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인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선수로 현대 유니콘스와 넥센 히어로즈에서 활약했던 투수였다. 보직은 주로 중간 계투를 맡았다. 별명은 철인 '''23호'''. 그의 이름과 등번호를 합성한 근사한 별명이다.[1]
지금은 종속이론이 유사과학임이 밝혀졌지만, 과거에 한창 종속이론이 지배할 때[2] 는 종속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던 대표적인 투수 중 한 명이었다. 정확히 설명하면 빠른 공이 일반적인 투수에 비해 낙차폭이 적은, 즉 종무브먼트가 우수한 투수였다.
빠른 공의 무브먼트가 매우 좋았던 덕에 130km 후반까지 구속이 떨어졌음에도 k/9는 끝까지 9를 넘겼던 투수이다.[3]
강력한 불펜들이 해마다 튀어나왔던 현대 유니콘스에서 화려하지 않지만 꿋꿋하게 팀을 위해 보직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활약했던 투수였다. 그 탓에 혹사도 많이 당한 편이다. 2001년에는 무려 6연투를 한 적도 있다.
2. 프로 데뷔 전
경동고등학교 재학 시절만 해도 실책을 남발하는 3루수에 불과했다. 2학년 겨울 방학때 허리를 다쳐 유급을 하여 고등학교를 4년째 다니고 있었음에도 그는 어떠한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감독은 그에게 투수 전향을 권유하였고, 투수로 전향한 후에는 전국대회에서 완봉승, 완투승을 거두는 등 나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996년 황금사자기 기사1996년 청룡기 기사
하지만 오라는 대학과 프로 팀이 아무 곳도 없었고, 삼성과 현대에 연습생 신청을 했지만 그것도 다 떨어졌다. 해태 타이거즈에 연습생으로 겨우 입단하였지만 배팅볼만 던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2년제 전문대학인 제주관광대학 감독에게 입학 제의가 왔고, 그는 제주특별자치도로 건너간다.
그 후 기량이 발전하여 전국 체전에서 145km/h가 넘는 속구를 던지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 프로 선수 시절
그러나, 175cm/75kg이라는 빈약한 신체조건 때문인지 현대 유니콘스에 2000년 2차 10라운드(전체 77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맨 아래급의 순위였지만, 그래도 계약금 2,00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입단하였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경동고등학교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나아졌지만 후순위로 지명을 받은 탓에 아직도 미지수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로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전지훈련부터 빼어난 빠른 공과 슬라이더를 앞세워 코치진의 신임을 받더니, 입단 첫 해인 2000년 5월 19일[4] 스코어 16:2로 현대가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데뷔 첫 등판을 하였고, 3이닝 7탈삼진으로 생애 첫 등판에서 세이브를 올렸다. 그 후에도 그 해 91승을 올린 막강 현대 유니콘스에서 임시 선발과 필승 계투를 오가는 스윙맨 역할을 하면서 31경기 75.2이닝 6승 4패 1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4.28이란 성적을 남겼다. 과거 현대의 신고선수 테스트에서도 떨어지고 하위 픽으로 겨우 입단했지만, 데뷔 첫해부터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우승반지까지 낀 성공적인 데뷔 시즌이었다.
2001년부터는 완전히 필승조 계투의 일원으로 자리잡으면서 맹활약했다. 그러다 주전 마무리 위재영이 부상으로 빠진 이후에는 마무리로 전환하였으며, 57경기 96.1이닝 6승 6패 13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점 2.80을 기록하였다. 이 당시 신철인은 팀 내 연봉 고과 1위 투수가 됐다.
하지만 주전 마무리로 낙점되나 싶었던 2002년에 등판할 때마다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입단한 조용준이 엄청난 활약을 하면서 주전 마무리는 조용준이 맡게 되었으며, 주로 추격조로 등판했다.
2003년에도 개막 엔트리에서도 빠지는 등 위기를 겪었으나 그 후 필승조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52경기 76.1이닝 3승 2패 1세이브 10홀드, 평균자책점 3.07을 기록하였다.[5]
하지만 이후 여러 차례 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2004년에는 시즌 후반기에 복귀했으며 2005년에는 사실상 시즌 아웃되었다.
부상을 어느정도 회복한 2006년에는 박준수의 앞에서 셋업맨 역할을 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신철인의 활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상.
65경기에 등판하여 77이닝을 소화했고, 2승 3패 1세이브 17홀드, 방어율 2.22를 기록하였다. 2006년 때 신철인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는데, 당시 현대 유니콘스 불펜에서 중요한 시점에 항상 나오는 '소방수' 역할을 했었다. 2006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가 정규 시즌 2위를[6] 이끄는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셈.
그런 활약을 바탕으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제대로 던질 몸 상태가 아니었고, 대표팀도 도하의 비극을 연출하며 동메달에 머물렀다. 이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려 했으나 팔꿈치 인대 부상으로 인해 군 면제를 받았다.
2007년에는 1군에서 말소되었고 현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팀 히어로즈가 창단된 2008년에도 기약없는 재활이 계속되다 시즌 후반에 등판하여 10이닝 2홀드 3.6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2008년 시즌이 끝나고 히어로즈로 바뀐 팀에선 그를 방출하려고 했지만, 신임투코로 온 정민태 투수코치가 말려서 남게 되었다.
2009년에는 시즌 초반에 마무리로 낙점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전년도 마무리로 뛰던 황두성이 2군에서 몸을 만들 때 까지 조용준과 더블 스토퍼로 기적적으로 돌아와 이상열과 함께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팀 투수진이 무너지며 무리한 연투로 방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시즌 초반의 모습은 마지막 불꽃이 되었고 2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6.42로 결국 시즌을 마쳤다. 히어로즈는 이 해에 마무리 투수가 계속 바뀌었는데 전유수, 전준호, 이보근, 조용준, 송신영, 황두성 등 여러 투수들이 마무리를 돌아가며 맡았다.
그리고 2010년 스프링 캠프 도중 조용준과 함께 부상으로 조기 귀국했고, 이후 재활을 거듭하다가 시즌 후 조용준과 함께 방출되었다.
여러모로 현대 유니콘스 팬들에게는 아쉬운 존재. 간신히 후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지만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 신화를 쓴 주인공이었다. 또 팀의 위기 때마다 마운드에서 승리를 지켜주었던 선수.[7] 그리고 재활을 견뎌내고 2009년 시즌 초 잠시 부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4. 은퇴 후
2012년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2013년부터 2017년까지는 청원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지냈다.
이후 2018년에 다시 신일고 코치를 맡았으나 2019년에는 그만두었으며 이후로는 전 해태 소속 선수였던 이경복과 함께 하남시에서 야구교실을 운영 중이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그의 팬카페의 이름이기도 하며, 2008년 한정으로는 28번을 달아서 진짜 철인 28호가 되기도 했다.[2] 빠른 공에도 무브먼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으나 무브먼트 차이를 측정하는 방식이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명확한 기준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완전히 헛다리 짚었지만 초속-종속의 차이가 덜하단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3] 469이닝 499삼진[4] 여담으로 이 경기는 박경완이 4연타석 홈런을 친 한화전이었다.[5] 피안타율은 .208, 탈삼진은 88개를 잡아내며 우수한 구위를 보여주었다.[6] 당시 1위도 넘볼 수 있는 급이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패하고 만다.[7] 특히 포스트 시즌에서 잘 던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평균자책점 '''0.84'''로 포스트시즌에서 3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중에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