥립을 뽑아 놓았고, 경기감사도 본인의 맏아들이었던 박자흥[15]이었다.
이이반과 김신국이[16] 인조반정 전날 저녁 이후배, 이후원이라는 자로부터 인조반정 사실을 듣게 되고 바로 고변하자, 박승종은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여 이후배를 궁궐 마당에 포박하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광해군이 이때 김자점에 매수된 후궁과 잔치를 벌이던 참이라 이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박승종은 이흥립을 불러 '너 혹시 김류, 이귀하고 함께 모반하려고 하냐?'라고 물어보았는데, 이흥립이 '제가 딴 사람도 아니고 공을 배반하겠나이까.'라고 하자 그 말을 믿고 만다. 이흥립은 나중에 인조반정 공신 목록에서 1등 공신을 받는다. 심지어 이흥립의 사위 장신이라는 자는 이흥립을 추천하였다는 공으로 3등 공신을 받게 된다. [17]
결국 다음 날 새벽 2시 드디어 인조반정이 벌어지는데, 경황 중에 겨우 몸을 내뺀 광해군의 첫 마디는 '이이첨이 그랬느냐?' 였다.
박승종 역시 손만 놓고 있던 건 아니어서, 맏아들인 경기감사 박자흥에게 "낌새가 이상하니 준비하라"고 했다. 인조반정이 벌어지자 박자흥은 재빨리 경기감사의 직위로 수원부사 조유도에게 "군대를 이끌고 즉시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하였고, 당시 5촌 당숙이었던 양주목사 박안례에게도 "병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거병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인조반정 당일 이미 병사들이 한양으로 부리나케 뛰고 있었다고 한다. 파주목사 윤정에게도 "병사들을 모집해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했는데 여기는 소식이 늦게 도착해서 병사들을 출병하지 못했다. 당시 반정군 측에서는 수원부사인 조유도는 인조반정에 참가한 조정의 아들이라 조정이 직접 설득하기로 하고,[18] 양주목사 박안례가 이끄는 군대는 이서가 군대를 이끌고 막기로 한다.
그런데 "궁궐이 완전 점령되고 이미 임금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자 박승종은 양주목사인 박안례에게 "이미 임금이 바뀌었으니 더 이상 피를 보지 말라"는 편지를 1통 써서 보내고, 둘째 아들인 영광군수 박자응에게는 "너는 자결하지 말고 살아남아 제사를 지내라"는 편지를 1통 써서 보내고, 맏아들인 경기감사 박자흥에게는 "다 끝났으니 즉시 병사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인편을 보낸 후 박자흥과 함께 자결한다.[19]

3. 사극에서



4. 그 외


김류이귀는 막상 인조반정 당일 광창 부원군 이이첨, 밀창 부원군 박승종, 문창 부원군 유희분 소위 삼창이라고 불리는 자들 중에서 박승종이 인목왕후 폐출을 반대했고 같은 반정공신인 이서(李曙)가 박승종의 친족이니 박승종을 살려주자고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20][21] 실제로 박승종에게 호응하여 군대를 일으킨 박안례도 그날 그냥 풀어주었고, 박승종의 동생들은 형하고 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박승종의 둘째 아들인 박자응은 유배 다녀온 후 박승종의 동생인 박승조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 사이에서 '박승종을 살려주자'고 합의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박승종은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승종과 함께 폐모론을 반대한 유희분을 이귀, 김류 등 반정공신들이 살려주자고 인조에게 청했지만 인조는 반정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유희분을 아우 유희발 및 소북의 수괴들을 처형해 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인조는 박승종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걸 보면, 박승종 역시 유희분처럼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승종의 직전 영의정이었던 기자헌[22]은 박승종과 비슷하게 인목왕후 폐출, 다른 당색을 가진 정치인들의 옥사에 반대하였던 인물이고 정치에서는 은퇴한지 10년이 다 되가는 터라 인조반정 당시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인조는 이괄의 난 발생 직후 기자헌의 일가족을 젖먹이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도륙하였다.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고, "기자헌 본인이 자결하겠다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냐"는 의견도 많았는데, 인조가 모두 다 죽였다. 이원익이귀가 3년 후에 모조리 복권시켜 주키는 한다. 이는 나중에 소현세자 사후 소현세자의 아내 민회빈 강씨를 죽인 일과 함께 계속 까였는 바, 그 여파로 인조는 시호를 인조(仁祖)로 받게 된다. 이걸 보면 박승종이 인조가 어떤 놈인지 미리 알고 자결한 것 같기도 하다.
박승종의 복권 건의는 이후 꾸준히 이어왔는데, 이게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 같은 놈"은 너무 심한 욕[23]이라 적당히(?) "삼창 같은 놈", "유희분, 박승종[24]같은 놈"이라는 말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상소가 곧잘 있어 왔기 때문이었다. 잘 찾아보면 신하들이 서로 비난할 때는 "삼창 같은 놈", 혹은 "유희분, 박승종 같은 놈"이라고 디스할 때가 많았고, 반면 임금이나 정권을 비난할 때는 "이이첨, 정인홍이 날뛰는 시대와 같다"고 디스할 때가 많았다.
결국 철종에서야 다시 영의정으로 복권되고, 흥선대원군 때 정책적으로 북인, 남인 출신을 등용하기 위해서 대거 사면이 이루어지면서 이미 복권이 이루어진 박승종에게는 숙민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1] 강원도 영월군에서 관리들이 족족 죽어나가는 일이 있자 박충원을 미워한 윤원형의 심복 임백령이라는 사람이 박충원을 영월군수로 좌천 보내었는데, 단종의 묘소를 가꾸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제문을 지어 위로하여 곱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2]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三上(중상보다 딱 한 단계 더 높은 점수)을 받자 임금과 대신들이 박충원의 아들이라 평소 글 솜씨가 뛰어난 자이고 위 답안도 아주 우수한데 그날 시험관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채점이 개판이었다고 깐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아버지와 함께 공문서 작성에는 유능하기로 명성이 있던 자였다.[3] 나중에 받은 지돈영부사는 증손녀가 세자빈이 되면서 명예직으로 받았다.[4] 이들의 조선왕조실록 졸기에는 "글을 잘 썼다"는 평가가 기재되어 있다.[5] 실제로 김류, 이귀 등은 유희분을 비롯한 소북 계열에 대해서는 관용을 청했으나 인조가 처형을 강력하게 주장한 탓에 처형되었다.[6]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영 이상하게 남인이 되었다. 본래 본인은 당색이 그다지 없었으나 스승인 이준경이 율곡 이이를 엄청 깐 탓에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남인 주류인 퇴계 이황의 제자들과도 학맥이 완전히 다르고, 스승의 가르침으로 이황의 제자들과도 교류가 없었다. 외직으로 밀려난 이원익을 번번히 중앙 요직으로 임명하여 출세길을 열어준 것은 막상 이이였다는 것이 또 개그. 사실 이원익은 성격이 원만하고 모두와 두루 친해 적이 없었고, 류성룡과 친하게 지내 남인 취급을 받았다. 류성룡, 이덕형 실각 후 사망하자 딱히 남인의 중심이 되줄 사람이 없고 그만큼 오래 살은 이원익이 자동적으로 남인의 구심점이자 원로가 된 것이다.[7]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장인은 북인의 대부 이산해, 절친은 서인 계열의 이항복이었다. 심지어 이산해의 연줄로 정인홍 밑에서 배운 적도 있다. 먼 친척이지만 이이첨과도 같은 가문 사람이기도 하다. 왜 남인인지 이해 불가. 다만 상대적으로 북인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보였고, 분당 초기라 남인으로 여겨진다. 또한 당시까지는 당색이 달라도 서로 친교를 맺고 양가 집안끼리 혼인을 하기도 하는 등 크게 척을 지진 않았다. 흔히 서로 얼굴보기 싫어 병풍치고 상대 당파 구성원보고 이놈저놈 욕하고 죽이려고 벼르는 것은 잦은 환국으로 붕당 질서가 파괴되는 숙종 이후부터다.[8] 좌의정이긴 했는데 편지만 보내고 한양에는 안 왔다. 생각보다 좌의정은 오래 했다.[9] 다만 광해군일기의 기록에 남인의 괴수라고 대북파에게 공격받고, 인조실록의 기록에 사나운 아내에게 쥐어 살면서 처남 강수(姜𢢝)의 협박을 받아 폐모하자는 논의를 눈물을 흘리면서 따랐고, 정조실록의 기록에 한찬남(韓纘男)이나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게 비교한다면 조금 차이는 있었다고 평가되는 걸 보면, 폐모론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10] 해주옥사 때 소북이 엄청나게 제거되기는 했다.[11] 대북은 원래 성격이 강경파 소장 관료라는 사실을 명심하자.[12]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여진족누르하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조선 조정에서는 일선 야전지휘관들을 통해 꾸준히 그들의 동태를 보고 받았다.[13] 이전에는 제주목사였다. 향후 전망을 보아 승진시킨 것이라고 되어 있다. 당시로는 오지에 가까웠단 제주도에 짱박혀 있던 이괄을 부른 것은 결국 광해군에게나 인조에게나 대재앙이 된다.[14] 그나마 장만은 본래 문관이어서 무에 능하지 못 했다. 그 탓에 후에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 때 미흡한 대처로 욕을 많이 먹었다. 남이흥은 정묘호란 당시 분전 끝에 전사했고, 정충신은 능력에 비해 상부에 미움을 받아 한직을 전전하다가 쓸쓸히 죽고 만다.[15] 박자흥은 경기감사가 되기 직전 벼슬이 대사성(성균관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는데,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담당한다. 비변사에서 "병조판서도 아닌 사람이 왜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하냐"고 대차게 깐 기록이 있다.[16] 이이반은 인조반정 직후 참살되고, 김신국은 폐모론에 소극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재등용된다.[17] 장신은 반정의 일원인 형 장유의 덕을 입은 것도 크다. 후에 병자호란 때 김경징과 함께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으나 실패하고 그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18] 얄궂게도 조유도는 유희분의 사위이자, 폐모론에 동조한 사람이었다. 성정이 거칠어 당시에도 평이 안 좋았고, 모반 사건에 연루돼 귀양을 가 생을 마쳤다.[19] 상술했듯이 박승종은 여차하면 자결하려고 비상을 항시 소지했는데, 급히 도망친 터라 비상을 잃어버린 후였다. 결국 노끈으로 충직한 하인을 시켜 목을 메 자살했다. 반대로 연산군 때 윤필상은 제때 비상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목을 메 고통스레 죽었다.[20] 그러나 반정 세력의 립서비스일 수도 있다. 일찍이 중종반정 당시 중종의 장인 신수근도 반정 세력에 권유를 받았으나 반대했다고 살해당했다. 게다가 박승종은 손녀가 폐세자 이지의 빈이었고, 이 부부는 귀양지에서 땅굴을 파다가 들통이 나 폐세자는 처형당하고 세자빈은 자결했다. 살아있어도 이 일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을 공산이 크다. [21] 게다가 설령 반정공신들의 "박승종을 살려주자"는 의견이 립서비스가 아니었더라도, 박승종은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인조가 박승종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박승종을 처형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귀김류에게, 인조는 "박승종이 이이첨과 뭐가 다르냐"며 박승종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귀, 김류가 이서에게 "박승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하자 인조는 "처음에 약속했을지 몰라도, 법을 굽힐 수는 없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22] 대북이긴 한데 기대승과 친척이다. 정확히는 형인 기진의 아들이 기대승이고, 동생인 기준의 증손자가 기자헌이다. 기대승이황과 사단칠정론을 벌인 대학자로 이는 나중에 서인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할아버지인 기대항은 1563년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의 지시를 받고 사헌부의 죄상을 모조리 탄핵한 적이 있던 사람이다. 의외로 붕당 초기에는 서로 족보가 꼬이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윤두수는 무려 이황의 대제자이다.[23] 이이첨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상대방이 적당히(?) 싫을 때 멸문지화를 당해야 할 놈이라는 욕을 쓰기에는 많이 곤란했다.[24] 삼창은 곧 탐욕스러운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찍혔는데, 막상 박승종이나 박자흥이 매관매직이나 비리를 저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둘 다 선덕비까지 받았다. 박자흥이 수원부사를 지낼 때에는 임기가 다 되자 그 지역 사람들은 "1년 더 냅두면 안 되냐"는 상소까지 올린 기록도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고, 살아남은 일가 친척들은 모두 이들이 고을 수령으로 지냈던 동네 중 하나를 골라 뿔뿔히 흩어졌다. 이 집안은 징크스인지 박충원부터 박자흥까지 모두 외직에서는 지방민으로부터 평판이 좋았고, 내직에서는 어이없는 큰 실수를 한두 번씩 해서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재미있는 실수들이 많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진상품 잃어버리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