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민

 




박승민의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보유 기록
한 타자 상대 최다 투구수
20구[4][5]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9번}}}
장용대
(1996~1999)

박준수
(2000~2004)


김동현
(2005)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7번}}}
서성민
(1999~2004)

박준수
(2005~2007)


팀 해체
{{{#fff [[키움 히어로즈|우리 / 서울 /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27번}}}
팀 창단

박준수
(2008~2011)


허도환
(2012~2013)
{{{#fff [[KIA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등번호 45번}}}
송산
(2011)

박준수
(2012)


박찬
(2013)
{{{#fff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7번}}}
최창호
(2011)

박승민
(2014~2018)


이건우
(2019~2020)
{{{#fff [[kt wiz|kt wiz]] 등번호 87번}}}
김형석
(2017)

박승민
(2019~)


현역


<colbgcolor=#000000> kt wiz No.87
<colcolor=#ffffff> 박승민
朴承珉 / Seung-min Park
[1]
생년월일
1977년 3월 18일 (46세)
학력
강남초 - 강남중 - [image] 서울고 - [image] 경희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2차 9라운드 (전체 67번, 현대)
소속팀
[image] 현대 유니콘스 (2000~2007)
[image] [image] [image]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1)
[image] KIA 타이거즈 (2012)
지도자
[image] 넥센 히어로즈 1군 불펜코치 (2014~2016)
[image] 넥센 히어로즈 1군 투수코치 (2017)
[image] 화성 히어로즈 투수코치 (2017~2018)
[image] kt wiz 1군 투수코치 (2019~)
1. 소개
2. 아마추어 시절과 지명
3. 프로 선수 시절
4. 지도자 시절
5. 역대 기록
6. 여담
7.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코치, 現 kt wiz의 투수코치.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는데, 현대 유니콘스의 마무리 투수이자 넥센 히어로즈 시절 준수한 중간계투로 활약했던 우완 사이드암 투수 박준수였다. 2012년에 개명했다.
주무기는 사이드암의 폼에서 나오는 슬라이더였다. 본인도 자신이 던지는 공 10개 중 9개가 슬라이더라 밝혔으며, 사이드암이란 걸 배제하더라도 매우 희귀한 스타일이었다. 이 때문에 구위가 좋음에도 불구하고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 승부가 자주 들어가는 편이라 패턴이 단조로운 편이였다. 그러나 제구력이 괜찮았고 슬라이더가 빠르고 각이 좋았으며 상황에 따라 변화를 잘 주었기에 그 것만으로도 타자를 요리했다. 싱커도 배우려 했으나 그 때문에 기나긴 재활을 겪어야 했다. 선수생활 막판엔 체인지업도 던진 듯 하나 아쉽게 다시 부활하진 못하였다.
2006년도와 2010년도, 기묘하게 월드컵이 낀 해에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월드컵 투수라는 별명이 있다.

2. 아마추어 시절과 지명


서울고 3학년 시절에 깜짝 호투로 팀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까지 올리며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당시 4강전에서 김선우휘문고와 연장 14회까지 가는 혈투 끝에 분패하였다. 그 전후로 큰 활약이 없었다.
199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지만, 경희대학교 야구부로 진학한다. 지명 순위 자체가 67번째로 상당히 낮은데, 팀에서도 그냥 즉석복권 긁는 기분으로 지명한 것. 이렇게 낮은 순번으로 지명된 선수들의 경우 보통 대학을 보낼 때가 많다.[2] 박준수도 그런 케이스였다. 경희대로 진학한 후 고려대학교 야구부 킬러라는 이미지 빼고는 딱히 보여준 게 없어서 대학 졸업 후 입단 당시에도 계약금이 고작 2천만원이였다.

3. 프로 선수 시절



3.1.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에서의 활약


[image]
실제로 프로 입단 후,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모두 9 2/3이닝 7실점(방어율 6.52), 8 삼진, 6볼넷, 피홈런 2. 거의 등판 기록이 없으며 2001년과 2003년은 아예 1군에서 등판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이런 무명시절에 치뤄진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상대팀의 조웅천임창용, 권오준, 박석진 같은 사이드암 투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배팅볼 투수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본격적으로 1군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05년부터다. 전반기에 그럭저럭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5월 말 한화전에서 만루홈런을 맞아 2군에 갔다 와서 6월 말 두산전에서 또 만루홈런을 맞아 '만루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하지만 8월 18일 1군에 다시 복귀한 후 완전히 각성하였다. 32 2/3이닝 8실점(자책 7, 방어율 1.93), 삼진 38개, 볼넷 6개라는 ㅎㄷㄷ한 성적을 남기며 시즌을 종료하였고, 현대팬들에게 어느정도 기대를 받지만 언론이나 타팀팬들에겐 전혀 주목받지 못했었다.
나이 30살이 되던 2006년에 드디어 꽃을 피운다. 당시 시즌 초반에 황두성이 마무리였는데, 황두성이 개막전에서부터 먼지나도록 두들겨맞고 성적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가자, 불펜요원으로 활동했던 박준수가 마무리로 기회를 잡으면서 확실하게 위치를 잡았다. 2006년 기록은 5승 5패 38세이브 평균자책 1.82. 아무리 투고타저의 한 해였다고 하지만, 무명의 선수가 나이 30이 다되어서 세운 기록으로는 정말 놀라운 수치다.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이 해 현대 유니콘스의 깜짝 2위에 한 몫 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가 한화 이글스에게 PO에서 졌다는 거지만.
2007년까지는 줄어들은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바깥쪽 슬라이더 승부가 잘 안 먹히며 지난 시즌보단 부진하였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피칭을 보여줬는데 2006시즌 말 싱커를 배우기 위해 무리한 결과 몸에 부상을 입는다. 원래 직구와 슬라이더 투 피치로 재미를 본 투수인데, 구종을 다양화하겠다고 싱커에 도전했다가 팔꿈치에 부상이 온 것이다. 그 결과는 무려 세 번의 수술이었다. 뼛조각 제거 수술, 신경 수술까지. 그렇게 팔꿈치에 세 번 칼을 댔고, 2009시즌은 아예 임의탈퇴로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2010년 극적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시즌 성적은 3승 3패 8홀드 평균자책 2.34. 우완 사이드암이 부족했던 넥센 히어로즈에게는 정말 천금같은 귀환이었다. 이 시기 주전 마무리로 손승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2010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뛸 일은 없었다. 여하간 넥센 투수진의 베테랑으로 오랜 재활도 경험했고, 끈기도 있었고, 구위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팀 투수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참고로 2010년에 이용규와 20구에 걸친 승부 끝에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낸 적이 있다. 이로 인해 용큐놀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리고 2012년 둘은 한 팀에서 만났다(...)

2011년 4월 8일 오랜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하지만 전성기 때의 구속은 나오지 않았고 사이드암의 특성상 왼손타자에게 많이 약했다. 이후로는 큰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등판할 때마다 이닝을 1이닝 이하로 먹은 탓에 점수를 잃으면 평균자책점이 훅 올라갔으며, 그래도 홀드는 그럭저럭 기록해주고 있었지만... 5월 9일까지의 성적이 ERA 5.73. 결국 이보근과 함께 5월 9일에 2군으로 내려갔다.

3.2. KIA 타이거즈 시절


2011년 11월 25일, 황두성과 함께 넥센에서 방출당했다. 넥센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박준수에게는 다른 곳에서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어 방출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12월 2일 불펜 강화를 시도하는 KIA 타이거즈가 그의 영입을 결정, 2012시즌부터는 KIA 소속으로 뛰게 되었다.
2012 시즌 5월 4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KIA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1군 무대에 콜업되어 스코어 3:3인 11회초에 등판하여 3타자를 상대하여 1이닝 12투구수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팀이 친정이었던 넥센 히어로즈. 이날 팀은 3:3으로 비겼다.
5월6일경기에서는 0.1이닝 6투구수 1피안타 무실점 홀드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후 2군으로 내려갔고,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2012년 시즌이 끝난 이후 방출되었다.

4. 지도자 시절


현역 은퇴 후 박승민으로 개명했다. 2013 시즌 종료 직후 넥센 히어로즈의 마무리 훈련 명단에 코치로 등장했다. 10월 26일, 김수경의 선수 복귀로 공석이 된 1군 불펜코치로 선임되었다고 공식적인 발표가 나왔다.
2016년 들어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신재영의 슬라이더가 그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손혁 투수코치와 함께 찬양받고 있는 중이다.
결국 2016 시즌 후 사임한 손혁의 빈 자리를 메워 줄 새로운 메인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2016년 마무리 투수로 완벽하게 정착한 김세현과 2017년 4월 맹활약하고 있는 최원태의 투심이 그의 작품임이 밝혀지면서 팬들에게 찬양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2017년 7월 31일에 브랜든 나이트와 보직이 맞바뀌어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갔다.
이후 <엠스플뉴스>의 취재 보도에 따르면 2018년 11월 15일 신임 이강철 감독의 제안으로 kt의 투수코치로 팀을 옮긴다. 이미 박승민 코치는 포스트시즌 직후 kt행을 결정지었으며 이강철 감독은 넥센 시절에 수석코치로 박승민 코치는 투수코치로 인연도 있고 이지풍 트레이너와 현대, 넥센 시절 인연도 있다.
물론 신임 이숭용 단장과 현대, 넥센 시절 인연도 있다. 기사 현재까지의 평은 배제성이 영점을 잡은 것과 주권이 사람이 된 것 등을 포함, 그리고 김민이 지난 시즌의 제구 불안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등 때문에 대체적으로 준수하다는 평.
2019년 박명환야구TV에서 출연한 조용훈이 가장 무서워 했던 선배들 중의 한 명으로 언급했다. 그 다음 해에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조용준도 말과 행동이 모두 FM이었던 선배로 말했다.

5. 역대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0
현대
5
5⅔
0
0
0
0
9.53
5
6
4
2001
1군 기록 없음
2002
2
2⅔
0
0
0
0
3.38
4
1
4
2003
1군 기록 없음
2004
1
1⅓
0
0
0
0
0.00
0
1
0
2005
29
42
1
1
0
1
3.86
37
14
43
2006
61
69⅓
5
5
38
(2위)
0
1.82
48
15
65
2007
54
50⅓
6
4
3
4
2.86
41
37
4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8
우리
34
27⅓
0
3
2
7
3.62
20
13
17
2009
히어로즈
1군 기록 없음[3]
2010
넥센
42
42⅓
3
3
0
8
2.34
30
20
25
2011
34
19⅔
2
2
1
8
6.41
22
12
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12
KIA
2
1⅓
0
0
0
1
0.00
1
0
0
<color=#373a3c> KBO 통산(10시즌)
264
262
17
18
44
29
3.13
208
119
216

6. 여담


마구마구에서는 06 엘리 박승민이 자그마치 97의 제구력을 달고 나와있다.그런데 이건 뭐 능욕도 아니고 놀랍게도 x형, 싱커 강화형이다.....0강화시 싱커 스탯은 89. 물론 고증 따위는 이미 어언 10여년전에 클리프 리의 케이스에서 보듯 저 우주 밖으로 던져버린 케이스이지만, 싱커를 배우려다 다쳤고 그게 선수 인생에 영향을 크게 준 케이스인데.... 게임 속 자신이 싱커를 신나게 던지는 걸 보면 이게 자신이 꿈꾸던 모습이라 흐뭇해할지, 괴로운 기억이 떠올라 싫어할지 참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7. 관련 문서


[1] 개명 전 이름은 박준수(朴準洙).[2] 당시는 2차지명의 지명권 유효기간이 4년이었다. 고졸의 경우 상위 라운드 지명선수만 입단시키고 중-하위 라운드 지명선수는 대학으로 진학시킨 다음 대학에서의 기량과 활약상을 보고 대학 졸업 후 입단을 시킬지 아니면 지명권을 포기할지 결정했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우 팀의 재정사정이 어려워지자 모두 고졸선수만 지명하고 전원 대학으로 진학시킨 해가 있었다. 한국프로야구/2004년/신인드래프트 대상자부터 지명권 유효기간이 4년에서 2년으로 줄었다.[3] 부상 및 수술로 시즌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