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재영
1. 개요
前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투수, 저니맨 외인구단의 감독대행.
2. 선수 경력
동산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봉황대기 MVP를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대형 투수로 주목을 받았고, 1988년 고등학교 1학년때 호주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의 엄청난 호투(8피안타, 11탈삼진)로 쿠바 전 승리투수(7:4 승)가 되어 프로와 대학교간의 스카우트 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2] 인하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고교시절의 활약을 그대로 이어가며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에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 후 1995년 태평양 돌핀스에 1차 지명되어 2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
프로 첫 해부터 선발 한 자리를 꿰찬 위재영은 13승 10패 4세이브 ERA 3.60로 신인으로서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아쉽게도 신인왕은 0.288 22홈런을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의 이동수에게 돌아갔다. 그에 대한 평은 50:50으로 갈리는데 아마에서의 위명에 비하면 못했다는 평과 태평양이라는 7위 팀에서의 분전을 감안하면 선방이라는 평이 있었다.[3]
데뷔시즌부터 풀타임 선발이라기보다는 유틸리티 투수로의 인상이 더욱 강했고 그때부터 이미 고질적인 허리 부상의 전조가 보였다.[4][5]
그리고 이듬해인 1996시즌, 팀의 이름은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었지만 위재영은 12승 7패 ERA 2.72로 활약을 이어간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와의 상대전적이 좋았던 관계[6] 로 1선발로 출격했으나 1차전에서 홍현우/최해식에게 연거푸 홈런을 맞으며 무너지고 '''3일'''[7] 만에 등판한 3차전에서는 4이닝동안 잘 던졌다가 5회초부터 볼 컨트롤이 안되어 결국에 강판 되고 만다. 2패를 기록한 뒤 첫 우승은 다음으로 미루게 된다.
1997시즌에는 5승에 그치며 잠시 주춤했으나, 1998시즌에 13승 8패 ERA 3.23을 기록, 이 해 감격적인 첫 우승[8] 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1999시즌 현대 홍보부장이 위재영의 면제를 위해 국군수도병원의 군의관에게 2,000만원의 뇌물을 건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파문이 일게 된다. 이 때문에 위재영은 한동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이후 가진 재신체검사에서 '''최종 면제''' 판정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복귀할 수 있었지만 6승 8패 ERA 4.10으로 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시즌을 보내게 된다.[9]
그리고 2000시즌 제대로 된 마무리가 없어 고심하던[10] 현대는 위재영을 마무리 투수로 전환시키기로 하는데, 위재영은 3승 2패 39세이브[11] ERA 2.09로 기대에 보답하며 팀의 두 번째 우승에 기여한다.
2001시즌에도 4승 2패 22세이브 ERA 1.82로 현대의 뒷문을 지켰으나,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 때문에 한동안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12] 황당한 것은 이 해에 위재영은 5월 한 달에만 12세이브를 올리며 지난해 진필중이 세운 월간 세이브 1위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5월 외 남은 기간동안 위재영이 올린 세이브는 단 10차례뿐이었다. 같은 해 시즌 10월 7일 마지막 경기에서 수원에서 벌어진 SK 와이번스의 홈경기에서 팀 동료이자 고향 선배였던 선배 김경기에게 홈런을 맞고 말았다.[13]
이듬해인 2002년, 현대는 위재영을 다시 선발로 보내는 대신[14] 결국 당시 신인인 조용준과 호성적을 올리던 신철인을 중심으로 불펜을 재편한다.[15] 하지만 위재영의 구위는 예전만 못했고 결국 5승 10패 ERA 4.59의 성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6] .
2003시즌에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4경기 등판에 그쳤다. 당연히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는 제외됐다. 2004시즌에는 10경기에 등판, 1승 1패에 그치며 완연한 하락세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이 해 2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위재영은 구단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시즌 중반에는 트레이드 요청까지 하게 된다.
결국 시즌이 끝난 후 현대는 위재영을 방출했고, 위재영은 2005 시즌을 앞두고 테스트를 거쳐 고향 연고 팀 SK 와이번스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현대와 연고지 문제 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사이가 나쁘던 SK에 구단과의 불화로 이적한 것을 두고 현대팬들에게는 배신자 이미지를 얻게 된다.[17] .
그리고 2005시즌, 위재영은 팀의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3승 2패 6세이브 12홀드 ERA 1.89로 부활에 성공한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시즌이 끝나고 3년 8억원에 FA 재계약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95이닝이나 던진 과도한 등판의 후유증으로 인해 2006시즌에는 3승 5패 ERA 4.91로 부진했고, 2007시즌에는 아예 전력 외 선수로 분류되어 1군에서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결국 2007시즌이 끝나고 SK에서 방출, 은퇴하게 된다. 위에도 서술했듯이 '''FA 계약 기간 도중 방출'''된 사상 최초의 사례[18] .
3. 은퇴 후
은퇴 후 고향인 인천에서 어린이 야구교실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2012년 초 모교인 동산고 코치로 부임했지만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 미비로 덕아웃에 들어가지 못했다.[19] 그리고 2012년 4월 6일,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사기도박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실 현대에서 방출되기 전부터 도박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고 돈을 빌려가서는 제 때에 갚지 않았다는 얘기가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퍼져 있었던 터라...#
어찌어찌 일이 잘 해결이 된 모양인지 풀려나 동산고 코치로 복귀하기는 했지만 시즌이 끝난 뒤 해임되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다시 동산고에서 투수코치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정식 코치는 아니었다) 2018년 저니맨 외인구단 인스트럭터로 영입되었다. 이후 감독을 맡던 김상현이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면서 5월달부터 10월달까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2019년에 동산고 코치로 복귀했다.
4. 여담
- 팔이 길어 별명이 '긴팔 원숭이'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1991학번[2] 고교생이 평균 150km/h를 던졌다 하니... 당시 초고교급 투수들의 레퍼토리이다. 150 넘는 속구와 변화구 1개... 그리고 혹사. 프로에서 폭망[3] 참고로 삼성도 이해 '''드럽게 못했었다'''. 롯데 마해영이나 해태 김상진 등등 프로 입단 동기생 중에도 신인왕 후보가 있었으나 아무래도 투고타저 시즌이었고 이동수의 성적을 따지자면 시즌 홈런 1위 김상호와의 홈런 갯수 차이도 불과 3개 밖에 나지 않은 2위였기에 이동수에게 신인왕 표가 몰렸다는 해석이 있다.[4] 현대 유니콘스의 팬북을 보면 위재영이 취미 활동으로 수영장을 다니는 사진이 등장한다. 여기에도 등장하는 사유가 허리통증 치유다.[5] 실제 그가 풀타임 선발투수로 뛴 것은 96, 98 시즌 2시즌 뿐이다. 프로 첫 해인 1995년은 선발과 계투진을 오가는 유틸리티 투수였고 1997년과 1999년은 부상 또는 현대 고위층이 병무청에 몇 천만원의 '''뇌물'''을 줬다는 등 여튼 좋지 않는 시선 때문에 제대로 뛰지 못했다. 결국 후술하는 것처럼 허리 부상 때문에 선발 투수에서 마무리 투수로 전업하게 된다.[6] 3승2패 ERA 2.50[7] 대개 80/90년대 투수들은 한국시리즈를 이렇게 뛰었다.[8] 당시에는 마무리 투수 조 스트롱의 삽질로 인해 현대 투수들은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대기를 하고 있었다.[9] 어찌되었든 현대 마운드는 그 해 선발 정민태와 2년차 막내 김수경, 맏형 정명원, 마당쇠 조웅천 이 4명을 빼고 다 털렸었다. 그나마, 기대주였던 최원호 마저 기대 이하.[10] 당시 정명원이라는 특급 마무리 투수를 갖고 있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전문 마무리 투수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1998년 KBO 리그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후 현대는 정명원을 선발로 전향시키는 조건으로 정명원의 대체재로 조 스트롱이라는 외국인 투수를 데려왔는데 세이브는 곧잘 올리면서도 허구헌날 땀만 흘리고 불만 질러댄 탓에 다른 투수들이 생고생을 해야 했다. 1999년 조 스트롱의 재계약에 실패하자 마무리로 돌아왔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고 그때부터 현대는 마무리 부재의 고민을 하게 된다. 위재영 이후에는 신철인을 거쳐 조용준이 마무리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11] 역대 삼청태현 마무리 중 1994년 정명원의 40세이브를 제외한 2위의 해당 되는 기록. 조용준이 현대 유니콘스에서 남긴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조용준이 세이브를 더 많이 올렸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34세이브(2004년)가 조용준의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다.(단 조용준은 이 해 '''10승'''을 거둔다.)[12] 이 때 위재영의 공백은 신철인이 96.1이닝을 던지고 13세이브를 거두며 간신히 메웠다.[13] 이 홈런은 김경기의 커리어 마지막 홈런이었다.[14] 이는 위재영 본인의 요청이기도 했다. 마무리를 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15] 신철인은 전년도 혹사의 누적으로 55이닝을 던지며 퍼져버렸고 결국 마무리 투수는 당해년도 신인 조용준에게 넘어간다. 조용준은 구원 부분 1위를 하여 조용준이 신인상을 획득한다.[16] 3년차 마일영이 그나마 조금은 위재영보다 잘했었다.[17]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간단히, 예를 들어 한화 이글스에서 뛰다가 FA로 해외로 진출한 이범호가 일본 생활을 마무리를 하고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을 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 반대가 있다면 KIA에서 한화로 건너간 이용규 정도.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들은 게 배신자라는 소리를 많이 들은 거 외에는 없다.[18] 두 번째 사례는 한상훈, 세 번째 사례는 조영훈, 네 번째는 심수창이다.[19] 그 와중에 고교야구 주말리그에서 동산고는 이미 투구를 마치고 교체되어 덕아웃으로 들어간 투수를 다시 마운드에 올렸고 기록석에서는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촌극이 빚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