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곤

 


'''조선의 영의정'''
'''《第 58 代》'''
'''成宗 2年~
中宗 22年'''

'''제58대'''
'''1523.4.18~
1527.3.10'''

'''성명'''
남곤(南袞)
'''본관'''
의령 남씨
'''출생'''
1471년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대항리 상항
(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상항마을)[1]
'''사망'''
1527년#
경상도 밀양도호부
'''국적'''
조선
'''자'''
사화(士華)
'''호'''
지정(止亭)·지족당(知足堂)·지족(知足)
'''시호'''
문경(文敬)
1. 개요
2. 생애
2.1. 가계
2.2. 조광조와의 만남
2.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2.4. 중종반정, 기묘사화, 승승장구 그리고 최후
3. 사후
4. 시
5. 사극에서
6.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훈구파로 잘못 알려져 왔지만 실제 그는 사림파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고,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는 동문이자 친한 사이였다. '''그는 훈구파가 아니라 실은 임사홍과 함께 사림파에 의해 오점으로 기록된 인물이었던 것이다.'''[2] 또한 '''현대에 이르어서 재평가된 인물 중 한 명이다.'''
대국적으로 보자면 사장(詞章, 문장 + 시가)을 중시한 조선 초기 도학파의 마지막 걸물로 불린다.

2. 생애



2.1. 가계


고려 말 참지문하부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양주에 은거한 남을진(南乙珍)의 증손으로 조부는 남규(南珪)[3]이며 아버지는 곡산군수를 지낸 남치신(南致信)이다.# 개국공신 남재는 남곤의 조부 남규의 사촌 형으로서, 남곤에게는 재종조부로서 6촌 관계가 된다. 세조 대의 무신인 남이는 남곤의 사종손(四從孫)으로 10촌 관계이다.
사림파의 중시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직계 제자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김일손과도 친했다고 한다. 김일손, 김안국과는 7살 차이, 김굉필과는 무려 17살이나 나이차가 난다. 조광조와는 아래로 11살차. 다만 당시에는 나이차가 나도 망년지교를 맺는 관계가 꽤 많았다고 한다. 당장 오성과 한음이항복이덕형, 정몽주정도전도 나이차가 있었던 망년지우였다. 오히려 1,2살 나이 꼬치꼬치 따지는 건 현대에 들어 굳어진 풍토다. 물론 친구를 먹었다한들 함부로 이름 부르지 않고 상호존대하는 것은 기본 예의였다.
하지만 사후에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가계가 몰락했으므로 그의 가계는 연대도 맞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본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 사이에선 딸만 3명이지 아들이 없고, 서자로 1570년(선조 3) 식년시 의과에 급제하여 직장(直長)을 지낸 남승사(南承嗣) 한 사람을 두어 겨우 후손을 이어갔으므로 누구 하나 그에 대해 정확하게 재조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어려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무오 사화와 갑자사화로 죽을 위기를 넘긴다.

2.2. 조광조와의 만남


조광조 스승 김굉필은 갑자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고 김굉필에게서 배출된 다른 제자들인 김정국, 김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은 물론 반세대 차이나는 선배인 남곤 또한 즐겨 모셨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오사화 이후 시점이면 남곤은 이미 생존자로 끝발 높은 중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하루는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어떤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남곤은 눈길 한번 안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이렇게 받았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 보고 눈이 한번도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4]

그는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도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이 말을 마친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참고해야 할 것은 이처럼 '지나치게 냉정한' 인간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는 조선 시대에 흔히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한 야사는 다른 인물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며, 조광조 모친의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에 그저 야사 정도로 취급하는 게 좋을 듯 하다.[5] 남곤이 진짜 냉혹한 사람이였다면 조광조를 죽일때도 찬동하였을 것이다.
조광조 문서에 좀더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지만, 출처도 불분명하고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한 야사다. 너무 차갑고 냉정하다고 박한 대접을 받던 남곤은 정작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하여 대명 외교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으니 남곤 입장에서는 억울할 따름.

2.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성종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494년에는 과거에 급제했으며 검열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성종 때 외척 윤필상을 탄핵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유순정, 성희안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또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6]
그뒤 낭관, 직제학, 부제학, 좌부승지를 거쳐 연산군 초 도승지를 지냈다.
곧이어 성종은 죽고 연산군이 즉위했다. 연산군의 폐비 윤씨 추존을 성종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라 비난했고, 연산군의 행동에 테클을 걸다가 갑자사화 때 겨우 목숨을 건지고 유배된다. 1504년갑자사화로 유배지에 위리안치형이 내려짐으로서 자칫하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1506년중종반정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반정 공신들에게는 밉보였지만 중종반정을 긍정하고 지지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2.4. 중종반정, 기묘사화, 승승장구 그리고 최후


역모를 고변한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한 뒤 이조 참판, 대사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판서를 지내기도 했다. 1518년에는 종계변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변무를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이 문제는 나중에 홍순언이 해결하는 그 일이다.
1519년 심정(沈貞), 김전 등과 함께 중종의 비밀 명령을 받고 입궐,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것을 묵인했다. 조광조 문서에서도 드러나지만, 발의와 결정은 중종이 했다. 정광필 등을 설득하는 역은 본인이 맡았다고 한다.
그 결과 조광조(趙光祖),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파와 안당 등의 친사림적 재상들이 모조리 숙청됐는데 후에는 진짜 원인 제공자인 중종을 대신해 그가 모든 죄를 쓰게 됐다. 비록 심정과 홍경주와 함께 기묘사화를 준비했다고 할 지라도 조광조가 잡힌 이후에는 처벌 수위를 낮게 청하다가 부끄러움을 느껴 귀가했다고 했고, 조광조의 사사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슬퍼했다고 한다. '''실록을 보면 오히려 남곤이 조광조빠라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다.[7]''' 그후 좌의정을 거쳐 1523년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이 된 이후 떠오르고 있던 김안로에 대해 위험 의식을 느끼고 그를 유배시켜 버린다. 도학 정치를 조광조를 몰아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김안로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간신은 아니었다. 차림은 수수했고, 뇌물을 멀리했다. 또한 글을 잘 써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전담했었다고 한다. 당대의 대문장가였다. 애초에 조광조 측의 미움을 받은 것도 '''문장을 잘해서'''... 사실 심정이나 이행 등 남곤 일파들은 개인적으론 청렴한 인물들이었다. 차라리 사림의 지지를 받은 김안로가 사치했다면 사치했지... 반정 삼대신이 죽은 이래 윤씨 외척들이 등장할 때 까지의 관료들은 대부분 사림이며, 그래서 이 시대는 훈구 vs 사림으로 보기보다는 되려 선조 초기의 사림의 노소 분열과 유사한 강온 대립이라고 보는게 이해에 바르다.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던 셈이다.
남곤의 입장은 현실주의에 있었다. 조광조 측에서 '시나 문장 같은 거 모조리 없애야 됩니다!' 식의 발언을 하자 '그럼 중국과의 외교는 무엇으로 하겠습니까!'하고 반대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사화 이후, 땅으로 떨어진 학풍과 권신들의 행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등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조광조 일파가 과격하고 편향적이라 남곤을 포용하지 못하건 사실이지만, 남곤 무리들은 각 개인이 깨끗했을지는 몰라도 엄연히 구체제 모순에 영합한 인물들이었다. [8]
다만 위의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의 원인이 남곤이 현실주의자여서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현실주의자라고 해서 개혁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도 기묘사화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중종에게 돌아갔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남곤은 처음부터 조광조의 개혁을 완전히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본인이 기묘사화의 주범으로 몰리고 개혁을 지지하던 사림에게 주적으로 찍히면서 남곤이 중종의 뜻을 거스르면서 개혁을 시도하거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던 사람이 어찌 됐는지를 눈앞에서 똑똑히 봤으니... 공신 몰수에 반대한 주체이자, 공신들의 반발을 얻지 않아야 할 주체가 바로 누구였겠는가? 군주 중종이었다.
본인은 조광조를 죽음까지 몰고 갈 생각이 아니었으나, 결국 자신이 악명을 뒤집어썼고, 결과적으로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사림파의 차세대 리더라는 명망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결국 남곤이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펴고 싶어도 그럴 세력기반도, 동력도 없었다는 뜻이다. 영의정이 되었지만, 남곤이 할 수 있는 것은 일상적인 국정운영밖에 없었다. 즉, 해결책을 내놓지 않은게 아니라 할 수 있었던 일이 극히 제한되어있었던 것이다.
죽기 전 자신이 쓴 글들을 꺼내면서 "나는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나의 죄가 더해지지 않도록해라. 그리고, 나의 무덤에는 비석도 세우지 말고, 시호도 청하지 말거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광조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에 대해 속죄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가 쓴 글들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최후를 설명하였다.[9]
자신의 글들 대부분을 태우지 않고 남겼더라면 당시 문학과 시대, 그리고 남곤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기에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향년 57세. 조광조가 죽은지 8년 만의 조금 빠른 죽음이었다.[10]

3. 사후


세상을 떠난 뒤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김안로의 복귀로 그의 동지들은 4년 만에 풍비박산이 났으며, 당장 중종 말년부터 조광조 일파인 김안국이 복권 되었다.
이어 조광조의 후학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 13년) 관작과 함께 삭탈당하였고, 선조 초년에는 다시 관작을 추삭(追削)당하였다.
그의 외손자 송인중종의 서녀 정현옹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들 후손이 없었던 탓에 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서자인 남승사의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이극돈의 케이스와 같은데, 이건 사실 서얼은 이 당시 문과 응시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고, 진급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1][12]이후 조선사에서 서자로 고관에 오른 유자광 같은 사람은 씨가 마르게 되고, 당상관에 오른 허준은 족보에 서자라고 되어 있음에도 알고보면 적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 정도가 된다. 사실 허준의 경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던 선조의 영향이 더욱 크겠지만 말이다.[13]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썼으나 사화를 일으킨 인물이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후대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욕먹었는지 후에 현종 때 김만중허적을 남곤, 심정에 빗대어 탄핵했다. 뭐 탄핵 과정은 서인인 김만중이 좁게는 탁남, 넓게는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지만 말이다.[14][15] 그런데 허적은 서인 세력들과도 인척으로 엮어져 있었고 서인에게도 온건히 대했다. 아시다시피 허적은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익훈, 김석주와 인척이었다. 그러면 허적은 김만중, 김만기와도 인척이 되는데......[16][17]

4. 시


그의 문장은 앞서 말한 일화로 거의 사라지고 유일하게 시 "신광사"의 한수만이 전한다.[18]

庭前柏樹儼成行(정전백수엄성행) / 뜰앞의 잣나무는 삼엄하게 늘어서

朝暮蕭森影轉廊(조모소삼영전랑) / 아침저녁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돈다

欲問西來祖師意(욕문서래조사의) / 서쪽에서 온 조사의 뜻 물으려 하니

北山靈風送凄凉(북산령풍송처량) / 북산의 신령한 바람 서늘한 기운 보내온다

또한 무오사화에 죽은 김일손의 묘를 중종반정 뒤 이장할 때 추도시를 짓기도 하였다. #

5. 사극에서



6. 둘러보기



[1] 이 마을은 외조부인 호군 하비(河備)의 고향이며, 지금도 진양 하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457번지에는 남곤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남곤이 딱밭'''이라고 하는 지명이 남아있다.#[2] 사림에게 오점을 남겼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사림의 기준이다. 역사적 평가를 고려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사상만을 고집하는 등등 사림파의 한계와 폐쇄성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3] 남규는 임사홍의 외할아버지이다.[4] 나이 차가 1년, 1달, 1일 차이라도 칼같이 불평등해지는 현대 한국에 비해, 몇년백 전인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이 차가 3년~10년, 심지어 한 세대 차이가 나도 따지지 않고 친교를 맺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기에, 9년 차라 해도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5]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는데, 이쪽은 평가가 정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용두 화흠과 용미 관녕의 일화. 이 때 좀 더 인간적인 화흠을 관영은 선비도 아니라고 갈라서는데, 화흠이 악역이다. 조조쪽에 붙어서 화흠이 좀 대표적으로 디스당한 인물이라고 해도 해석이 정반대라는 것이 이체롭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한국이 더 극단적이고 교조적인 경향이 강한데, 야사에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6] 유순정과 성희안은 뒷날의 반정 공신으로 이때문에 중종 때 한번의 위기를 또 넘기기도 한다.[7] 다시 쓰는 간신 열전을 쓴 함규진은 이를보고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자 후회하고 자살한 유다에 빗댔다. 복음서를 봐도 유다 역시 죽일거라 생각은 못했는지 울부짖는 기록이 있다.[8] 흔히 조광조 일파의 개혁에 대해서 현량과나 소격서 폐지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성우 교수에 따르면 조광조 일파는 연산군의 폭정과 훈구파의 수탈로 악화된 조선을 복구시키기 위해 노비종모법, 한전제, 대공수미법 같은 개혁을 주장했지만 # 실현가능성이나 적극적 주장을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개혁책도 있었으나 도학적 입장이 먼저였다 하겠다. [9] 다만 작품에선 남곤의 아들들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물론 서자라면 무방하다.[10] 이것도 일반인들에 비하면 상당히 장수를 한 것인 셈이다. 일반인의 경우 30세 이전에 사망하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김안로도 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11] 성종 대 서얼 차별이 시작된 이래, 서얼 및 서얼 자손들에게 문과 응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즉, 원래 양천제였던 조선 초기에서 서서히 양반들의 특권이 본격화 되고, 그외 신분들을 본격적으로 차별한 시대가 성종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차대법(서얼), 재가자손 금동법, 종친사환 금지법 등의 정책은 성종대 훈구파가 시작했고, 중종 대에 등장한 사림에 의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분할 상속으로 훈구파가 세대가 지나며 자동 소멸 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처사였으나, 어쩌니저쩌니해도 훈구파는 자연히 사라졌다.[12] 당장 조광조부터가 낮은 신분에 있다가 벼슬에 오른 사람들을 용납을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광조가 서얼 출신 등용을 반대한건 아니다 조광조는 서얼 허통을 주장하였고 아예 중종에게 우리 나라는 땅덩어리가 작아 인물이 적은데 서얼(庶孽)과 사천(私賤 사노비)을 분별하여, 쓰지 않는다며 서얼과 사노비가 등용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13] 선조는 임진왜란 호송 공신으로 마의를, 종계변무로 역관을 공신에 올리는 파격적인지 감정에 휩쓸리는 모를 행동을 했다. 종계변무와 엮인 야담은 선조의 기행 때문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4] 그러나 정작 김만중의 선조는 남곤보다 더 보수적인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김만중의 선조는 다름 아닌 세조~성종 때 세조 찬위에 찬성하고 예종 시절 남이의 옥을 주관했으며 성종 때는 원상으로 한명회, 신숙주 등과 조정 국사를 주관했던 김국광이었다. 또한 김만중은 숙종의 외척이었는데, 형인 김만기가 숙종의 첫 번째 장인이었다. 게다가 김만중의 숙부인 김익훈은 소인배로서 온갖 공작정치를 주도해서 남인들을 다 싹슬이를 해버리려다가 허새의 옥사를 조작한 혐의로 후에 기사환국 때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15] 그러나 허적은 당시 같은 서인이자 병조판서였던 김석주와 연합해서 정권을 잡은 고명대신이었다.[16] 김만중의 종조부인 김집이 허적과 인척을 맺었다.[17] 그러나 허적이 경신환국 이후 사약을 받을 때 서인 세력에서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송시열이나 김수항, 김수흥, 민정중, 민유중, 이단하, 홍처량, 이정영, 정지화, 이상진 등은 허적을 살리려고 했다.[18] 하지만 알게모르게 전해져오는 문장이 많다. 일례로 소세양 부친 소자파의 묘비명도 있고, 절친 읍취헌 박은, 용재 이행과 함께 지은 시를 엮은 '천마잠두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