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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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선수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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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NBA on TNT 경기 해설자로 활동 중이다.'''[1]
''' 인디애나 페이서스 No.31 '''
'''레지널드 웨인 밀러
(Reginald Wayne Miller)'''
'''생년월일'''
1965년 8월 24일 (58세)
'''신장'''
201cm
'''체중'''
88kg
'''드래프트'''
'''1987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1순위
인디애나 페이서스 지명'''
'''포지션'''
슈팅 가드
'''등번호'''
'''31번'''
'''역대 소속팀'''
'''인디애나 페이서스 (1987~2005)'''
'''수상경력'''
올-NBA 서드 팀 3회 (1995, 1996, 1998)
NBA 올스타 5회 (1990, 1995, 1996, 1998, 2000)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2)'''
'''인디애나 페이서스 영구결번'''
No. 3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레지 밀러'''
헌액 연도
2012년
1. 소개
2. 스포츠 엄친아 집안
3. 대학 시절
4. NBA 커리어
5. 플레이 스타일
6. 플레이오프 역사 및 은퇴
6.1. 1990
6.2. 1991
6.3. 1992
6.4. 1993
6.5. 1994
6.6. 1995
6.7. 1996
6.8. 1997
6.9. 1998
6.10. 1999
6.11. 2000
6.12. 2002
6.13. 2003
6.14. 2004
7. 영상
8. 이것저것
9. 관련 문서


1. 소개


'''THE KNICK KILLER[2]'''

'''"왕은 왕국을 버리지 않는다."'''

''a king should never leave his kingdom''

전 NBA 선수. '''18년'''동안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만 뛴,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 레이 앨런 이전 최고의 3점 슈터. 본명은 레지널드 웨인 밀러지만, 보통 레지 밀러(Reggie Miller)라고 부른다.

2. 스포츠 엄친아 집안


레지 밀러는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엉덩이뼈 쪽이 기형이어서 4살때까지 보조기를 차야했다. 보조기를 뗀 후에는 농구의 매력에 빠져 늘 1살 누나인 셰릴과 1대1 시합을 했다고. 참고로 밀러의 형 대럴은 메이저리그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포수로 뛰었고, 여동생인 타미는 배구선수, 그리고 그의 누나 셰릴은 미국 여자농구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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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밀러는 신장 188cm의 센터로 고등학교 시절 한 경기에서 '''105점'''을 넣은 기록도 있으며[3] 여자농구 명문 USC에서 뛰었고 84년 LA올림픽 미국 여자농구 금메달리스트이며, 농구 독립리그인 USBL(남자리그)에 여자선수로서 드래프트 지명을 받는 등 199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농구 스타이자, 여자농구 올타임 베스트 플레이어에도 10위권 내에 들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는 여자 농구의 전설 of 레전드.[4]
누나와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임에도 레지는 장애로 신체조건이 불리했던데다, 누나와 1대1 시합을 하면 아무리 돌파를 잘 해도 쫓아온 누나에게 블록 슛을 먹었는데 하도 당하다 보니 누나를 1대 1로 상대할 때 멀리서 최대한 빠른 타이밍에 슛을 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잡자마자 바로 던지는 광속의 릴리스 타이밍을 유지하는 슈팅폼을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슈팅폼은 정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슈팅 후 양팔이 크로스되는 특이한 모션으로, 다른 선수보다 공에 스핀이 별로 안 들어간다. 릴리스가 매우 빨라서 팔꿈치가 펴지는 것과 동시에 공이 날아가며, 슬로우 모션으로 보지 않으면 손목 스냅이 잘 안 보인다. 그런 퀵릴리스에 특화된 폼에 근육이 잘 붙지 않던 체질 때문에 한창 마이클 조던의 영향으로 힘과 기술을 고루 갖춘 스윙맨들이 등장하던 무렵 역으로 드리블링이나 몸싸움을 이용한 포스트업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경기 내내 오프 더 볼 무브로 주야장천 뛰어다니다 중요한 순간 갑툭튀해 3점슛을 넣는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사실 셰릴 밀러가 워낙에 전설이라 대학 시절과 프로 초기까지는 그녀의 명성이 레지를 압도했다. 이 때문에 UCLA시절에 아직 거물이 아니었던 레지를 조롱하기 위해 원정팀 관중들이 다 같이 "셰~릴! 셰~릴!"을 연호하기도 했다고 한다. NCAA 토너먼트 32강이 최고성적이던 밀러는 대학시절 내내 누나와 비교되며 폄훼됐으며, 이는 그가 NBA에서 스타급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물론 현재는 레지가 훨씬 더 유명하다. 셰릴 본인도 "예전에는 레지가 제 동생으로 알려졌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레지 누나로 알려졌다"고 할 정도. 물론 워낙 동생 사랑이 유명한 분이라 뿌듯하게 말했다. 선수레벨로 따지면 셰릴은 조던이나 매직급이지만, 여자농구 자체가 남자농구에 비해 넘사벽으로 안 유명하고 돈도 적게 받기 때문에(wnba 최고 수익을 올리는 연봉이 20만 달러가 안된다. Nba최소연봉에도 못 미치는 수치) 여자농구의 레전드라도 극소수의 몇 명 아니면 미국 대중들도 모른다. 심지어 밀러의 시절에는 WNBA조차 출범하기 전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아마추어 경력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밀러는 많이들 안다. 게다가 셰릴은 대학 졸업 후 해외의 여러 여자농구 리그에서 지명을 받고, 심지어 '''남자농구''' 하부리그인 USBL에서도 지명을 받았던 선수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프로진출을 포기하고 방송인[5]과 지도자 생활을 오가고 있다.
여담으로 비슷한 테크 (WNBA출범 이전 세대로 뛰어난 아마추어 선수->부상->방송인)를 탄 이가 바로 터너 스포츠의 사이드라인 리포트로 유명한 도리스 버크. 버크는 거물들 인터뷰할 때는 셰릴 밀러, 고 크렉 세이거, 데이비드 알드리지 아니면 이 분이 나올 정도로 나름 유명한 인물이며 NBA2K시리즈에도 나왔다.

3. 대학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농구명문인 UCLA에 입학한다.[6] 레지는 월트 해저드(1942~2011) 감독[7] 의 가르침을 받고 2학년때 팀을 NIT챔피언쉽에 이끌어 우승을 일궈냈고, 3학년때는 PAC-8(현 PAC-10)지구 정규시즌 우승도 이끌어냈다. 졸업을 앞두고는 카림 압둘 자바에 이어 학교 통산득점 2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NBA드래프트를 신청한다.

4. NBA 커리어


레지 밀러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데이비드 로빈슨, 아몬 길리엄, 데니스 홉슨, 레지 윌리엄스, 스카티 피펜, 케니 스미스, 케빈 존슨, 올덴 폴리니스, 데릭 매키, 호레이스 그랜트에 이어 전체 11순위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지명된다. 많은 인디애나 팬들은 인디애나에서 태어났고 인디애나 대학을 나온 홈타운 보이[8]인 슈팅 가드 스티브 알포드의 지명을 기대했기 때문에 밀러가 지명되자 심한 야유를 보냈고, 201cm 88kg라는 밀러의 깡마른 체격은 거친 NBA에서 살아남기엔 불안해보였기에 더욱 더. 그러나 페이서스의 선택이 옳았음은 곧 증명되었는데, 레지 밀러는 18년 동안 페이서스에 헌신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반면, 알포드는 2라운드 26위로 지명되어 4시즌간 백업선수로 이런저런 팀을 전전하다 은퇴하게 된다.
루키 시즌 밀러는 슈팅가드 존 롱의 백업으로 뛰었으며, 2년차부터 스타팅 멤버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계속 주전으로만 출전했다.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1976년부터 1986년까지 플레이오프에 2번 밖에 진출하지 못한 약체였으나, 밀러가 3년차 되던 해인 1989년부터 은퇴 시즌인 2004년까지 딱 한번(1996년)을 제외한 전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을 달성하며 오늘날까지 가지고 있는 '은근히 강팀'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컨퍼런스 파이널 5회, 파이널에 1회 진출했는데 결국 우승하지는 못했고 이는 밀러의 커리어에 가장 큰 한으로 남은 부분. 패트릭 유잉뉴욕 닉스에게 2번, 샤킬 오닐과 페니 하더웨이의 올랜도 매직에게 한번,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에게 한번,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L.A.레이커스에게 한번, 배드보이즈 2기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한번 가로막혔고 그 중 4-3 풀세트까지 가서 진게 3번, 4-2로 진게 3번이다.
레지 밀러는 NBA역사상 최초로 '''3점슈터로서 스타가 된 인물'''이다.[9] [10] 79~80시즌부터 NBA에 도입된 3점슛 제도는 초창기만 해도 3점슛 제도를 먼저 실시한 ABA에서 뛴 선수가 아니라면 매우 생소한 룰이었고 아직까지 기존 제도에 익숙했던 선수들이 농구의 절대 명제중 하나인 '''골대 가까이서 쏴라'''라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옵션이 아니었다. '''레지 밀러의 2년차 시즌인 88~89시즌에야''' 뉴욕 닉스가 최초로 팀 합계 1000개 이상을 시도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시도하기 전까지 8년간 NBA 팀 평균 3점슛 시도는 연간 300회 내외였다.(지금은 팀 평균 3점슛 시도는 1700회 가까이 되며, 전문 슈터들은 한시즌에 500회 이상은 던지며, 스테픈 커리는 400개를 '''성공'''시킨 적도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레지 밀러는 매년 300개 이상의 3점을 던지는 3점 전문슈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3점슈터로 평균득점 18~20점대를 기록하며 스타플레이어로 부상한다.
18년에 걸친 그의 커리어 통산 성적은 평균 18.2점 3.0리바운드 3.0어시스트, FG 47.1% 3P 39.5% FT 88.8%. 시즌 커리어 하이도 평균 24.6점(1989년)으로 보통 정규 시즌 19~20점의 평균 득점을 기록했고 꾸준하기는 했지만 슈퍼스타치고는 그렇게 고득점을 올리던 선수는 아니었다. 개인상 수상 실적도 전혀 없고 All-NBA 3rd팀에 3번. 올스타에 다섯번 선정된게 고작이다.[11][12] 한때 3점슛 시도/성공개수 NBA통산 1위였다가 이것도 레이 앨런에게 기록이 경신되면서 2위로 내려갔다. 이때문에 스탯과 수상실적을 위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과대평가된 선수'로 불리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13]
밀러가 역대 최고의 슈터 중 하나이자 레전드인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일단 가장 큰 이유는 플레이의 '''임팩트'''이다. 정규 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 특히 강했으며[14], 긴장감이 높고 중요한 순간일수록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자주 보여주었다. 정규 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서, 1/2/3쿼터보다 4쿼터에서, 점수차가 많이 나는 게임보다 시소게임에서 더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진정한 에이스. 어쩌다 몇번 그러면 그냥 뽀록인가보다 하겠지만 유명한 '''4쿼터에만 25점 넣어 역전승''', '''8.9초 동안 8점 넣어 역전승'''을 위시한 다수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다보니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이자 플레이오프 명장면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으며 동명의 맥주 광고에서 따온 '''밀러 타임'''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일전에 NBA감독을 대상으로 클러치 슛을 맡길만한 선수를 설문조사하였을 때 대부분의 감독들이 '''''역전승하는데 2점이 필요하면 마이클 조던에게, 3점이 필요하면 레지 밀러에게 슛을 맡기겠다'''''라고 답하였을 정도로 승부처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승부근성과 투지, 리더십은 동 시기의 마이클 조던에 비견될만 했으며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인디애나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 리더로서 한결같은 헌신을 보여주며 명예롭게 은퇴한 점 또한 높이 평가받는다.

5. 플레이 스타일


당대 최고의 오프볼 무브와 3점 슈팅을 자랑하던 선수. 다만 슈팅이 가진 능력의 전부일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15] 전체적으로 평균~평균보다 조금 큰 오각형 슈팅가드에서 3점슛 과 오프볼무브 능력을 주욱 높인 형태로 보는게 맞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48분 내내 하프코트 전체를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3점슛. 뉴욕 닉스의 전력분석 리포트가 공개된 적이 있는데, 레지 밀러에 대해서 '공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선수'라는 평이 있었다.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스크린을 타고 돌아다니며 순간적인 노마크 찬스를 만들고, 패스를 받아 빠르게 캐치앤슛을 날리는 오프 더 볼 무브(Off the ball move)는 역대 NBA 최고로 평가 받는다. 페이서스와 자주 붙었던 올랜도의 데니스 스캇은 오픈 코트에서 "스크린을 (한 게임당) 39번이나 타는[16] 레지를 내가 안 맡은건 참 다행이었다고 회술한 적도 있다. 슬램덩크의 또다른 3점 대마왕 신준섭이정환의 알고도 못막는 페네트레이션 이후 킥아웃으로 3점슛을 성공시키는 반면, 레지 밀러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팀 전략상 뛰어난 킥아웃 패스보다는 빅맨의 무한 스크린과 밀러의 운동량을 바탕으로 한 3점슛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산왕전에서 체력 떨어진 정대만의 플레이와 유사.
'동네 한바퀴'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플레이스타일은 외곽에 머물러있다가 노마크 상황에서 킥아웃 패스를 받아 오픈 3점을 쏘는 받아먹기와는 달리 높은 BQ, 순발력, 빠르면서 정확한 슈팅 능력이 요구되어 이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선수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역대로 따져봐도 밀러 수준에 가깝게 오프 더 볼 무브를 구사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던 슈터는 리처드 해밀턴, 레이 앨런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을 슈터의 로망으로 생각하는 팬들도 꽤 많다. 이런 슈터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알던 래리 브라운을 만나서 스타일을 확립한 것도 밀러의 선수시절 행운 중 하나.
또한 의외로 1대1 돌파, 혹은 공 잡고 드리블 치면서 풀업점퍼를 던지는 등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사실 밀러의 핸들링이나 퍼스트스텝 자체는 나쁘진 않을지언정 슬래셔로 기능할 정도로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3점 라인 밖에서 수비수와 1대1로 붙은 상태에서 바로 3점슛을 올라가는 옵션이 있었다는 점이 돌파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슛을 막기 위해 수비수가 달라 붙으면 '떨어지면 슛, 붙으면 돌파'라는 1:1의 기본에 맞게 수비를 뚫고 들어가고, 여기서 롱2 지점에서 곧바로 풀업점퍼를 던지거나 좀 더 들어가서 러너나 레이업을 던지는 것이 그의 가장 주된 득점 루트였다. 또한 오프볼 무브에서도 오픈찬스에서 3점슛만 던지는 건 아니고, 스크린 돌아나와서 패스받아 빠르게 치고 들어가서 풀업 롱2나 레이업,러너도 잘했다.오프볼무브에서 선택지가 워낙 다양하니 수비수들도 미칠 노릇.
자주 언급되는 '플라퍼'라는 평가도 이 과정에서 파울콜을 대단히 많은 것에서 나온 것으로, 비쩍 마르고 약해보이는 몸에 살짝 외계인스러운 인상이 더해지면서 접촉 이후에 조금만 몸짓을 해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훨씬 심한 접촉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기에 심판들이 매우 잘 낚였다. 마치 감전이 된 듯 팔을 주욱 뻣는 풀업 점퍼 자세도 한 몫 했으며,그렇게 던진 풀업점퍼를 잘 성공시키고 자유투도 좋았기에 3점 플레이도 많이 성공시킨 편.
사실 밀러가 그저 오프 볼 무브, 스팟 업&무빙 3점만이 특출나다는건 그의 하이라이트 필름만 봤을 때 생기는 오해이다. 밀러는 당대 선수로써는 파격적인 3점 시도수를 자랑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현시대의 스테판 커리데미안 릴라드 마냥 3점을 경기당 평균 10개씩 던져댈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고, 실제로 커리어 내내 3점 시도는 5개 안팎을 오가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평득 20 이상을 수차례 기록하며 인디애나 페이서스라는 시대를 풍미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외곽을 미끼로 미들레인지 풀업 점퍼, 돌파 후 림어택, 컷인, 자유투 삥뜯기 등의 옵션을 두루 갖춘 덕분이었다.
슛에 대해선 어떤 경지에 오른 선수인 것이 분명했고, 자유투도 대단히 정확했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유투를 잘 넣는 비법에 대해서 밝혔는데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서 던질 수 있도록, 똑같은 자세로 던지는 것을 매일 연습할 것". 해당 인터뷰에는 당시 인디아나 팀의 자유투 연습 루틴 등, 짧지만 볼만한 내용이 많다.
역시 오프볼러의 명성 때문에 핸들링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으나 사이즈 대비 볼 핸들링은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슈팅가드 포지션에선 실수가 적고 안정적인 드리블을 가지고 있었다. 영악하다는 평을 받을만큼 근본적으로 영리하고 패스도 곧잘하는 선수였기에, 마크 잭슨이 잠시 팀을 떠나서 제대로 된 포가가 없던 시기에는 팀내 어시스트 1위를 하기도 했다. 점프력을 비롯 운동 능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주력과 체력만큼은 아주 좋은 편이었기에 그의 장기인 오프볼 무브도 그의 신체적 장점을 잘 살렸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마른 몸과 특급은 못되는 사이드 스텝으로 인한 한계는 있었지만, 근성이 워낙 좋아서 수비에서도 마크맨을 정말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허슬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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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류의 플레이. 1998년 플레이오프 시카고 불스와의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 게임 위닝샷으로, 인사이드에서 뛰어나오며 릭 스미츠의 스크린을 이용해 론 하퍼를 떨쳐내고 스위치된 마이클 조던을 노골적으로 밀쳐버린후(...)[17] 인바운드 패스를 받아 3점슛을 성공시킨다.
영상을 끝까지 보면 알겠지만 슛을 성공시킨 레지 밀러 이하 모든 선수들과 관중들이 흥분하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지만 당시 감독인 래리 버드는 얼굴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냉정한 모습으로 선수들을 불러들였다. 왜냐하면 이 골을 성공시켰을 때 아직 0.7초가 남아있었고 불스는 바로 작전타임을 불렀기 때문. 이 상황에서 불스가 할 작전은 누구다 다 아는 그거. 플레이가 재개되고 당연하게 공은 그분의 손으로 들어갔으나 림이 그분이 쏜 슛을 외면했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래리 버드의 냉철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리딩 가드 스타일의 플레이를 거의 하지 않았고 볼을 끄는 타입도 아니라 볼 소유 시간이 매우 짧았고 의외로 슛을 많이 던지는 선수가 아니었다. 경기 당 슛 시도 회수로 보면 동 시대의 라이벌 조던은 22.9회인데 비해 밀러는 12.6회에 불과하고, 밀러와 곧잘 비교되는 레이 앨런은 15.6회이다. 팀의 넘버원 득점원인 슈팅가드치고 난사 or 볼 호그 기질이 없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인데 그렇게 공을 적게 만지면서도 필요할 때는 반드시 해결사 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이 그의 매력이라고 하겠다.
성격이 불같고 트래쉬 토킹에 일가견이 있어서 마이클 조던, 게리 페이튼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트래쉬 토커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가 절대 트래쉬 토킹을 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고 밝혔는데... 바로 마이클 조던. 루키 시절, 불스와의 연습경기에서 팀 동료이던 척 퍼슨[18]이 부추겨서 뭣도 모르고 마이클 조던에게 트래쉬 토킹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조던은 4득점, 밀러는 10득점을 기록 중이었는데, 연습경기인지라 설렁설렁 뛰고있던 조던의 입장에서는 왠 듣보잡 루키가 자신에게 트래쉬 토킹을 하니 황당할 따름. 결국 열받은 조던은 그 후로 40점을 더 넣어 결국 경기는 조던 44득점, 밀러 12득점으로 끝난다. 조던은 허망해하는 밀러에게 다가와서 "흑인 예수에게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지.(Be careful, you never talk to Black Jesus like that.)"라는 말을 남겼고, 그 후 밀러는 절대 조던에게는 트래쉬 토킹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한참 지난 후에 TV에서 재미를 위해 과장대서 그렇지 실제 밀러와 조던이 붙게 되는 경우 서로 간의 매치업에서 서로 트래쉬 토킹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매우 많다. 닉스가 라이벌로 계속 언급되기는 하지만 사실 조던의 시카고 불스는 밀러의 페이서스와 디비전, 같은 지구에 속해있기 때문에 지겹도록 붙은 팀 중 하나인데 밀러와 조던은 포지션이 같기에 당연히 자주 부딪치고 그만큼 싸우기도 상대할 일도 많았다. 한 경기에서는 조던과 주먹다짐까지 하며 몸싸움을 벌인 적이 있는데 밑의 영상을 보면 알지만 이 경우는 조던의 슈퍼스타성 때문에 억울하게 퇴장당하기도 했다. 영상을 자세히 보면 알지만 서로 계속 신경전을 벌이다가 밀러가 조던을 밀고 조던이 따라붙으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실제 싸움이 일어나자 조던이 밀러의 얼굴에 주먹으로 가격했으며 밀러는 오히려 주위에서 뜯어 말리는 바람에 헛스윙에 그쳤다. 그런데 문제는 퇴장은 밀러만 당한것. 밀러가 조던을 밀었던것도 사실이지만 조던이 굳이 쫓아와 밀러를 붙잡고 본격적인 싸움을 건것도 사실이다. 둘다 퇴장당하거나 둘다 경고정도에 그쳤어야 되는데 밀러만 퇴장당한 것. NBA가 에이스 스타들을 봐준다는 논란의 부채질을 한 영상이기도 하다.[19]
물론 가장 적절한 건 쌍방퇴장이었겠지만 이유없이 조던만 봐준 건 아니다. NBA는 주먹을 실제로 휘두르지 않는 이상 싸움으로 인한 퇴장을 잘 주지 않는데 이는 스타들이 퇴장당하면 흥행에 지장을 주기 때문. 저 상황에선 레지가 밀고 나서 조던이 다시 와서 미는 것으로 멈췄으면 레지가 더 잘못한게 맞고 해설자들도 여기까진 "밀러가 시작했군요"라고 강조를 하며 밀러의 잘못을 지적하고 조던이 되받아 치며 밀때는 "여기까진 괜찮아요!"라고 한다. [20] 하지만 슬로모션으로 보자 선수들이 뜯어말리는 과정에서 조던이 먼저 주먹을 휘둘러 밀러의 얼굴에 맞았고, 밀러도 주먹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다. 밀러의 경우 즉시 퇴장은 아니고 싸움과 조던을 밀 때 엘보우 사용에 의해 테크니컬을 두개 받아 퇴장당한 것. 엘보우 사용시 그 자체만으로 파울이다. 두 선수가 주먹을 휘두른 건 얼핏 보면 안 보이기 때문에 주먹이 오갔다는 걸 모르고 판정했기에 밀러가 팔꿈치 사용+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에 가중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 언급했다시피 주먹이 실제로 나간 이상 싸움으로 즉시퇴장 조치가 맞으며 잘못된 판정이 맞다. 심지어 조던은 먼저 주먹을 휘둘렀고, 주먹이 밀러의 얼굴에 닿았기 때문에 백프로 퇴장감이다. 이것 때문에 처음엔 밀러에 대해 주목하던 해설진이 주먹질을 보고 이걸 강조하다가 결과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당시는 심판들이 리플레이를 보고 판정하는게 아니라 셋이서 육안으로 본 내용을 갖고 상의해 결과를 해 오심이 나온 것. (현재는 이런 경우 고화질 리플레이를 보고 판정한다). 굳이 따지자면 슈퍼스타 콜이라기보단 오심으로 보인다. 과거에 조던이 싸우거나 심판을 우발적으로 들이받았을때는 퇴장과 징계를 받았기 때문.

특이하게도 NBA 선수가 아닌,영화감독이자 닉스의 광팬인 스파이크 리와의 설전은 유명하다. 레지 밀러 전성기의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항상 1위를 고수하던 조던의 불스에 밀린 콩라인이자 동부 파이널에서 시카고와 상대하기 위한 한 자리를 놓고 패트릭 유잉이 이끌던 같은 컨퍼런스의 뉴욕 닉스와는 그야말로 불스보다도 더 처절하게 치고 받고 물고 물리는 관계였는데, 닉스의 광팬인 스파이크 리는 닉스의 홈경기가 있을때마다 항상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관중석 앞자리에서 페이서스의 에이스 레지 밀러를 도발했고, 그러면 밀러는 이에 지지 않고 슛을 던져 성공시킨 후 스파이크를 데꿀멍시키는게 주 패턴. 인터뷰에서 가끔 스파이크 리를 언급하는 걸 보면 애증의 관계인 듯. 심지어 1994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스파이크리와 경기 중 내기를 했다고 한다. 인디애나가 이기면 스파이크 리가 밀러의 아내[21]를 본인의 영화에 출연시키기로, 닉스가 이기면 밀러가 당시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마이크 타이슨을 면회하기로 했다고.[22] 결국 닉스가 인디애나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자, 밀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교도소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기실에서 3시간이나 기다렸지만, 타이슨이 면회를 거부해 만나지는 못했다고.... [23] 그리고, 이때 당한 굴욕을 잊지 않고 다음해 복수한다. 코트에서는 그렇게 치고 박고 싸웠던 스파이크 리였지만 이 둘의 개인적인 사이는 꽤나 좋다. 밀러의 마지막 시즌에 뉴욕에 방문하자 축하해주기도 하고 해설자 시절에도 종종 등장하여 장난치기도 하며, 2019년에 리가 블랙클랜스맨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자 자신의 공식 계정으로 그를 축하해주기도 하는 등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한다.
이 트래쉬 토킹으로 닉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그의 상대 존 스탁스를 완전히 물먹인적이 있다. 당시 "터프가이" 팀을 강조하던 닉스의 스탁스는 인사를 건네는 레지의 인사를 받지 않았고, "그래?" 하는 마음으로 밀러는 스탁스를 완전 물먹이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시작된 트래쉬 토킹. 스탁스는 이걸 알고 있었지만 워낙 밀러가 긁어대는 바람에 경기도 망치고 나중에는 말려들어 빡돈채로 자신의 머리로 밀러의 머리를 박았다.[24] 이에 밀러는 특유의 플라핑을 시전하며(...) 스탁스의 퇴장을 이끌어냈고, 결국 스탁스는 퇴장당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존 스탁스 항목 참조.[25]

6. 플레이오프 역사 및 은퇴



6.1. 1990


레지의 첫 번째 플옵 진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3전 전패.

6.2. 1991


1990/91시즌 도중에 감독이 Dick Versace에서 밥 힐[26]로 변경되는 와중에도 플옵 진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초반에 2승을 거두면서 선전했으나, 5전 2승 3패로 탈락.

6.3. 1992


이때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셀틱스에게 설욕하려 했으나, 3전 전패로 광탈.

6.4. 1993


뉴욕 닉스에게 1승 3패로 탈락. 이로 인해 밥 힐 감독이 경질됨.

6.5. 1994


1994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와 맞붙게 된 페이서스. 시리즈는 2-2 타이를 이룬 상황에서 5차전은 뉴욕 홈구장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다. 페이서스는 3쿼터까지 58-70으로 크게 뒤지고 있었고 이때까지 밀러는 겨우 14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5차전 직관와서 바짝 기가 살은 뉴욕 사생팬 스파이크 리는 코트사이드에서 레지 밀러에게 "니가 3점 빼고 할줄 아는 게 뭐가 있냐? 니한테 연봉 처먹이는 인디애나도 한심하지"라며 트래쉬 토크를 시전했었는데, 어지간하면 반응하지 않으려다 스파이크 아재의 도발에 빡친 레지 밀러는 스파이크 리에게 손가락 4개를 펴보이면서 Choke Sign(목조르는 시늉)을 보낸다. 즉 '4쿼터에 님 좆될거임'이란 뜻.[27] 그리고 닉스는 4쿼터에 35-16으로 털리면서 실제로 좆이 됐고, 그 35점 중 25점을 밀러가 혼자 넣었다.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스파이크 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What about Spike Lee?)라는 질문에 "스파이크 누구라고요?"(Spike who?)라고 디스.
밀러의 이 경기 성적은 39점 6어시스트, FG 14-26 3P 6-11 FT 5/6. 4쿼터 25점은 역대 플레이오프 4쿼터 최다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28]

그러나 이 시리즈 자체는 7차전까지 가서 페이서스가 졌다. 그리고 전술한 타이슨 면회 사건도 이거때문에 했다.

6.6. 1995


94년 드라마를 썼던 닉스와 페이서스가 동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다시 붙었다. 경기장은 역시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1차전에서 페이서스는 게임 종료까지 단 16.9초를 남기고 99-105로 6점 뒤지고 있었고, 상식적으로 역전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에서 밀러는 인바운드 패스를 받자마자 3점을 넣고, 닉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하자마자 3점 라인으로 나가 다시 3점을 넣고, 닉스 자유투 2개가 실패한 뒤 리바운드를 잡고 파울을 당해 자유투 2개를 넣었다. 총 '''8점'''을 넣어 107-105로 역전시키는 동안 걸린 시간은 '''8.9초'''. 밀러는 31득점 5리바운드 4어시스트 4스틸, FG 7-18 3P 3-7 FT 14-15를 기록했다.
이 퍼포먼스는 일명 '''밀러 타임'''으로 불리는 밀러의 대표적인 퍼포먼스였으며, 이후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2004년 12월 9일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정규 시즌 경기에서 33초 동안 13점을 몰아 넣으며 역전승을 이끌어낸 "티맥 타임"과 함께 한 명의 선수가 역전을 만들어낸 가장 쇼킹한 경기로 꼽힌다.[29][30]

이 시리즈에서 역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뉴욕 닉스를 꺾고 [31] 전년도의 복수를 한 인디애나였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샤킬 오닐과 페니 하더웨이가 버티는 올랜도 매직에게 3-4로 패배한다.[32]

6.7. 1996


밀러는 시즌 종료 단 5게임을 남겨두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경기에서 수비수와 충돌, 눈 주위 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는다. 에이스를 잃은 페이서스는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2-2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게 되었고, 안되겠다 싶었는지 밀러는 5차전에 부상을 무릅쓰고 안면 보호대를 찬채 출전을 강행. 그러나 29점을 올린 밀러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팀은 87-89로 패배하여 1라운드 탈락한다.

6.8. 1997


감독 래리 브라운과의 불화로 포인트가드 마크 잭슨이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되어 버리고 레지 밀러에 이은 팀의 2옵션이었던 센터 릭 스미츠가 부상으로 단 30경기밖에 출장을 못하는 등 로스터에 큰 균열이 생긴 해. 이로써 페이서스는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수모를 겪는다.

6.9. 1998


'''너는 여기서 은퇴하는거야, 마이클 조던'''

- 레지 밀러, 라스트 댄스 8화

전년도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래리 브라운이 물러나고, 신임 감독으로 래리 버드가 임명된다. 동시에 마크 잭슨이 복귀하고 스몰 포워드로 크리스 멀린을 영입, 릭 스미츠(C), 데일 데이비스(F), 크리스 멀린(F), 레지 밀러(G), 마크 잭슨(G), 백업 멤버로 트래비스 베스트, 제일런 로즈, 앤토니오 데이비스가 버티는 역대 최고의 끈끈한 라인업을 구축하게 된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2라운드에서 뉴욕 닉스를 차례로 꺾고 좋은 우승 기회를 잡은 페이서스. 밀러는 닉스와의 4차전에서 종료 5초전 동점 3점을 꽂아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가고, 총 38점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끈다. 이 경기도 뉴욕 홈에서 열린 경기였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가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먼의 불스 왕조 시대였다(...). 시카고 불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 인디애나는 7차전에서 시종일관 접전을 펼쳤으나, 결국 83-88로 분패하고 만다. 이 시리즈 4차전에서 밀러의 종료 0.7초전 역전 3점슛이 나왔다.
1차 복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스를 7차전 까지 이끈 유일한 팀이 페이서스였다. 그만큼 팀 전력이 좋았고 밀러 입장에서도 상당히 아쉬운 시즌이였다. 물론 2000년 파이널에 진출 준우승도 있지만 당시 인디애나 전력보다 97/98 시즌 전력이 훨씬 좋았고 30초반의 나이였기에 체력적으로 우세했을 것이며 무엇보다 지배자 마이클 조던을 넘었다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리즈가 2010년대에 펼쳐진 대결이었다면 나무위키에도 상당히 많은 문서량을 보였을 것이다.
조던의 6번의 우승 시즌 중에서 7차전까지 끌고 간 것은 1991-92의 뉴욕 닉스와 1997-98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두 팀뿐이다. 이 시리즈는 마이클 조던의 신화를 무너뜨릴 뻔 했던 시리즈로 1992-93 파이널의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 선즈와 함께 가장 자주 언급된다.

6.10. 1999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피차 지긋지긋한 뉴욕 닉스에게 4-2로 패배(...).

6.11. 2000


또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만난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날아다니며 1999년의 복수를 한 밀러와 페이서스는 드디어 NBA 파이널에 진출한다!
그런데 하필 또 이 시기가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의 레이커스 왕조 시대...이며 오닐의 압도적인 최전성기 시즌이다. 시리즈의 분수령이 된 4차전에서 연장전 끝에 118-120으로 패배한 인디애나는 2-4로 반지를 내주게 된다. 그리고 이 때가 90년대 페이서스 전성기를 이끈 라인업의 마지막 해였다. 래리 버드는 등부상 때문에 감독직 수행을 계속 하는 게 무리였고. 릭 스미츠와 크리스 멀린은 은퇴 직전이었으며 밀러도 이미 35세를 넘기고 있었다.
2001년부터 리빌딩에 들어간 페이서스는 레지 밀러와 제일런 로즈를 제외한 주전이 모두 빠졌고 2003년까지 3년 연속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저메인 오닐, 론 아테스트, 자말 틴슬리 등이 점차 성장해 나가며 다시 성적이 점차 상승하게 된다.

6.12. 2002


8시드로 플레이오프에 힘겹게 진출했고 1시드 뉴저지를 만나서 업셋을 할 '''뻔''' 했다. 마지막 게임에서 리차드 제퍼슨이 자유투를 놓친 후 40피트 3점슛으로 게임을 오버타임으로 보낸뒤에, 첫번째 오버타임에서도 끝나기 직전에 드라이브인 후 덩크에 성공함으로 두번째 오버타임으로 보냈다. 물론 그 다음에는 방전했는지 한골도 성공시키지 못하며 시리즈에서 패했다. 물론 마지막 쿼터가 아쉽지만 클러치에 강한 밀러의 강심장을 보여준 시리즈.

6.13. 2003


2003년 아이재 이아 토마스에서 릭 칼라일로 감독이 바뀐 페이서스는 61승 21패로 NBA 정규 시즌 1위를 찍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다시 진출하지만, 배드보이즈 2기로 불리는 천시 빌럽스 - 테이션 프린스 - 라쉬드 월러스 - 벤 월러스 - 리처드 해밀턴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2-4로 패한다.

6.14. 2004


39세가 된 레지 밀러는 '''올해가 마지막 해'''임을 밝힌다. 그러나 이미 동부 No.1 센터로 성장한 저메인 오닐과 리그 최고의 수비형 SF 론 아테스트 등이 버티고 있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컨텐더 팀으로서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밀러가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마지막 좋은 기회. 그러나 시즌 초반에 론 아테스트의 관중 폭행 사건이 터지면서[33] 팀 주전 5명 중 3명(론 아테스트, 저메인 오닐, 스티븐 잭슨)이 출장정지를 당한다. 아테스트는 73경기(즉 시즌 전 경기), 오닐은 15경기, 잭슨은 30경기. 시즌 초반에 벌어진 일이라 그야말로 우승은 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못할 판에 나머지 주전 2명인 틴슬리와 포스터는 부상까지 당한다. 릭 칼라일 감독은 10년 전에나 쓰던 39세의 노장 레지 밀러를 공격 1 옵션으로 쓰는 오래된 전술을 다시 꺼내 들었고, 레지 밀러는 인디애나에 다시 돌아온 데일 데이비스와 함께 망한 팀을 추스려 44승 38패의 성적으로 동부 컨퍼런스 6위를 기록, 팀을 플레이오프에 끌어 올린다.
이 시기의 레지 밀러는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며, 3월 18일에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레이커스를 상대로 39점을 넣는 등 전성기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34]
그리고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란틱 디비전 1위팀 보스턴 셀틱스를 꺾었으나, 전년도에 만났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게 2승4패로 패해 2라운드에서 탈락한다. 특히 6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69-67로 앞서고 있는 와중에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던 역공 레이업이 번개처럼 달려온 테이션 프린스에게 블락당했고[35], 이후 리처드 해밀턴의 역공이 동점을 만듦으로써 결국 오버타임에서 쓰린 패배와 파이널 진출 좌절을 맛보고 말았다. 레지 밀러의 마지막 경기였던 2005년 5월 19일, 콘세코 필드하우스에서 열린 시리즈 6차전에서 그는 4-8 3점슛을 포함 11-16 필드골을 넣으며 27점을 기록한다. 승부가 결정되고 경기 종료 15초가 남은 상황에서 레지 밀러는 교체되어 벤치로 들어갔고, 디트로이트 감독이자 전 인디애나 감독이었던 래리 브라운은 추가 타임아웃을 불러 레지 밀러의 명예로운 은퇴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홈관중들, 동료, 코치, 상대팀 디트로이트 선수들 모두 퇴장하는 전설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내주었으며,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밀러 본인이 얘기한 "사회 초년생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까지의 농구인생"이 마무리 되었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서 관중들은 모두 기립, 'Thank you Reggie'라고 써 있는 노란색 플래카드를 치켜들었고 코트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으며 많은 인디애나 팬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순간을 NBA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레지 밀러가 전성기에 활약하던 당시에는 그를 폄하하거나 싫어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대부분 존경 모드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면 사람에게 끝맺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90년대에 밀러라면 치를 떨었던 숙적 중의 숙적, 스파이크 리와 뉴욕 닉스 관중들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뉴욕닉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밀러에게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7. 영상


커리어 Top 10 Moment
10위 : 1992년 정규 시즌 vs. 샬럿 호네츠, 커리어 하이 득점 게임. 57pt 5rb 8ast를 기록.
9위 : 2005년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 3차전 vs.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게임 위닝 샷
8위 : 2000년 NBA 파이널 3차전 vs. L.A. 레이커스, 33득점
7위 : 2000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5차전 vs. 밀워키 벅스, 1점차로 페이서스가 신승한 가운데 밀러는 플레이오프 커리어 하이 41점을 기록하며 4쿼터 페이서스 득점 25점 중 18점을 올림.
6위 : 1998년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 4차전 vs. 뉴욕 닉스, 경기 종료 5초를 남기고 동점 3점슛을 꽂으며 경기를 연장전으로 가져가고 총 38점을 득점하며 페이서스를 승리로 이끔.
5위 : 200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 vs. 뉴욕 닉스, 3쿼터까지 62-62 동점이었으나 4쿼터를 31-18로 페이서스가 압도하며 NBA 파이널 진출. 밀러는 총 34점 중 4쿼터에만 17점을 득점.
4위 :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5차전 vs. 뉴저지 넷츠, 40피트짜리 버저 비터 동점슛으로 1차 연장을 만들고, 1차 연장 종료 3초전 동점 드라이브 인 덩크를(그것도 In Your Face로) 성공시켜 2차 연장을 만들어냄. 밀러는 총 31점을 득점하였으며, 옥에 티는 2차 연장에서 졌다는 거(...)
3위 : 1998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 vs. 시카고 불스. 경기종료 0.7초 전 인바운드 패스를 받고 턴어라운드 역전 3점슛.
2위 : 1995년 동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 1차전 vs. 뉴욕 닉스, 유명한 8.9초 동안 8점 퍼포먼스.
1위 : 1994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 vs. 뉴욕 닉스, 위에서 언급한 'Spike who?' 경기로, '4쿼터에만 25점' 퍼포먼스.

'''마지막 경기''' 하이라이트. 이렇게 명예로운 은퇴 경기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36]

'''Thank You Reggie!'''

8. 이것저것


대인배 속성도 가지고 있다. 제일런 로즈가 팀에 합류하고 나서, 그가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이제는 그가 우리팀의 제 1공격 옵션"이라고 하면서, 팀내 에이스 자리를 내주었고, 저메인 오닐이 합류했을 때도 별다른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주었다.[37] 오오 대인배 오오.
마이클 조던처럼 돌파, 포스트업 플레이, 슈팅에 모두 능한 만능형 스윙맨이 NBA의 대세가 되면서 레지 밀러와 같은 퓨어 슈터 타입의 슈팅 가드는 이후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마이클 레드나 리처드 해밀턴이 그나마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레지 밀러의 통산 3점슛 성공 개수 기록을 깬 레이 앨런의 경우도 '슛을 특히 잘하는 만능형 플레이어'에 가깝다.
'93년 플레이오프 경기 중에 마이클 조던과 심하게 싸운 적이 있던 만큼 경기에서 둘은 앙숙이었지만, '03년 조던의 마지막 시즌에서는 경기가 끝나고 과거의 앙금을 씻는 듯한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TNT 등 방송에서 밀러는 언제나 조던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칭하며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최악의 컨디션의 마이클 조던이 최상의 컨디션의 코비 브라이언트보다 10배는 더 뛰어나다.'''라고까지 평한 바 있다. 실제 밀러의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에 조던이 참석했는데 조던을 바라보며 "그래. 인정하지. 그때 내가 너를 밀었어. 그런데 니가 수십명에게 그러는걸 보고 (그러고 파울을 안 받는 걸) "나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 이라며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은퇴 후에는 TNT농구해설가로 맹활약했다. 한때 보스턴 셀틱스가 빅3를 결성하고 나서 다른 선수를 영입하려 했을 때 그의 복귀설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밀러는 복귀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TNT 해설가로서 활동 중. 입담도 좋고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들과도 궁합이 잘 맞으며 경기를 보는 시선도 좋아서 적성에 잘 맞는듯 하다.
인디애나 페이서스 구단의 대부분 역대1위 기록을 다 가지고 있다. 통산 출전 경기 수 1위, 역대출전시간 1위, 필드골 시도개수 1위, 필드골 성공개수 1위, 3점슛 시도/성공 개수 1위, 자유투시도/성공개수 역대 1위, 통산 총 어시스트 개수 역대 1위, 총 스틸개수 역대 1위, 역대 총 실책개수 1위(...), 역대 총 득점 1위, 인디애나 페이서스 역사상 최초의 2만 득점 이상 득점자, 인디애나 페이서스 역대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 보유자(57득점) 등등. 가히 페이서스의 레전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드림팀 3). 그전에는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참가, 미국이 우승하는데 일조했다.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스카티 피펜, 페니 하더웨이,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가장 좋은 활약을 했다. 좀 답답하다 할 때 밀러가 3점을 넣어주었다. TNT 해설시절에는 이 때의 전우애인지 모르지만 드림팀 이야기만 나오면 샤킬 오닐과 죽이 잘 맞는다. 주로 샤킬오닐이 96년 드림팀이 92년 드림팀보다 더 뛰어나다는 -허세 잔뜩한- 주장을 할때 밀러는 그렇다고 거드는 편.[38]
그의 뛰어난 3점슛 능력에 대한 일화 하나. 하루는 밀러가 슛 연습을 하는데 평소와는 달리 슛이 연달아 실패했다. 그러자 밀러는 즉시 체육관 관리인을 불러 골대높이를 확인해달라고 요구했고, 관리인은 측정결과 골대높이가 규정보다 높다는 걸 알고 골대높이를 다시 조절해주었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도사수준.
개성강한 선수였지만 별명이 없었다. 그나마 '95년과 '98년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상대로 보여준 엄청난 플레이로 'The Knick Killer'라는 별명을 얻기는 했지만, 페이서스-닉스 라이벌 구도에서만 의미 있는 별명이라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국내팬들도 그를 딱히 별명으로 부르는 이는 없었다. 밀러의 커리어 막판에 그를 "밀러옹"이라고 부르는게 고작.
밀워키 브루어스라이언 브론과 친분이 있는 옆집 아저씨(...)다. 라이언 브론이 미친듯이 달리다 넘어졌을 때도 경기장에서 기립박수를 보내줬으며 약물 양성 파동으로 곤욕을 치를 때도 브론을 믿는다며 응원을 보내줬다. 하지만 결국 브론은 레지를 포함한 만인의 뒤통수를 치게 되는데... 브론 항목 참조.
2012년 9월 7일. 돈 넬슨, 랄프 샘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입성 연설에서 팬들과 동료들 그리고 함께 경기했던 상대팀 선수들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지난 선수 시절의 추억을 회상했다. 특히 그는 "이 자리에 역대 최고의 선수가 세 명이 있다.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그리고 우리 누나." 라고 말하면서 당시 그곳에 구경 온 모든 청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NBA 공식홈페이지에서는 그의 얼굴을 나흘 동안 메인화면에 올리면서 전설에 대한 예우를 해주었다.
최근에 선수들이 우승을 위해서 자신의 친정팀을 버리고 떠나는 점과 관련하여 계속 비교되며 자주 회자되고 있다. 2010년에 르브론이 우승을 위해 드웨인 웨이드크리스 보쉬와 함께 "슈퍼 팀"을 만들었을 때나 최근 케빈 듀란트스테판 커리가 있는 골든 스테이트로 이적한 것과는 대조적이기 때문. 밀러는 가장 최근에 그런 듀란트를 보면서 "싸구려 보석을 위해서 전설을 날려먹으려고 한다" 하면서 아쉬워하는 면을 보여주었다.[39][40] 아무래도 본인이 인디애나의 전설로 남은 이상 이런 데는 발언권이 있는 듯.
2018년 엉클 드류 영화에 주전 5인 중 한 명으로 출연하였다. 눈이 먼(...) 슈터 역할이었는데 안경을 쓰니 다시 앞이 보인다는 싱거운 설정. 넉살 좋은 장님 슈터 연기는 훌륭했다.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신장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한 MTB로드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악화되면서 라이딩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레지는 자신의 후배들을 칭찬하는것을 아끼지 않는 면으로도 유명하다. 특히나 스테판 커리가 자신의 3점슛 누적기록을 깨고 2위로 올라섰을때 깜짝 자신의 아들과 전화 영상 통화로 연결로 커리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내 아들을 포함하여] 너는 농구를 좋아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 고 말하면서 이제는 레이 앨런을 잡아야 한다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1]

9. 관련 문서


[1] 뒤에 지나가면서 째려보는 인물이 스파이크 리. 이 인물과 밀러의 악연은 문서 하단과 스파이크 리 문서에 모두 기록돼 있다.[2] 1995년 뉴욕 닉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의 퍼포먼스로 얻게 된 별명. 현지에서는 이 별명을 많이 쓴다.기사[3] 여담으로 이날 밀러는 자신의 경기에서 40점을 넣고 좋아하는 중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차를 타고 집에 가던중 아버지가 "너 몇 점이나 넣었니?" 라고 물어서 자신있게 "40점이요" 라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웃더니, "누나는 몇 점이나 넣었게?" 라고 물은 뒤 그 점수가 공개되자 망연자실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한 적이 있다. [4] 어린 시절이라 남녀 체격 차이가 크지 않고 셰릴 본인도 여자임에도 큰 체격에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고 있는데다 워낙 실력이 넘사벽이라 남녀할 것 없이 동네에서 다 쳐바르고 다녔다고 한다. 이를 이용해 원정을 다니며 소소한 사기 (?)를 치기도 했는데, 여자가 끼어 있다는 걸 보고 과소평가한 상대와 돈을 걸고 내기농구를 한 다음 상대를 박살내고는 돈을 싹쓸이해가곤 했다고.[5] 경기 전/후 레지와 인터뷰를 직접 진행하고 인터뷰 끝에는 꼭 레지에게 뽀뽀를 해줬다.[6] 그런데 정작 누나인 셰릴은 USC를 다녔다. [7] 1960년대 초반 존 우든 감독 휘하에서 UCLA 왕조의 초석을 다졌던 선수. UCLA 측은 그의 등번호 42번을 영구 결번시켰다.[8] 여기엔 팬들의 고향 선수사랑도 있지만, 인디애나가 NBA 최악의 스몰마켓인데다 주변 환경도 별로라 일류 스타급 선수들이 뛰기를 꺼리는 프랜차이즈라서라는 안습한 사실이 숨어있다.[9] 래리 버드의 경우 역대 최고의 슈터 중 한명이지만 당시만 해도 스몰포워드는 지금보다 훨씬 골밑에서 플레이하는 빈도수가 잦았다. 지금은 한시즌에 삼점슛 백개를 성공시키는 빅맨도 가끔나오는데, 당시 버드는 한 시즌에 삼점슛 백개를 '''시도하지도''' 않은 적이 대부분이었다.[10] 하지만 레지 밀러보다 3점슈터로써의 이미지로 스타가 된 선수가 존재한다. 당시 시애틀 소속의 데일 엘리스로 밀러의 데뷔 시즌에 nba 역사상 최초로 3점슛 100개 성공을 기록하며 시애틀 삼각편대 중 일원으로 자리잡았고 이듬해에는 47.8%라는 흠좀무한 3점 성공률로 마이클 조던, 칼 말론에 이은 평균득점 3위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11] 변명하닌 변명을 하자면 레지 밀러는 스티브 스미스와 함께 NBA Open Court에서 마이클 조던과 동부 지구에서 함께 뛰는 고충에 대해서 털어놨다. 뭘해도 조던을 밀어 낼 수 없기에 항상 올스타에서는 항상 두번째 가드 자리를 놓고 대여섯명이 경쟁해야 했고, 올 NBA도 조던자리는 넘사벽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를 나눠야 했다고 한다. [12] 다만 이렇게 보는것이 약간 궁색한 것이 밀러는 세컨드팀도 아닌 서드팀에 세번 선정되던 선수였다. 조던과 매직의 존재가 없더라도 끽해야 세컨팀이 한계였다는 것. 클러치 능력이 뛰어나서 임팩트가 강할뿐 애초에 MVP후보로도 꼽힌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가 커리어 내내 받은 MVP표는 3위표 세장 (98년 두장, 00시즌 한장)인데 세드릭 세발로스나 데럴 암스트롱같은 스타와 거리가 먼 선수들도 커리어 통틀어 한장 정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팬들의 인식과 실제 선수로서 위상이 약간 거리가 있는 선수. 사실 진짜 억울한 선수는 바로 클라이드 드렉슬러이다. 밀러는 사실 조던보다 세살이나 어리고 데뷔가 늦어 9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은 선수지만, 조던보다 한살 많고 1년 선배인 드렉슬러의 커리어는 조던과 완벽히 겹친데다 매직까지 있었다. 드렉슬러는 기량이 80년대 중후반에 슬슬 전성기 레벨로 올라가던 선수인데 매직과 조던은 넘사벽이었다. 심지어 91시즌엔 팀을 리그 전체 1위로 올리고도 세컨팀에 그쳤으며, 30세가 되어서야 매직이 은퇴한 틈을 타 퍼스트팀에 올랐다.[13] 반대로 농구쪽 세이버매트리션들은 밀러를 과소평가의 대명사로 본다. 예를 들어 밀러는 3점슛과 자유투 시도와 성공을 보정한 야투율인 True Shooting 퍼센트에서 NBA 역대 6위에 올라있는 고효율의 슈터이며, 이런 스탯분석을 통해 추정한 윈쉐어 모듈을 적용할 경우, 공격쪽 윈셰어는 역대 7위로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보다도 높은 엄청난 슈터중 하나다. 다만 수비에서 많이 까먹는 편.[14] 정규 시즌 평균 득점은 앞서 말했듯 24.6점이 커리어 하이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27점, 29점, 31.3점, 31.5점 등의 평균 득점을 기록했다[15] 삐쩍 마른데다 은퇴 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이미지가 더 강해진 감이 있다.[16] 물론 숫자는 스캇이 생각나는 대로 말한 숫자. 20년이 넘게 지난 현대 농구에서는 지금보다 공격작업이 훨씬 치밀해져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스테판 커리같은 선수는 밀러처럼 오프더볼 무브로 3점슛을 던지기 위해 한플레이에만 3번 스크린을 타기도 하고, 경기 전체로 치면 스캇이 말한 숫자의 2배 정도는 타게 된다.[17] 밀러는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그래 마이클, 내가 민 게 맞네. 근데 자네도 그런 적 많잖아? 쌤쌤이지." (Yeah michael I did push you,too. but i've seen you doing it so may other times to so many other players. I figured it was OK.) 라고 이 플레이가 파울이었음을 시인한 바 있다. 다만 조던과의 차이점이라면 조던은 가드치고 힘이 굉장히 세고 체격이 탄탄해 심판 몰래 한손으로 슬쩍 밀쳐도 수비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92-93 파이널에서 속공상황서 스핀무브후 선즈의 마크맨 대니 에인지를 한 손으로 가볍게 치워버리고(...) 골밑 돌파를 성공시키는 장면이 대표적.) 밀러같은 경우 본인보다 무겁고 힘이 월등한 조던을 떨쳐내기 위해 누가봐도 대놓고 밀었다. 밀러는 후에 은퇴선수들이 모여 수다떠는 nba open court란 방송에서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왠만해서는 공격자 파울이 불리지 않는다는 걸 염두에 뒀다"고 설명한 바 있다.[18] 전 LA레이커스 코치이자 얼마전까지 전주 KCC 이지스 코치를 역임했다.[19] 가장 인기 댓글의 표현이 재미있는데 "레지가 퇴장당한 이유는 조던의 주먹을 얼굴로 때려서다(....) 라고"[20] 진짜 괜찮은게 아니라 퇴장감이 아닌것.[21] 현재의 기준에서는 전처. 밀러 부부는 2001년에 이혼했다.[22] 당시 타이슨은 강간죄로 92년 4월부터 인디애나주 플레인필드의 교도소에 수감중이었다.[23] Jimmy Kimmel Live에서 본인이 비화를 직접 밝혔다.[24] 물론 심하게 받은게 아니라 꿀밤을 맥인거처럼 톡 쳤다.[25] 사실 실제 장면을 보면 스탁스가 폭발해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경전을 벌이다가 한대 툭 친 것에 가까웠다. NBA에서 싸움은 즉시 퇴장이지만 신경전과 가벼운 접촉은 테크니컬 파울 정도에 그친다. 위에서 언급된 조던과 밀러의 싸움도 밀러가 테크니컬 누적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주먹이 안 나갔다면 테크 하나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탁스의 컨택은 즉시퇴장 판정을 주긴 좀 애매했다. 그런데 문제는 밀러가 작정하고 이를 노렸다는 것. 스탁스가 치자마자 무슨 황소에 들이받힘마냥 뒷걸음을 치더니 두 손을 들고 특유의 억울한 표정으로 기가막히다는 듯 심판들을 바라봤다. 참고로 닉스의 리더 패트릭 유잉은 밀러의 속셈을 알고 있었기에 바보짓하지 말라고 계속 스탁스에게 경고했는데 그가 결국 사고를 치자 정말 불같이 화를 냈다.[26] 샌안토니오 감독 시절 데니스 로드맨에게 '쪼다'라고 까인 그 사람 맞다(...).[27] 그리고 스파이크 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그 말을 한 뒤 레지는 자신의 거시기를 잡는데까지 가서 리가 아내한테 굉장히 민망해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28] 1위는 87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포인트가드 슬리피 플로이드가 기록한 29점[29] 하지만 티맥 타임보다 더 무서운게 티맥 타임은 정규시즌 경기고, 이건 플옵이라는 것.[30] 게다가 닉스는 당시 실점 리그 2위, 페이스 조정한 디펜스 레이팅으론 리그 1위인 리그 최강의 수비팀이었다. 물론 밀러가 세팅된 닉스 수비를 뚫은 건 아니라 기습적으로 3점 두개+자유투를 넣은 거긴 하지만 대단한 건 부인할 수가 없다.[31] 운명의 장난인지 전 시즌과 똑같은 구도로 7차전이 뉴욕에서 열렸으며, 마지막 몇초를 남겨두고 페이서스가 근소한 리드를 잡은것도 동일했으며, 닉스의 마지막 슛을 에이스 센터 패트릭 유잉이 한것도 똑같았다. 다만 차이는 94년에는 유잉이 스탁스가 놓친 골밑 슛을 풋백 덩크로 꽂아넣으며 역전에 성공해 극적으로 닉스가 승리를 거뒀으나 95년에는 유잉이 특유의 큼직한 스텝을 밟고 레이업을 했으나 림을 돌아나오는 바람에 졌다. 덩크 정도를 제외하면 레이업이 가장 성공률이 높은 슛이란 걸 감안하면 이 장면도 유잉의 수많은 불운를 상징한다고 할수 있다.[32] 그런데 올랜도는 파이널에서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게 4-0으로 스윕당했다(...).[33] 이 사건으로 론 아테스트에게는 밀러의 은퇴 시즌을 망친 놈이라는 좋지 않은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34] 비슷한 시기 코비 브라이언트의 인터뷰를 보면 가장 막기 어려웠던 선수는? 이라는 질문에 '레지 밀러'라고 답한 적도 있다.[35] NBA 역대급 블락슛을 논할 때 꼭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36] 4쿼터 교체장면은 9분 30초부터 볼 수 있다.[37] 저메인 오닐은 1996년 드래프트 당시 코비와 함께 초고교급 선수로 주목받던 선수였다. 그러나 스타군단 포틀랜드에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인디애나로 트레이드 되었는데, 인디애나에서 꽃을 피웠다. 레지 밀러가 팀내 발언권이 큰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오닐의 영입을 반대하고 다른 베테랑을 영입하라고 할수 있었는데 밀러는 오히려 오닐이 성장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훗날 오닐은 레지 밀러의 한경기 최고득점이자 팀의 한경기 최고득점 기록인 57득점을 깨지 않고 딱 55점만 넣고 벤치로 들어가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38] 반면 두 팀에서 다 뛰어본 바클리는 92년이 더 낫다고 주장해서 오닐을 도발하고는 한다.[39] 밀러가 인디애나를 떠나려고 했던 적은 딱 한번 있었는데 그것도 개인적인 문제였지 (방화범이 멀쩡히 구설수 없이 선수 생활을 하고 있던 그의 집에 불을 질렀고, 그의 부인은 더 큰 도시인 LA로 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 방화 배후에는 밀러의 부인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작은 도시인 인디애나가 질려서 LA로 가고 싶은데 남편이 가지 않자 이런 극적인 방법을 썼다는 이야기가...) 그마저도 우승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는 계속 인디애나에서 이기고 싶어했다.[40] 놀랍게도 은퇴 후 몇 년 뒤인 0708시즌의 보스턴에서도 러브콜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보스턴은 막강한 우승권이었고 또 실제로 우승을 하게 되는 팀이었는데 그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인디애나와의 의리를 지켰다.[41] 또한 많은 댓글에는 레지의 아들이 커리와 많이 닮았다는 댓글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