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성
1. 소개
전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로 활약했던 선수이자 현 삼성 라이온즈 1군 불펜코치. 현역 시절 별명은 '''"황장군"'''.
입단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해 묵직한 구위로 이름을 날렸다. 현대 유니콘스의 몰락 속에서 팀을 지켜 냈던 기둥이었으며, 팀에 대한 본인의 헌신이 컸다. 투수로서 가치가 부각된 2005년부터 시즌 내내 보직이 고정된 적이 없었다.
구속에 비해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이 일품이었다. 포심을 던질 때 중지와 검지를 붙여 던졌으며, 덕분에 포심이 컷 패스트볼과 유사한 궤적을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제구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는 평. 스태미너도 좋아서 선발, 계투 가리지 않고 기용이 가능했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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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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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즈 시절
성대 중퇴 후 1997년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1] 포수 출신이나 시력이 나빠 볼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어깨가 강해 당시 장호연 코치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했다.[2] 하지만 1군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1998년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황두성, 곽채진, 양준혁, '''30억원''' ↔ 임창용) 그런데 사실 황두성은 트레이드 카드가 아니었는데, 해태 타이거즈 실무자가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아 그 밥 잘먹는 투수"'''라고 해서 트레이드됐단다.[3] 사실 해태 타이거즈 실무자가 당시에 원했던 그 밥 잘 먹는다는 투수는 '''정현욱'''이었다고.[4]트레이드 당시 기사[5]
그 후 1999년에 처음으로 1군으로 올라오지만, 해태 타이거즈에서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한 채 2000년 시즌을 마치고 방출당했다.해태 선수 시절 2001년 현대 유니콘스에 이적하지만, 당시 탄탄한 투수진에 밀려 2004년까지 2군 생활을 해야 했다.
2.1. 투수혹사 대왕 김시진의 피해자
2005년 황두성은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심정수와 박진만이 FA 자격을 얻은 후 함께 '''삼성'''에 이적하며 현대의 전력은 무너져 가고 있었고, 에이스 정민태와 클로저 조용준 또한 부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피칭 내용을 보여주는 등 투수진도 그야말로 안습[6] .이 된 상태였다. 황두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1군에서 마당쇠로 뛰면서 4월 24일 데뷔 첫 승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생애 첫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10승 투수가 되었다. 2005년 기록은 '''1군 60경기 출장'''[7] , 방어율 3.29, 11승 9패, 128⅔이닝[8] , 137K. 그 후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이런 활약상 덕택에 2006 시즌에는 주전 마무리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개막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를 박준수에게 넘겼고[9] ,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이닝 '''2보크'''라는 프로야구 역사상 포스트시즌 3번밖에 없는 '''진기록'''을 세우는 등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10]
2007 시즌에는 미키 캘러웨이[11] 의 이탈로 투수진이 다 무너진 상황에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나오는 '''믿을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시 142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삼진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야구 국대 A팀에 승선한 경력은 적지만[12] , 의외로 국가대표 지역 예선이나 야구 월드컵 등이 열리면 거의 항상 발탁되었다. 특히 對 대만전의 활약으로 인해 대만의 악몽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2007년 야구 월드컵에서 대만을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며 승리했다.관련 기사[13]
팀이 히어로즈로 바뀐 후로도 투수진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08년 황-장-마 트리오 결성시 '''장원삼'''과 '''마일영'''과 같이 황두성도 처음엔 풀타임 선발이었고, 평균자책점 순위에 올랐으나, 이광환 감독의 지시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고 그 후 다카쓰 신고가[14] 오면서 다시 선발로 보직을 변경 하였다. 2009년에는 주전 마무리로서 9세이브를 기록[15] 하다가 후반기에는 선발로 투입되어 시즌 남은 기간 동안 2점대 방어율로 '''1선발급''' 투구를 보여주었다. 고정된 선발로 뛰었다면 전성기 동안 10승 투수로서 개인 기록이 화려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항상 팀이 필요한 자리라면 자진해서 그때마다 보직을 변경하였다.
이현승[16] 과 장원삼[17] 이 모두 팔려가 신진선수들로만 구성된 2010년 넥센 히어로즈 투수진의 핵심으로 부상할 것을 기대했으나 스프링캠프 도중 부상으로 2010 시즌 내내 2군에 머물렀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구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나이로 30살에야 전성기가 찾아왔고, 그 후 부진했던 2006년을 제외하면 정해진 포지션 없이 막 굴리며 혹사를 당했으니...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2011년 11월 25일, 박준수 등 11명의 선수와 함께 넥센 히어로즈에서 방출되었다. 구속이 지나치게 낮아 사실상 재기 불능으로 평가받는 상황인데다 막판에는 무릎 연골 부상도 당하였다. 나이도 많아 그대로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었고, 예상대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지도자 시절
이후 2011년 12월 13일,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서 코치 제의를 받아 잔류군 재활코치 계약을 맺었다. 그래도 본인은 잘 풀려서 만족해한다고.
후일 공개된 스포츠투데이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황두성은 김시진 감독, 넥센 히어로즈 구단에 대해 상당한 섭섭함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있던 도중에 받은 전화로 구단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2014년 3월부터 8월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2군 트레이닝 코치를 하다가 2020시즌부터 정현욱 코치가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면서 1군 불펜 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4. 여담
쌍둥이 형이 있으며, 가끔 동생의 경기를 보러 온 덕분에 경기장 관중석에 가끔 황두성이 앉아 있는 줄 알고 착각했던 팬들도 있었다.
별명은 "황장군"이다. 舊 현대 팬이었던 키움 팬 사이에서는 김수경과 함께 최고의 인기남.
상술했듯이 2007년 마지막 시즌이던 현대 유니콘스[18] 의 마지막 세이브 투수이기도 하다.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조용훈이 썰을 풀었다. 조용훈과 황두성이 원정숙소 룸메이트였는데 황두성의 선발 등판 1일전 밤 술에 만취한 조용훈이 객실 문을 세게 두드리고 TV에 소변을 보는 등 사고를 치자 황두성이 "너 내가 등판한 경기 말아먹으면 죽는다"는 말에 조용훈이 2이닝 삼자범퇴로 막았다고.
강속구 투수가 되기 위해 원포인트 강의를 구술했는데, 사회인 야구에서는 꽤 인기있는 지침서인 듯하다. 원포인트 레슨.
상술했듯이 평소에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이미지가 확 달라지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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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6. 관련 문서
[1] 사실 가장 가고 싶었던 팀은 OB 베어스였다고 한다. 이유는 배명고 선배인 김동주 때문에.....[2] 실제로 경기할 때 외에는 안경을 끼고 다닌다.[3] '키 크고 공 빠른 놈'이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있다. 조용훈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밥 잘 먹긴 한다고.[4] 해태 측에서는 받아 보니 정현욱이 아니여서 무를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미 유니폼도 준비된 데다가 입단식도 이미 끝내서 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5] 이 두 사람은 2020년 삼성 1군의 불펜코치와 투수코치로 재회한다.[6] 정민태는 2005/06 시즌 잠시 1군에 올라오다가 부상으로 2군 2007년에는 부상이 있었음에도 1군에 올라와 완전히 신나게 개털렸다. 조용준의 경우 2005 시즌 까지 1군에 있다가 2006년 부터 2군에서 뛰다가 어깨 부상으로 현대의 마지막 시절 까지 1군 등판을 하지 못했다[7] 선발로는 5번밖에 출장하지 않았다. 그는 중간계투였다!!!![8] 126경기를 치룬 시즌이라 규정 이닝을 넘겼다![9] 박승민은 사이드암 투수 로서 KBO 리그 잠수함 투수 중 한 시즌 최다 세이브인 38개를 만들었다. 98년 '''임창용'''의 34개의 4개를 더 쌓아 올린 것[10] 우연스러운 일지도 모르지만 준플레이오프 '''한기주'''도 보크를 범했는데 득점 주자가 '''비켜ㅄ아'''가 있었다. 플레이오프 역시 또 그 자가 있었다(...) 결국엔 한화가 이기고 포스트 시즌에서 탈락하는 고배를 마셨다[11] 시즌 중반에 팔꿈치 부상으로 퇴출 되었다.[12] 2009 WBC에 승선하였으나, 막판에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며 '''임태훈'''으로 교체되었다. 여담으로 임태훈은 이때까지만 해도 전 구단에서 호감이 있던 선수였'''었'''다[13] 대만 대표팀은 야구 월드컵 직후에 개최될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 출전할 최정예팀을 출전시켰고, 반면 대한민국은 야구 월드컵 출전팀을 구성할 때 늘 그랬듯이 프로야구 1군 포스트시즌 탈락팀 선수 + 2군 선수 유망주 + 상무, 경찰 선수 + 대학 야구 선수로 구성한 팀이었다.[14] 근데, 히어로즈 소속 당시 타자들이 물빠따여서 등판한 횟수가 얼마 없었지만 방어율이 거의 '''0'''에 가까운 수준이었다.[15] 당시 타고투저라 팀내 마무리들이 죄다 삽질을 해서 결국, 최종적인 마무리는 '''이보근'''이 차지를 했다.[16] 2009년에는 팀내 최다 13승[17] 2008년에는 팀내 최다 12승[18] 이후 유니콘스는 해체되고 이를 대체할 팀으로 히어로즈가 창단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