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

 


조용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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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3
2004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2

KBO 한국시리즈
2004 한국시리즈 MVP


2002 KBO 리그 신인왕


2002 KBO 리그 구원왕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51번
최만호(1997~2001)

조용준(2002~2007)

팀 해체
우리 / 서울 / 넥센히어로즈 등번호 51번
팀 창단

조용준(2008~2010)

장기영(201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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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용준(趙容浚)
생년월일
1979년 3월 17일 (44세)
출신지
전라남도 여수시
학력
여수중 - 순천효천고 - 연세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75.6cm, 75kg[2]
프로입단
1998년 2차 5라운드 (전체 35번, 현대)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2002~2007)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0)
지도자
신일고등학교 코치
덕수고등학교 투수코치
종교
불교천주교[3]
별명
조라이더[4]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선수 경력
4. 은퇴 후
5. 기타 이모저모
7. 연도별 성적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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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의 야구 선수. 현대 유니콘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고 슬라이더를 잘던져서 '조라이더'라는 별명이 있었다.

2. 플레이 스타일


[image][5]
투구폼. 팔을 휘두르면서 고개도 같이 꺾이는게 특징.[6]

"슬라이더는 조용준과 김수경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박경완 인터뷰[7]

기본적으로는 작은 체구를 가졌음에도 강력한 구위로 윽박지르는 파워 피쳐의 유형을 보였던 꽤 드문 타입의 투수로, 최고 150km/h 초반의 직구와 140km/h를 상회하는 고속 슬라이더가 특기였다. 특히 슬라이더는 역대 프로야구 최고의 슬라이더 순위를 매긴다면 항상 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역대급이었고, 오죽하면 선수 시절 별명이 조라이더였다.[8] 04년에는 서클체인지업을 장착하면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공을 던지면서 고개가 꺾이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몸이(특히 상체, 어깨가) 극단적으로 나가는 형태의 투구폼을 갖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최대한 힘을 짜내기 위해 고안된 폼으로 여겨진다. 이런 투구폼인데 입단 당시부터 어깨부상을 안고 있었다. 거기에 훈련에 불성실하기로는 유명했는데도 구원왕에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역대급 재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3. 선수 경력


순천효천고 시절에는 체구가 작고[9] 동기 강철민에 밀려 뚜렷한 성적을 기록하지 못해[10][11] 1998년 드래프트에서 2차 5순위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되었으나[12]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1998학번-2002졸업)[13][14]에 진학. 대학에서 기량이 급성장하였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2002년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받고[16][17]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여 허리 부상을 당한 위재영[18]을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원래는 위재영 대신 전년도 팀내 투수고과율 1위인 신철인[19]과 베라스라는 용병과 더블스토퍼 체제여서 7회부터 8회 2이닝만 던지고 9회에 마운드를 인계하는 역할이었지만 베라스가 불과 10경기도 안되어 박살이나고 신철인은 전년도 혹사로 추격조로 편입이 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9회까지 던져 마무리 보직을 맡았다. 최종적으로 구원 포인트 1위[20]에 오르며 KIA 타이거즈김진우를 제치고 신인왕을 거머쥐었다.[21]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따고 병역 특례를 받았다. 이 해 기록은 60경기 출장에 109이닝 116탈삼진 1.90의 평균자책점과 28세이브 4홀드.신인시절 세이브 영상 결과론적으로 이때의 기용이 조용준의 야구인생을 망치게 된다. 아마 때부터 혹사당한 투수를 신중히 관리했어야 하는데 오자마자 불펜으로 마구잡이로 굴리는 바람에 나중에 크게 탈이 나게 된다.[22]
이후 2003년에는 약간의 소포모어 징크스인지 잠시 주춤했으나[23] 이듬해에는 마치 페드로 마르티네즈을 연상시키는 서클 체인지업을 장착하여[24] 63경기 75이닝 10승 3패 34세이브 방어율 2.28의 좋은 성적을 기록, 다시 이전 모습을 되찾으며 팀의 4번째 우승에 공헌하였다. 특히 이 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동안 무피홈런을 기록했다. 맞은 홈런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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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 9차전에서는 빗발치는 폭우속에서 승리를 지켜 냈는데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역대 한국시리즈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해 한국시리즈 성적은 7경기 12⅓이닝 2실점 비자책 3세이브 평균자책점 0. 한국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아직도 조용준하면 2004년 한국시리즈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오승환진필중이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뱀발로 자동차 이야기도 나오지만, 서술하듯이 자동차의 관련된 이야기는 와전된 장난으로 판명.
그러나 무리한 투구폼[25]과 직구가 아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포크볼 위주로 피칭한 것, 어찌보면 대학시절 ~ 프로 데뷔 첫 시즌 시절은 그야말로 진필중이나 임창용을 보일듯한중무리 투수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 때까지 있었던 혹사의 피로누적과 자기관리 실패까지 겹친 탓인지 2005년에는 부진했다.[27] 이 해에는 구원 등판만 하면 이상하게 불을 잘 질러 조라이터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그래도 삼성 타자들에게만은 강했다. 아니, 통산 성적으로도 미키 캘러웨이 수준의 삼나쌩[29]이었다고... 그래서 당시의 삼성팬들은 선발투수로 미키 캘러웨이가 나오면 처음부터 안봤고[30], 다른 경기도 잘 보다가도 조용준이 올라오면 채널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기도 한다.[31] 오승환이 나올 때 타 팀 팬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삼성팬들에게 투영시킨 선수가 조용준이었다. 2005년 부진의 원인은 어깨 부상이었고, 9월에 역시 어깨 부상이 온 정민태와 함께 수술을 받는다. 그럼에도 부진함이라고 볼 순 없지만, 20세이브는 거뜬하게 찍어줬다. 팀 투수들이 개판이라 조용준도 적당한 경기수에만 시합을 뛴건 변함없다.
그 후 2006시즌 부터는 아예 1군에서 빠지며 2년 동안 단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한 채 2군에서 재활에 몰두하게 된다. 구단에서는 그의 자기관리 소홀을 우려하여 대선배인 정민태와 함께 수술시키고 재활 프로그램을 짜줬으나, 일설에 따르면 은퇴가 임박한 노익장 소리듣는 정민태보다도 재활 훈련에 소홀했다는 얘기가 있었다.[32][33] 그리고 수술을 받고 1년도 안 되어 2군 경기에 투입한 것도 있다고 한다.[34]
조용준은 전체적으로 자기 몸을 좀 소홀히 여겼다.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어깨수술을 받았는데, 제대로 재활이 되지 않았고, 결국 프로 입단 후 다시 수술을 받으라는 진단이 나왔으나 그걸 무시하고 4년을 더 던진 것이었다.[35][36]
2007년 현대의 마지막 시즌에 그는 그 자리에 없었고 2008년에는 아예 연봉 미계약자로 남아 히어로즈[37]의 창단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동안 조용준의 거취에 대한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2008년 말에는 은퇴설, 잠적설 등 온갖 루머까지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히어로즈와의 연봉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뉴스만 나오다가 결국은 연봉 8천만원에 팀에 복귀한다.[38] 이후 2009년 8월 16일 마침내 1군에 모습을 드러냈고 9월 10일에는 무려 1,455일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9:8로 이기고 있던 9회 1사 1루 상황에서 등판해 김태균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다음 타자 이도형에게 끝내기포를 얻어맞고 전대미문의 역전패의 마지막[39]을 장식하며 정민철의 은퇴식[40] 더더욱 성대하게 만들어줬다.
이후 김시진 감독이 2010년에는 마무리로 기용해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시즌 직전에 신종플루에 걸려 훈련이 힘들어진 데다가 어깨 통증까지 재발하면서 스프링캠프 도중 신철인과 함께 조기 귀국했다.[41] 마무리 보직은 경찰청에서 갓 제대한 손승락에게 넘어갔으며, 손승락은 그 해 세이브왕을 차지한다. 이후 2010년 시즌 내내 강진 2군에서 재활만 하다가 2010년 10월 8일 자로 신철인과 함께 구단에서 방출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6월부터 아예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향후 복귀가 어려워진 만큼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다만 본인은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였고, 다른 팀에서라도 새출발 하겠다는 마음으로 자택 근처에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 자기관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2010년 이후 어떤 팀에도 둥지를 틀지 못했고, 끝내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당시 나이가 32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는데, 이 무렵 동기라고 할 수 있던 선수들이 현역으로 많이 뛰었던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쉽다.[42]
통산 116세이브로, 제대로 마무리로 뛴 시즌이 불과 4시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관리가 조금만 더 잘 됐다면 오승환[43]과 더불어 KBO를 대표하는 양대 마무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야만없. 그리고 조용준이 은퇴한 뒤, 그 오승환은 2016년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했다 KBO에 복귀했고, 2020년 현재, KBO 통산 세이브 1위는 오승환이다.

4. 은퇴 후


2011년에는 5월에 목동야구장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1년 6월 29일 간암에 걸렸다는 기사가 나와 팬들을 걱정하게 했다. 그나마 초기 수준이었다는 게 다행. 8월 23일 기사에 의하면 간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해당 기사 이때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입원 사실을 안 알렸는데 박승민 등 지인이 수소문해서 병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2013년부터 엠스플에서 박재홍과 해설을 맡기 시작했다. 해설 첫 데뷔전은 시범경기 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경기.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솜씨를 보였으며, 목소리가 좀 지루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44]
다만 메이저 리그 해설에서는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평이 좋지 않았다. 팬들은 제발 웬만하면 한국프로야구 해설만 하라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2014년에는 메이저 리그 해설만 했다. 그것도 새벽 경기만.[45]
그리고 이 해 연예인야구 자선 경기에 출장하기도 했다. 타자로 나와서 상대해야 했던 말년 최병장이 자신의 유행어를 응용해서 외쳤던 건 덤.이런 젠장 바뀐 투수가 조용준이라니!!
2014년 9월 24일 네이버 해외야구 MLB SHOW 코너의 "빅리그의 슬라이더 - 구간2. 슬라이더의 이면 with 조용준 위원" 편에서 한 청자가 삼성에게 강했던 이유를 묻자 당시 던졌던 시속 140km 대의 공이 슬라이더가 아니라 써클 체인지업이었다고 답했다. 자세한 내용
2015년에도 여전히 메이저리그 해설만 하고 있으며 국내 프로야구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만 출연했다. 나중에 밝히길 해설을 하면서 맞지 않는 분야와 비난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듯 하다.
2016년 RSB스크린야구 일산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일산센터 카페 최근 투구 영상(프로동네야구 유튜브)
2017년에는 강혁 감독의 부름을 받아 신일고 코치로 변신했다. 2017년 시즌 앞두고는 어떤 이유인지 덕수고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8년부터 인천에서 유소년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6월 26일.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서 경기도 지역화폐 슬라이더 게임을 했다. 오상민-박명환-조용준이 슬라이더만으로 과녁을 맞추면 경기도 지역화폐로 이뤄진 빙고판에 하나씩[46] 붙여서 빙고가 되면 그 상품을 기부하는 게임이었는데 은퇴 이후에도 녹슬지 않는 슬라이더 구사력을 보여줬다.
2020년부터 인천광역시 남동구를 연고지로 하는 사회인 야구단 조라이더베이스볼클럽을 창설하고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부터 운동뚱에서 김민경이 1일 개콘 야구단 선수로 활약할 때 상대팀으로 출장하기도 했다.

5. 기타 이모저모


원래는 불교 신자였으나, 후에 천주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어깨 수술 후 재활을 할 때 어깨에 성모 마리아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더는 어깨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새겼다고. 큰 수술을 한 사람들이 보기 흉한 수술자국을 가리기 위해 문신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것도 겸해서 새겼을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굉장한 악몽으로 남아있는 선수다. 타 팀 팬들이 느끼는 오승환 등판의 체감을 삼성 팬이 궁금해 한다면, 그 때 야구를 봤던 사람 한정으로 2004년 조용준 등판한 느낌이라고 말해주면 아마 200% 공감할 것이다. 당시에 야구를 보지 않아서 모르는 경우라면 마무리 투수로 니퍼트가 나온다면 어떤 느낌이겠냐? 고 되물어보면 바로 납득할 것이다. 2017년 현재 이 선수가 지도한 아기 사자 양창섭이 삼성에 왔다.[47]
여담으로 배우 안재모의 혼삿길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한다.[48]
아마추어 시절 같은 연세대 선수였던 이현곤과 함께 도핑 테스트를 거부하여 시드니 올림픽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전과가 있다.[49] 물증은 없지만 정황상 상당히 의심이 가는 부분. [50][51]]
프로에 있으면서 선발로 등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52] 다만 연세대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대학 시절 출전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등 국가대항전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선발 투수로 출전했다. 국대 선발투수로 기용되었을 정도면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은 충분했다는 이야기지만, 조용준이 마무리로만 기용되었던 건 작은 체구 및 어깨 수술 경력 등으로 인해 코칭스태프가 부상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KBO 데뷔전이후 연속이닝 무실점/무자책 기록을 갖고 있다.(무실점:18이닝/무자책:29 2/3이닝)
2020년 현재 대졸 신인 투수들 중 유일하게 구원으로 100이닝을 돌파한 선수이며, 고졸로는 임태훈이 마지막이다.[53]
현역 막바지 시절 후배 문성현에게 자신의 슬라이더 그립을 전수했다고 한다.
마구마구에서는 2002년 신인왕과 1점대의 방어율 및 마무리 100이닝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되어 레어밖에 없다가 엘리트 등급의 카드가 뒤늦게 추가되었다. 단지, 너무 짧은 전성기 때문에 레전드 카드 구현이 어려울 뿐. 현재 엘리트 카드는 2개다.
꽤 젊은 나이에 은퇴한 게 한인지 의외로 영상 출연이 잦다.[54]
조웅천, 조용훈과 현대 출신 조 씨 3인방 중 하나다. 이 중 조용훈과는 같은 시기에 뛰기도 했다.[55]
한창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던 2002년 말, 현대 대표로 프로야구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종족은 저그, 좋아하는 선수로는 이기석을 꼽았다고.

6. 박명환야구TV 출연


2020년 8월 출연하여 선수 생활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 2002년 신인 시절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했고[56] 그 계약금으로 바로 수입차를 구매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받은 계약금으로 아버지 빚을 갚았다고 한다. 채무를 갚은 뒤 부친은 조용준에게 "아들 고맙다" 라고 처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 다만 입단한지 얼마 안 돼서 중고로 외제차를 샀다는 썰도 동시에 풀었는데, 바로 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직 신인이 계약금 외엔 외제차를 구입할 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 외제차 값은 빚 갚고 남은 계약금이 맞고, 결론적으로 계약금을 일시불로 받았고 그 돈으로 수입차를 산 사실은 맞긴 하다. '바로' 산 게 아니었을 뿐. 바로 샀다는 얘기는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 외제차를 끌고 다니니 그 이야기가 어찌어찌 와전된 듯.
  • 현대 유니콘스 2군에 내려갔을 때 회식에 참석한 이야기[57]를 했다. 1군은 매일 소고기 회식을 하고 반면 2군은 어쩌다 돼지갈비 회식을 하는데 1군보다 2군의 선수 숫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250만원으로 리미트를 걸어놓고 회식을 하니 고기를 먹다가 회식을 중단시키자 매니저에게 "스톱 그런게 어딨어요? 오버된 금액은 제가 낼께요"하고 회식을 계속 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선수협 현대 대표였는데 현재의 선수협이 창단 당시 선수협의 취지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FA 제도 개선 등의 활동들이 1군 선수들에게는 좋지만, 2군 선수들의 복지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다.

7.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2
현대
64
109
9
5
28
(2위)
4
1.90
80
42
116
2003
47
53⅔
2
7
26
(3위)
1
3.52
52
19
39
2004
63
75
10
3
34
(2위)
0
2.28
67
25
56
2005
49
52⅓
2
1
27
(2위)
0
3.27
47
23
61
2006
1군 기록 없음
2007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8
우리
1군 기록 없음
2009
히어로즈
11
9
0
1
1
0
4.00
11
7
6
2010
넥센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5시즌)
234
299
23
17
116
5
2.59
257
116
278

8. 관련 문서



[1] 국어국문학과(1998학번)[2] 당시에는 176으로 반올림해서 말했다.[3] 언젠가부터 어깨성모마리아 문신을 하고 난 이후로 개종하였다. 아마 2010년 넥센 2군 구장인 강진 베이스볼 구장에서 사진이 나왔다.[4] 조용준 + 슬라이더[5] 영상의 스페셜은 신인상 특집 하이라이트 였다. 공교롭게도 상대팀인 KIA의 김진우와 당해년도 신인왕 대결을 하여 조용준이 승리를 했다.[6] 상대 타자는 이종범.[7] 박경완은 조용준과 1년간 현대에서 함께 한적이 있고, 김수경이 현대 입단한 그해 트레이드로 현대에 와서 4년반 동안 같이 했다.[8] 조용준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역대급 슬라이더를 구사했던 선배 투수 염종석의 별명에서 따왔다.[9] 프로필상 키는 176cm이지만 이보다 더 작다는 말이 있다. 본인은 175.6cm인데 반올림해서 176cm이라고 말했다.[10] 고등학교 시절 위계질서 문화(단체집합)와 코치들의 간섭으로 인한 자괴감에 야구를 그만두려 했는데 때마침 선수시절 자유 분방한 성격을 가진 부임한 장호연 감독과 면담 후 어깨가 좋다는 이유로 코치들의 일체 간섭을 받지 않는 약속과 함께 투수로 전환했다고 한다. 영상 링크[11] 고2때 연세대 입학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시작은 고려대학교 야구부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조용준의 공을 못 치자 고려대 감독의 눈에 먼저 들어왔고(2이닝 무실점에 4타자 연속 삼진), 이후 장호연 감독이 조용준의 이 활약상을 연세대 감독한테 얘기하여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 앞에서 라이브 피칭을 했는데 슬라이더를 미리 알려주고도 연세대 타자들이 공을 못 치자 그 다음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장호연 감독이 본인 선수생활에 최고 은사라면 은사인셈. 영상 링크[12] 당시는 드래프트 지명권이 영구 유지되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선언했거나 성장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고졸선수를 적당한 라운드에서 지명한 후 대학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준의 팀 후배였던 손승락장원삼 역시 이러한 케이스로 고교시절 신인지명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13] 하필이면 왜 국어국문학과일지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체육특기자는 체육 관련 학과에 학적을 등록하지만 이 당시엔 체육 특기자는 어차피 수업은 안 들을거 아무 학과나 원하는 대로 넣어주는 아름다운(?) 관행이 있었다. 당연히 국어국문 동문 취급은 안해준다...만 연세대 동문취급은 받는다.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국어국문학과는 특이하기는 했다. 당시 운동선수들은 원하는 과를 고를때 어느 정도 여학생들이 있으면서 수업을 안 나가도 학고를 안 맞기 쉬운, 그리고 프로에서 실패하거나 프로에 못 가도 취준을 하기 용이한(물론 IMF 이전 취준자 한정) 법학과, 경영학과 등을 선호했기 때문. 참고로 이건 지금까지도 체육 특기자가 원하는 과를 갈 수 있고, 운동부 출신이 오히려 취직에서 가산점을 받는 일본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다만 일본은 법이나 경영 말고 순수 인문사회 전공을 택하는 선수도 꽤 많다.[14] 은퇴 후 유튜브 박명환야구TV에서 썰을 풀었는데, 당시 일본프로야구를 동경해서 일본에 진출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98년도는 일본에서는 선동열,조성민,이종범,이상훈 등 한국 선수들이 NPB에서 활약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워둬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일어일문학과로 등록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연세대에 진학해보니 연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어서 그냥 꿩 대신 닭이라고 비슷한(?) 어문계열인 국어국문으로 등록을 했다고. 참고로 고려대에는 일어일문학과가 있다.[15] 같이 입단한 강귀태,김민우,이대환,조재호, 배힘찬 등이 입단을 했는데 조재호를 빼면 나머지 모두 2억 이상 받고 입단한 선수들이였다.[16] 현대 유니콘스 투타 통틀어 신인 계약금 중 최다액. 2위가 그 박재홍(4억 3000만원). 당시 현대 구단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용준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준 것[15]은 그만큼 조용준에 대한 기대치가 컸다는 거다.[17] 이 때 고교 동기 강철민 역시 한양대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98아시안게임 멤버이기도 하다.) KIA 타이거즈에 입단해 비슷한 계약금(5억)을 받았다.[18] 실제로 2000년~2001년 2시즌간 마무리를 뛰었다. 본인이 블론세이브 할 때마다 너무 멘붕이 오고 머리도 아프고 고통이 많았다고한다.[19] 2001년 96이닝을 던지며 13세이브를 올렸다.[20] 순수 세이브로는 두산의 진필중이 1위였다. 세이브는 31개[21] 조용준은 대졸이고 김진우는 고졸이라 프리미엄이 있고 고졸 신인 첫 탈삼진왕을 거머쥔 김진우의 신인왕 수상이 유력했으나 김진우가 그 해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전의 2이닝 2실점,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다.[22] 역대 신인 중 단일시즌 구원 포인트가 가장 많은 건 조용준.[23] 전년도 이닝 수를 보면 혹사에 가깝다. 2002시즌 당시 김시진 투수코치는 권준헌, 이상열, 신철인, 마일영, 송신영을 제외하면 던질 만한 투수가 없어서 8회에 집어넣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도 신철인과 송신영은 4점대 자책점, 이상열도 평균자책점 3.93을 기록할 정도로 썩 좋지 않아서... 그냥 유니콘스 선수들 방어율이 처참했다. 1선발 김수경만 봐도 방어율이 5점대 근접 이였다.[24] 특히 좌타자에게는 거의 마구 수준이었다고[25] 조용준은 우선 투수치고는 하드웨어가 작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관리했던 투수코치 김시진이나 고교시절 은사였던 장호연도 보자마자 선발투수로는 롱런은 힘들고 평범한 중간계투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 이를 극복하려고 투구폼을 굉장히 크고 역동적으로 가져갔는데, 그만 몸에 무리를 심하게 준 것.[26] 그래도 김진우는 복귀 후 2012년에 규정이닝을 채우고 2점대 방어율에 10승까지 거뒀다. 하지만, 2018년 재기에 실패하여 현재, 2019년 호주에 있는 야구 리그인 질롱 코리아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가, 멕시코 야구리그인 술타네스 데 몬테레이에서 야구를 하고 있다. 술타네스 데 몬테레이는 과거 KBO리그에 뛰던 많은 용병들이 잠시 거쳐 가던 곳이었다. 찰스 스미스카림 가르시아 등등 있다.[27] 일반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용준의 자기관리 소홀은 노장진, 임선동, 김진웅, 프로 동기 고졸 김진우와 함께 야구계에서 꽤나 유명했다. 안 그래도 김진우랑 연관되어 있는 것부터가...데뷔년도도 2002년으로 같고 서로 신인왕 경쟁도 하였고 서로 방황하다가 복귀한 것까지 보면 참...[26] 김시진 감독에 의하면 급작스럽게 스타 플레이어가 되면서 자만에 빠졌던 게 문제라고 한다.[28] 특히 그 재계 라이벌 시리즈로 유명한 벤치 클리어링을 만들었다[29] 현대에서 역대 삼성전 가장 강했던 투수들은 정명원[28], 정민태...[30] 3시즌 통산 선발로 나와 8승 무패 방어율 0[31] 아마도 2004년 한국시리즈의 여파가 컸을 것이다.[32] 그 때문인지 정민태는 2006년 10월에서라도 복귀하지만(1경기 등판), 조용준은 2007년이 다 지나가도록 복귀하지 못한다.[33] 다만 정민태는 복귀에 너무 서두른 나머지 2007년 승리 없이 7패 평균자책점 12.81을 기록하며 완전히 먹튀가 되어버린다. 그 덕에 조용준이 비교적 수월하게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34] 저렇게 되면 이동현 이나 한기주 처럼 재활기간이 길어 질 수 있다.[35] 이미 프로 입단 전부터 현대에서 조용준의 저런 몸상태를 알고도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한 것이었다.[36] 프로 입단 후 수술 받으라는 소견이었던 부상은 바로 Slap. 즉 어깨관절와순 파열 부상이었다. 이 부상은 수술 후 재활에서 복귀한 케이스가 MLB까지 통틀어도 극히 드물다. 따라서 구단에서도 재활과 출전 병행을 권유했으며, 본인도 이에 응한 것이다. 근데 약속과 다르게 이닝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것은 구단의 실책이라고 봐야 한다. 먼저 문제는 마무리 투수를 용병에게 맡긴 것이 패착이라고 본다. 이후는 감독과 투수코치의 문제와 선수 본인의 문제.[37] 2019년 지금은 키움 히어로즈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우리담배에서 스폰서 공급을 하는 우리 히어로즈다.[38] 당시에도 히어로즈는 그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했는데 시즌 후 60%의 선수들이 타팀으로 떠나거나 새롭게 계약을 했다.[39] 이날 서울 히어로즈는 9:0으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무려 11점을 내주고 역전패했다. 당시 9점차 역전승한국프로야구 기록이었다. 2013년 5월 8일 SK 와이번스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10점차를 뒤집는 승리를 거두면서 기록을 경신했다.[40] 이날 팬들과 정민철은 은퇴식 중에 눈물을 보였다.[41] 이때 야갤에서 김시진 감독 담배 타임이 더 늘어난다는 개드립이 있었다.[42] 과거 현대 시절 팀 선배인 송신영이나 박준수보다도 더 일찍 은퇴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김수경이 좀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를 했었다가 번복한 것이 2013년. 김수경은 2014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서 새롭게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완전 은퇴를 선택했다.[43] 조용준이 세운 최소경기 100세이브(197경기)를 돌파한(180경기) 유일한 선수[44] 여담으로 박재홍과 조용준은 현대 유니콘스 시절 2002년 한 시즌간 함께 팀 선수로 있었다.[45] 그래도 송진우, 염종석, 최원호, 진필중 등 이런 분들의 해설을 듣다 보면 저들에 비해 조용준 위원은 양반이다.[46] 슬라이더로 한가운데 맞추면 두개씩[47] 현재는 팔꿈치 부상이 있는지 1군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재활 훈련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48] 드라마 야인시대의 청년기 김두한 역으로 유명한 그분.[49] 관련기사[50] 그러나 이 두 선수가 도핑을 거부한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두 선수 모두 체격에 대한 벌크업이 없었고, 롱런한 커리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둘이 훈련을 미치듯이 연습하는 선수 또한 아니었다. 약물 도핑이라는 게 약물과 함께 반복되는 고강도 훈련으로 근육 부하를 버텨주면서 벌크업이 되는 거니까. 이현곤은 당시 이때부터 간염을 앓고 있어서 자율 훈련을 하고 있었고, 간염 환자에게 약물 도핑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조용준의 경우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훈련 태도가 매우 불성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둘은 당시 연세대 동기이자 절친한 관계였다. 향간에는 둘이 도핑 테스트인지 모르고 테스트 전날까지 신나게 노는 바람에 도핑 테스트 당일 거부했다는 루머가 있다.[51] 도핑 거부에 대한 또 다른 의견으로는 국가대표는 예비 엔트리라 무조건 차출이 아니었고, 당시 연세대는 정기전과 연고전 등의 경기가 남아 있어 의도적으로 거부했을거라는 추측도 있다. 2000년 연고전이 시드니 올림픽 야구 결승 이틀 후인 9월 29~30일에 걸쳐 치뤄졌기 때문에 신빙성은 있는 추측.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m=search&p=1&b=kbotown2&id=2771795&select=sct&query=%EC%A1%B0%EC%9A%A9%EC%A4%80+%EC%95%BD%EB%AC%BC&user=&reply=]|링크][52] 그러니깐, 역대 신인상 기준 수상 선수들 중 선발 없이 순수 불펜으로 신인상을 받은 선수 중 하나였다. 이후에 등장하는 선수가 오승환 그리고 흑역사를 쓴 임태훈도 있었다.[53] 임태훈 역시 중간계투로만 나왔고 별개로 2007년 한국시리즈때 첫 데뷔 선발로 뛴 적은 있었다. 문제는 시리즈 내내 장렬하게 홈런 3방이나 쳐맞고 침몰했다.[54] 선수 소개에 있던 영상도 다시 찾아보기 힘든 영상이다. 유튜브의 주인이 계정 탈퇴를 하면서 채널이 폭파 되어 옛 영상 자료들을 볼 수 없다.[55] 현대 팬들 중 조규제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현대에서 저조한 활약으로 묻힌 감이 큰 것 같다.[56] 보통 신인이나 FA등 계약금은 분기로 나눠서 준다. 7월과 12월.[57] 후배 조용훈도 회식에 대한 썰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