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스미스

 

'''이름'''
스티븐 딜라노 스미스
(Steven Delano Smith)
'''생년월일'''
1969년 3월 31일
'''출신지'''
미국 미시간 주 하이랜드 파크
'''키'''
203cm (6 ft 8 in)
'''체중'''
100kg (221 lb)
'''출신학교'''
미시간 주립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드래프트'''
1991년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마이애미 히트 지명
'''등번호'''
3, 8
'''역대 소속팀'''
마이애미 히트 (1991~1994)
애틀란타 호크스 (1994-1999)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99-2001)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1-2003)
뉴올리언스 호네츠[1] (2003-2004)
샬럿 밥캣츠[2] (2004-2005)
마이애미 히트 (2005)
'''수상내역'''
NBA All-Star (1998)
All-NBA Rookie Team (1992)
NBA Sportsmanship Award (2002)
NBA Shooting Stars Champion (2011)
NBA Champion (2003)
올림픽 금메달 (2000)
'''별명'''
스미티(Smitty)[3]
[image]
'''2003'''

1. 소개


NBA 농구 선수이며 현 NBA TV Studio 해설자. Open Court의 고정 멤버로 찰스 바클리, 케니 스미스 등과 함께 매우 자주 볼 수 있는 인물이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번 올스타로 선정된 적도 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걸고 말년에 우승도 한 번 하는 등 은근히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한 선수이다.

2. 선수 생활



2.1. 대학 경력


미시간 주립대를 나왔으며 4년간 학교를 다니며 대학 농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미시간 주립대의 역사상 가장 최다득점자이며, 어시스트와 리바운드에서도 상위를 기록하였다. 미시간 주립대를 마친후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2.2. 마이애미 히트


1991년 1라운드 5순위로 마이애미 히트에 의해 선택된다. 그 당시 마이애미는 창립된지 얼마 안된 팀으로 글랙 라이스, 브라이언 쇼우 등 젊은 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해부터 59경기를 선발로 뛰었으며 12득점에 4.6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상대가 그 분이라 스윕패 당했다. 다음해에는 평득점 16점을 올렸으나 부상도 있고 해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그리고 93-94해에는 평균 17.3점과 5.1어시스트를 달성하며 활약한다. 그 해 처음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에 승리를 거두는데 이게 마이애미의 첫 플레이오프 시리즈 승리. 하지만 그는 다음해에 애틀란타로 트레이드 된다.

2.3. 애틀란타 호크스


애틀란타로 트레이드 된 그는 마이애미 시절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게 된다. 첫해에는 인디애나에게 졌지만 다음해에는 평균 18득점을 올리며 발전하였고, 무키 블래일락과 함께 준수한 가드진을 구성하며 성장하였다. 이번에는 인디애나를 꺾지만 올랜도에게 패한다. 스티브는 21.7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다음해에 그는 처음으로 평균 득점 20점을 넘게 기록하며 호크스의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디켐베 무톰보와 함께 호크스를 상위권으로 등극시키나 동부 지구 준결승전에서 만난 상대가 다시 그 분(...) 또 패배한다. 1998시즌에는 다시 20득점을 넘게 하며 올스타에도 처음으로 선정되나 샬럿 호네츠에 실망스럽게 패배하면서 또 한번 좌절을 겪게된다. 파업으로 인해 50경기로 줄어든 1998-1999 시즌, 전해보다는 성적이 떨어졌지만 무난히 플레이오프에 안착했고 순조롭게 가는가 했더니 '''8시드의 기적'''을 만들어낸 뉴욕 닉스를 만나서 다시 준결승 전에서 패한다. 그 후 애틀란타는 그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한다.

2.4.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그 당시 포틀랜드는 구단주가 우승을 위해서 많은 돈을 들인탓에 꽤 괜찮은 우승 후보로 성장해 있었다. 스카티 피펜도 합류한 상태였고, 후에 피스톤즈에서 우승하는 래쉬드 왈라스 역시 있었기 때문에 우승을 노려볼 만한 상황. 하지만 이때는 레이커스 왕조의 시대(...). 서부 지구 결승전에 3-1로 뒤진 상황에서 5차전 6차전을 연속으로 이기며 7차전까지 이끌어낸다. 이때 스미스는 6처전에서 26득점을 기록했다. 7차전에서 포틀랜드는 4쿼터 전에 여유있게 15점을 앞서고 있었으나 각성한 샤크코비에게 탈탈 털리며[4] 거짓말 같이 패하며 다시 우승에 실패한다.
하지만 그 해에 스미스는 미국 국가 대표로 선정되었고 2000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달성한다.
그 다음해인 2000-2001에는 팀이 부상, 불화 등의 문제를 겪게 되었고 플옵에서 다시 레이커스에게 무너지는 수모를 겪는다. 시즌이 끝나고 그는 스티브 커 그리고 데렉 앤더슨과 맞교환 되어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트레이드 된다.

2.5. 샌안토니오 스퍼스


이미 팀 던컨데이비드 로빈슨이 버티고 있었기에 큰 부담없이 팀의 슈팅가드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원수같은 LA 레이커스에 패하게 되어 플옵에서 탈락한다.
그 다음해는 로빈슨이 마지막 해라고 선언한 해. 토니 파커와 스티븐 잭슨이 성장하고 마누 지노빌리 역시 치고 올라오는 사이 그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어 벤치 멤버로 뛰기 시작하는데 부상까지 겹치며 데뷔 이후 처음 두자리수 득점에 실패한다. 플옵에서도 크게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애 그렇게 원하던 우승을 하며 드디어 반지를 낄 수 있게 되었다.[5] 우승 후에 자유계약선수가 된 스티브는 뉴올리언스 호네츠와 계약한다.

2.6. 뉴올리언스 호네츠


큰 활약은 하지 않았고 벤치 멤버로 뛰었다. 아직까지 이때는 뉴올리언스가 동부지구에 있었기에 마이애미 히트와 플레어프에서 맞닦드리는데 7차전에서 삼점슛 다섯개를 포함한 25득점을 올리나 결국 패배한다. 다시 자유계약선수가 된 그는 샬럿 밥캣츠와 계약한다.

3. 선수 생활 이후


은퇴 이후에 애틀란타 호크스에서 해설가로 활약했고 2008년부터는 NBA TV에 취직하여 현재까지 해설가로 뛰고 있다. NBA Open Court에서도 오랜기간 패널로 활약했는데, 바클리, 케니, 샤킬, 그리고 레지 밀러에 비하면 점잖은 스타일이다. 언급한 넷이 깐죽대면서도 장난을 많이 치는 스타일이면 스티브는 주로 저들의 공격을 차분하게 받아내며 해설하는 스타일.

4. 플레이 스타일


그의 별명이 들어가는 'The Smitty'[6]라는 기술의 대가로 한마디로 동포지션 대비 큰키를 이용한[7] 포스트업도 잘걸고 돌파도 잘하고 슈팅도 좋은 만능선수이긴 하지만 수상경력이 올루키에 올스타 한번밖에 안되는 2% 아쉬운 선수 였다.
[1]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였던 조지 신과 샬럿 도시와의 문제가 있게 되자 연고지를 뉴올린스로 옮겼다. 자세한건 샬럿 호네츠 참고[2] 자세한 건 샬럿 호네츠 참고[3]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NBA Open Court에서 동료들이 그를 부를 때 이렇게 부른다. 스티브 커와 이름이 같기도 했고 해서 불렀다.[4] 후에 오닐은 두고두고 스티브를 놀린다. 그냥 웃어넘기는 스티브가 대인배[5] 여담으로 맞트레이드 되었던 스티브 커 역시 2003년에 합류하여 마지막 5번째 반지를 손에 넣는다.[6] 일대 일시 정면이 아닌 반쯤 돌아 서서 돌파할지, 포스트업 걸지, 이지 선다 거는 기술이다.[7] 6.7피트로 키로 따지면 스몰 포워드급이다. 동포지션중 키가 비슷한 선수는 레지밀러 밖에 없을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