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오 1세

 



아오스타 공작
아오스타 공작가 창설

1대 '''아마데오'''

2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image]
'''스페인어'''
Amadeo I (아마데오 1세)
'''이탈리아어'''
Amedeo I (아메데오 1세)
'''생몰년도'''
1845년 5월 30일 ~ 1890년 1월 18일
'''출생지'''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사망지'''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재위기간'''
1870년 11월 16일 - 1873년 2월 11일
'''배우자'''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조 (스페인 왕비)
마리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1. 출생과 유년시절
2. 스페인 국왕
3. 이후


1. 출생과 유년시절


스페인의 국왕.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 왕가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통일 이탈리아 초대 군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다. 1845년 5월 30일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왕비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1]의 차남으로 태어나 태어나자마자 아오스타 공작에 봉해졌다. 장남인 형은 움베르토 1세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다. 1867년 하원 의원 Francisco Cassins의 간청으로[2] 그해 생일에 도나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조(Donna Maria Vittoria dal Pozzo)와 결혼했다.[3] 뭐 여기까지 보면 그냥 왕위계승권이 없는 평범한 왕자였지만...

2. 스페인 국왕


1868년, 이사벨 2세가 물러난 이후 당시 스페인의 정권을 잡은 것은 급진 자유주의 정치가들이었다. 이들 급진 자유주의자들은 전국에 혁명위원회를 결성하고 주권재민, 보통선거, 노조 허용과 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정치이념들을 현실로 구현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혁명위원회에는 급진 자유주의자뿐만이 아니라 통합주의자,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상당수가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스페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빚어진다. 일부 정파는 공화정을 요구하는가 하면, 다른 정파는 새로운 군주를 추대하여 군주정을 지속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정국의 주도권은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에게 넘어간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세라노 장군은 선거를 실시하여 제헌의회를 선출했고, 무수한 토론 끝에 주권재민, 입헌군주제,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명시한 헌법이 통과된다.[4] 이후 세라노 장군은 후안 프림에게 정부 수반직을 물려주었고, 새로 수상이 된 프림에게 선결과제는 바로 새로운 군주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이사벨라 2세의 아들 알폰소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영국 측은 빅토리아 여왕의 시가(媤家)였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을 은근슬쩍 밀어주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센의 왕실이었던 호엔촐레른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고[5] 카를로스파는 또 자기 나름대로 이때다 싶어서 열심히 로비활동을 벌였다. 1년에 걸친 옥석고르기 끝에 프림은 사보이 왕실의 아마데오를 왕으로 임명하면서 아마데오 1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가 마드리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으로 그를 모셔왔던 사람인 프림이 암살당했다(...). 강력한 후원자가 없어지자 카를리스타, 알폰소 왕자(후일 알폰소 12세) 지지파, 민주 공화파가 반대의사를 내고 노동자들도 반대하게 되자 결국 2년만에 퇴위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그의 퇴위로 스페인은 공화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이후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알폰소 12세로 즉위했다.

3. 이후


이후 1890년에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왕자로서 별 탈 없이 살았다. 1876년에 첫 부인이 죽자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6]와 결혼했다. 4명의 아들을 보았으며, 1890년에 사망해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현악 사중주곡 '국화'를 작곡했다.
역사는 반복되는지(?) 그의 손자 아이모네(4대 아오스타 공작)는 나치 독일이 세운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왕 "토미슬라프 2세"로 추대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크로아티아 땅을 밟지 않고 2년을 버티다, 바돌리오 내각이 연합국에 항복한 1943년에 크로아티아 왕위를 포기한다. 그의 외아들 아메데오는 현 아오스타 공작가의 수장이다.

[1] 둘은 부계로는 사촌, 모계로는 5촌이다[2] 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원래 독일인 공주와 결혼하기를 원했다.[3] 여담으로 아마데오 공과 그녀의 결혼식 날, 신랑측 들러리 중 하나가 그녀를 저격하고, 궁전의 문지기는 자기 목을 그었으며(...), 왕의 측근은 말에 떨어져 죽었다(...). 또 행렬을 선도하던 대령이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었으며(...) 역장 하나가 신혼 열차 바퀴에 분쇄당해 사망했다(...)[4] 세라노 장군은 사적으로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지만, 제헌의회에서 여러 이해집단들이 토론을 거친 끝에 군주제를 유지할 것을 결정한다. 공화주의자들 역시도 몇몇 급진세력을 제외하면 '헌법만 준수한다면 아무래도 좋다'라는 심정으로 입헌군주제를 승인했다고 한다.[5] 호엔촐레른 가문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발끈해서 나폴레옹 3세빌헬름 1세에게 항의했던 것이 보불전쟁으로 이어지는 엠스 전보 사건이었다.[6] '''그의 누나''' 마리아 클로틸데와 나폴레옹 조지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제롬 보나파르트의 아들)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