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

 


심정(沈貞)
'''1471년(성종 2년) ∼ 1531년(중종 26년)'''
1. 개요
2. 일생
3. 기타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시호 문정(文靖)이다. 1차, 2차 왕자의 난 당시 공신이었던 심귀령(沈龜齡)의 증손이다.[1]
기묘사화 당시 남곤, 김전, 홍경주 등과 사건을 일으킨 인물로 지목되지만 정작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중종 자신이었다. 경서 해석과 역사에 밝았으며 학문상으로는 관학파 유학자였다. 교묘하게 꾀를 잘 서서 꾀주머니 라는 별명도 있었다. 결론은 꾀로 흥한 자 꾀로 망했다(...)

2. 일생


1495년(연산군 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02년(연산군 8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며 갑자사화, 무오사화 등을 극적으로 피했다. 1503년 수찬을 거쳐 1506년 중종 반정이 터지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가 역모를 일으켰다며 남곤, 김전, 김극성(金克成) 등과 함께 폭로하여 상을 받았다. 반면 이 옥사를 훈구 대신들(특히 유자광)을 싫어했던 신진 사림들의 실제 (어설픈) 기도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록에 따르면 이 모의에 참여했던 김공저는 먼저 밀고하여 귀양에 그쳤고, 남곤, 심정 등은 뒤에 "좀더 천천히 알아보고 고하려고 했다"면서 고변했는데 상을 받았다(!). 여하튼 이런 사림에는 넓게는 조광조(!)까지 포함되었으나 불문에 부쳤으므로, 사림들이 이 사실을 늦게 고변한 남곤, 심정을 싫어하게 될 만도 하다. 하지만 심정 등의 입장에선 또 목숨이 걸린 것이었다.
1509년(중종 4년) 성천부사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1515년 이조 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이조 판서가 된 사람이 남곤이다.
1518년 형조 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의 사림파의 비난과 소인(小人)으로 지목되고, 이조 판서이던 안당(安瑭) 등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했다. 이후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형조 판서를 지냈지만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정국 공신도 삭탈되자 원한을 품고 김전, 홍경주 등과 기묘 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모조리 숙청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심사손(沈思遜)마저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이때쯤 되면 정광필, 안당, 남곤 등도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탄핵질에 우려를 나타내고 거리를 두게 된다.
1519년 이조 판서를 거쳐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그해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 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2])의 유언비어를 궁중에 퍼뜨리고 홍경주 등과 모의, 왕을 움직여 기묘 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일망타진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밤에 비밀리에 재상들을 부른 것은 중종이고 조광조를 비난한 것도 중종이다. 이 때문에 중종의 친위 쿠데타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심정은 조광조와 악감정이 있었어도 그냥 삭탈관직이나 유배로 끝내려 했지 사사까지는 너무 지나치다고 중종에게 건의 할 정도였다.
1522년 비변사 제조, 1527년 우의정에 이어 남곤, 김전 등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나 1527년 영의정 남곤이 죽고 김전마저 죽은 뒤 좌의정·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수하에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을 두고 권력을 독점하게 됐다. 세자 (뒷날의 인종)의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이조 판서 김안로(金安老)[3]와의 경계는 이때 더욱 격렬해졌는데, 이행 등과 함께 대신과 6조 간원을 총 동원하여 김안로를 밀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 직후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동궁을 저주했다는 작서의 변 사건이 터지면서, 경빈 박씨파로 몰려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의 탄핵으로 평안남도 강서[4]로 귀양갔다.
이항·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된데다가 김안로의 탄핵으로 경빈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사사되었다. 지못미..... 김안로 때문에 몰락했기에 죽기 직전까지 '''원수놈의 김안로!'''[5]를 연발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불과 기묘 사화 12년 만이었다. 후일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그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사면 복권되지 못하고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욕먹었다.
한편 개인은 남곤 못잖게 청렴했으며[6], 자기 가족은 끔찍히 챙겨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한편 유배지에 있을 때 변방의 만포 첨사로 있던 아들 심사손여진족에게 살해됐다는 비보를 접한다. 둘째 아들 심사순은 아버지의 일로 국문을 받게 되었음에도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았다가 결국 절명하게 되었다.

3. 기타


아우인 심의(1475년 ~ ?)는 스스로 바보 시늉을 내서 형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 일 없이 지나쳤다. 남곤과 심정이 뭔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심의가 들어오더니 "이 두 소인놈들아! 뭔 심보로 온지 몰라도 배설이라도 하고자 모였냐?" 라면서 낄낄꺼렸다고 한다. 남곤이 어이없어하자 심정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아우는 바보이니 대감이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남곤의 형 남포도 동생이 기묘 사화를 일으킨 걸 그렇게 부끄러워 했다고 전한다.[7]
하지만 심정은 아우가 진짜 바보임을 아닌 걸 잘 알았는데 이런 일화도 전한다. 남들 앞에선 바보처럼 굴던 심의가 하루는 형과 단둘이 있자 진지하게 "이대로 있다간 형님도 무고한 누명으로 죽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형님도 저처럼 미치십시오. 그러면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할지언정 천명대로 살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하게 "이미 원한을 쌓은 이 몸은 늦었으니 아우님만이라도 몸을 잘 간수하여 대를 남기도록 하시게."라고 대답했다. (혹은 아우가 위기에 몰렸을 때 탈출 하라는 암시로 쥐구멍을 잘 기억해 두라고 이야기를 하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받았다고도 한다. 아예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심정이 비참한 최후를 맞자 심의는 통곡하면서 몰래 장사를 치루고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생 첩과의 사이에서 75세와 83세에 서자를 본 심수경이 그의 손자였는데, 친할아버지 심정과의 나이 차이는 46세였다. [8]
[1] 사실 심귀령은 공신이라고는 해도 4등 공신으로 이름만 올린 수준이었다. 그냥 여말 선초의 무장 중 한사람으로 생각하면 된다.[2] 조씨에게 나라가 넘어간다는 뜻[3] 김안로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전의 동생 김흔의 아들이였는데, 김전이 중종 반정을 계기로 후배 사림파와 원수가 되고 자신은 중종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면서 외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4] 서울시 강서구가 아니다.[5] 이는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나온 것이다.[6] 일단 그들이 관학파 출신이었다는 걸 상기하자. 세도가 극에 달하게 되는건 권력이 견제 없이 집중 된 김안로, 윤원형 때의 일.[7] 하지만 남곤도 알고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면서 "심정... 자네 아우도 내 형만큼 현명하구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곤은 진짜 억울한 점도 있었는데 남곤은 어떻게든 조광조를 살릴려고 노력한 인물이였다. 원래 조광조를 죽이려 한 이는 중종인데, 정광필과 남곤이 결사반대하여 유배형으로 형량을 많이 낮추었다. 결국 중종이 조광조를 죽이려고 하자 남곤은 삭탈관직과 유배형으로 족한데 목숨까지 거둘 필요가 있냐고 사사에 반대했다. 그런데도 남곤이 사화의 원흉인 양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역시 중종의 꼭두각시로 놀아난 심정도 마찬가지.[8] 물론 조선 시대에는 법적으로 남자는 16살. 여자는 14살이면 결혼이 허용(1440년에 제정된 법이다.)되었기에 되려 나이 차가 그 시절에는 늦게 본 손자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증손자뻘을 볼 나이에 아들을 본 심수경이 독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