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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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의 항공사진.[출처] 대왕릉과 소왕릉 간 직선거리가 200 m에 달해 항공사진이 아니면 같이 있는 사진을 찍기가 힘들다.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87호'''
'''익산 쌍릉'''
益山 雙陵
Iksan Ssangn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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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산55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면적'''
13,88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백제
'''위치'''


1. 개요
2. 조사 내용
2.1. 대왕릉
2.2. 소왕릉
3.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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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하는 고대 무덤 2기. 7세기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적 제 87호.
쌍릉이라는 말 자체는 봉분이 2개인 무덤을 뜻하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예를 들어 황남대총도 무덤의 형식을 말할 때 쌍릉이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전북 익산백제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두 기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쌍릉을 다룬다. 둘 중 큰 것을 대왕릉(또는 대왕묘, 북총), 작은 것을 소왕릉(또는 소왕묘, 남총)이라고 한다. 이 왕릉은 이미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때에 도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했으며, 또한 백제 멸망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원래 주인이 누군지는 잊혀지고 마한의 무강왕의 능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하 본문은 국립전주박물관, 2015, 『익산 쌍릉』에서 대부분 참고함.

2. 조사 내용


1910년 세키노 타다시와 야쓰이 세이치, 구리야마 슌이치가 처음으로 쌍릉을 조사했지만, 이때는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직후 조선 전국 유적의 가치를 평가하는 현황조사 수준이었고, 1917년이 되어서야 야쓰이 세이치, 오바 츠네키치 등이 쌍릉 내부까지 조사했다.

일제강점기 조사보고서에서는 당시에도 능산리 고분군이 백제의 왕릉으로 전해진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쌍릉의 매장주체부가 능산리형 석실과 동일한 형태임을 인지했다. 무덤 두 기가 이미 구전으로 소·대왕릉으로 붙여진 이름이었기 때문에 전후 맥락을 고려하여 백제의 왕릉이라고 추정하였었다.
소왕릉은 이미 일제강점기의 조사 이전 시점에 이미 도굴되어 유물이 거의 없었고[1] 대왕릉도 도굴을 당하긴 했지만 그나마 유물이 있는 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왕릉은 목관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나중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전시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대왕릉에서는 치아를 비롯하여 목관에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 도금, 옥 재질의 장식구들이 나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루어진 발굴은 성의없이 진행되어 말이 발굴이지 발굴을 빙자한 도굴에 가까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조사기록을 남가지 않았다. 때문에 여러가지로 논란거리가 많았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최근 대왕릉에 대한 재발굴이 이루어졌고 향후 소왕릉에 대한 재발굴조사가 추진되고 있다.
2019년에 재발굴조사에서 길이 1m가 넘는 묘표석(墓表石) 두 점이 발견됐다. 각각 석실 앞과 봉분에서 나타났으며, 모양새가 전혀 다르다. 묘표석에 명문(銘文·금석에 새긴 글자)은 없었고, 국내에 전례가 없어 주목되고 있다.#

2.1. 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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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사 당시의 대왕릉 도면
대왕릉의 석실은 능산리형 석실 중에서도 비교적 늦은 편에 해당한다. 거의 같은 형태의 무덤으로는 능산리 동고분군의 3호분, 5호분이 있다. 특히 대왕릉은 유형이 같은 석실 가운데서도 아주 큰 편인 데다, 출토 유물이 영성하지만 그 장식된 정도나 도금된 양상이기 때문에 최고위급 무덤으로 추정하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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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릉
능산리 동 5호분
능산리 동고분군 5호의 도면에는 앞쪽의 묘도(연도)로 들어가는 부분까지 도시하였기 때문에 약간 달라 보일 수 있으나 현실과 묘도를 보면 거의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재조사 당시에 결과 대왕릉에서 출토된 토기는 신라토기이고, 발견된 치아는 20대-40대 사이 여인의 유골과 신라토기라고 보아 신라 공주까진 아니어도 신라 왕족 여인이 이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 따라서 대왕릉의 묘주에 대해서 서동요와 관련지어 선화공주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2]
그러나 이러한 이주헌의 주장은 학계에서 많은 질타를 받았다. 치아 분석은 마모흔 분석에 의한 것이여서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보고자 스스로가 그 자인했고, 쌍릉은 정식 발굴된 무덤이 아니라서 고고학적 정황도 충분하지 못하다. 고고학도들이라면 학부 때 배우겠지만, 치아 감식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학적 분석 기법은 고고학적 정황에 기반하지 못하면 고고학적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쌍릉은 추가장이 가능한 횡혈식석실분 구조이고, 일제 발굴 후 거의 100년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리고 이주헌이 근거로 제안한 대왕릉 출토 연질토기는 신라토기라 볼 수 없다. 이주헌이 발표한 세미나에서 토론자 최완규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 사실을 지적하였다.
정리하자면 피장자가 선화공주라는 증거는 여전히 없고 앞으로 검증해나가야 할 문제이다. 정황상 쌍릉은 백제 사비기 분묘인 능산리형 무덤 중에서도 후기 형식이면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에 무왕릉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소왕릉은 왕후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능묘의 입지가 산 정상부로 바뀌고, 봉분의 규모가 커진 것도 당시 당나라 황제릉인 헌릉과 소릉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 출토 사리외호와 사리내호는 배경을 원문 정으로 눌러서 원문으로 가득 채우는 어자문 기법이 돋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배경을 성글게 채운 형식으로 수말, 당초에 해당한다. 또 대왕릉 출토 옥 대장식구는 역시 당식 대금구가 정립하기 이전 양식으로 수나라 말 당나라 초기 형식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무왕의 수많은 수나라, 당나라 교섭기사 등에서도 당나라와 백제 무왕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루어진 재발굴 과정에서 사람의 뼈 102조각이 담긴 나무상자가 확인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사 보고서 내용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뼈와 뼈가 담긴 나무상자에 대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종합적인 분석을 실시하였다. 그리고는 2018년 7월 17일 오후 가톨릭대 병원에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뼈와 나무상자에 대한 분석내용을 발표하였는데 나무상자는 일제강점기 뼈를 담아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밝혔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뼈의 주인에 대해 만장일치로 무왕의 유골이 맞다'''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 자세히 살펴보면 뼈의 주인은 50대 이상 남성이었으며 키는 161cm에서 170cm 사이,[3] 그리고 골반뼈에 낙상 골절의 흔적이 있고, 특이점으로 희귀병으로 인대가 뼈처럼 굳는 광범위특발성뼈과다증을 앓은 흔적이 있는데 이는 어패류를 장기간 다량 섭취한 결과 발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즉 대왕묘에서 7세기 초중반에 사망한, 무왕의 생몰년과 일치하는 연령에, 평균 이상의 신장과 일반 백성들은 즐기기 힘들었던 고칼로리성 식단에 의한 노인성질환이 있었다는 특성들을 감안할 때 무덤의 주인은 백제 무왕 외에는 상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발굴조사를 주도한 최완규 원광대 교수의 제의로 무왕의 뼈앞에 학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서 예의를 보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한국 고고학에 있어 상당한 성과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왕릉은 무령왕릉처럼 지석이 발견되어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뼈에 대한 분석과 문헌 및 고고학적 정황들을 종합했을 때 무왕을 제외하면 사실상 비정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이는 단순히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뿐 아니라 각종 과학적인 분석방법까지 동원하여 대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정한 것으로, 학제간 융합적 연구에 있어 상당히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2. 소왕릉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으로 결정된 이상 소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제기되었다. 일단 소왕릉의 피장자는 무왕과 매우 가까운 인물인 것은 확실하므로, 그 후보로 무왕의 아버지 법왕설, 사택왕후설, 선화공주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왕릉은 대왕릉보다 훨씬 도굴피해가 심해서 피장자를 밝혀줄 새롭고 결정적인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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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 중상총(左), 소왕릉(中), 능산리 7호분(右) 출토 도금투금구[4]
소왕묘에서 출토된 관 장식품 중에서도 목관의 본체와 뚜껑을 결합할 때 사용되는 부분을 도금투금구(鍍金透金具)[5]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부착된 장식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화염문의 도안이라고 생각되는 이 도안은 능산리 고분군의 1호인 동하총에서도 확인되어 상호 관련성을 보여주며, 당대 도입되었던 불교, 도교의 영향력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양의 모티브는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와 같은 당대 불교미술의 문양요소와 비교검토되기도 한다. 참고로 대왕릉에서 출토된 목관의 널판에도 미륵사지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의 문양요소와 같은 인동문이 장식되어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많다.
대왕릉에서는 위의 도금투금구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쌍릉의 재보고서인 국립전주박물관(2015)에서는 대왕릉에서 출토된 금동투식좌금구(金銅透飾座金具)[6]가 목관에 붙어서 나온 점, 소왕릉에서 출토된 도금투금구를 끼울 때에 딱 맞는 점에 착안하여 목관을 복원 분석하였으며 도금투금구가 상술하였듯이 목관과 목관 뚜껑을 결합하는 도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한 바 대왕릉에서도 끼우는 부분이 있으니 원래는 소왕릉의 것과 같은 도금투금구가 있었으리라 추정하였다.
2019년 재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소왕릉에서 선화공주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서동설화의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3. 관련문서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2015, 『익산 쌍릉』 원색도판 1. [1] 그나마 나온 유물들은 6.25 전쟁 때 망실되었다.[2] 이하 소왕릉 단락 이전까지의 내용은 서동요 문서에서 옮겨온 것이다.[3] 현대인에 비하면 평균보다 약간 작지만, 19세기 조선 성인 남성의 평균신장이 161cm이었음을 감안하면 옛날 사람치고 큰 편이다.[4] 박정현, 2015, 6∼8세기 사리장엄구의 제작기술 연구 p.48와 조선고적도보 3에서 도면 인용 후 수정[5] 빵구장식에다가 도금한 금속 유물이라는 뜻[6] 정확하게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좌금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빵꾸가 있거나 걸쇠가 달린 리벳과 같은 형태의 유물을 지칭한다. 특정한 물건을 끼우거나 거는 부분에 장식된 부분을 좌금구라고 하며 넓은 판같은 곳에 붙어야만 좌금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 안장(넓은 판이 있음)과 안장을 고정하기 위한 끈을 연결하는 부분의 장식을 좌금구라고 한다. 목관에서의 좌금구라는 목관을 구성하는 각 판을 끼우거나 관 본체와 뚜껑을 결합할 때 쓰이는 부분 따위를 지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