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보나파르트

 

1. 개요
2. 출생과 어린 시절
3. 엘리자베스와의 만남
4. 베스트팔렌(Westphalia) 왕국의 왕이 되다
5. 제국의 몰락
6. 그 후 말년과 죽음
7. 제롬의 후손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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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왕국의 왕, 제롬 1세(Jerome I). 보나파르트 가문의 상징인 독수리가 옷에 새겨져 있다.
제롬나폴레옹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 1784년 11월 15일 ~ 1860년 6월 24일)는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막내 동생이다. 형제들 중에서 제일 장수하여 7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2. 출생과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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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Maria Letizia Ramolino).
1784년 11월 15일, 코르시카 섬의 주도(主都) 아작시오(Ajaccio)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코르시카가 원래 이탈리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의 집안은 이탈리아계였고, 본명은 '지롤라모 부오나파르테(Girolamo Buonaparte)' 였다.
부오나파르테 집안은 원래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이름있는 귀족 가문이었으나, 15세기 경 프란체스코 부오나파르테(Francesco Buonaparte)라는 인물이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으로 이주하면서 코르시카 섬에 새로운 부오나파르테 가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부오나파르테 집안의 남성들은 대대로 코르시카의 법원에서 근무해왔으며, 프란체스코의 후손인 카를로도 마찬가지로 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카를로는 주세페(Giuseppe) 부오나파르테와 마리아 사베리나 파라비치니(Maria Saverina Paravicini)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나, 19세가 되던 해인 1764년 2월 7일에 코르시카 섬의 귀족 가문인 라몰리노 집안의 소녀 마리아 레티치아와 결혼해 제롬이 태어난 1784년까지 총 7남 6녀[1]를 낳았으나, 제롬이 태어난 후 1년도 안되어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형제 중에서도 특히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미남형이었던 제롬은 어린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의 큰 인기를 얻으며 자랐다. 정작 둘째 형인 나폴레옹은 꽤나 점잖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튀는 성격의 제롬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제롬을 아끼던 사람은 어머니와 바로 위의 누나들인 파올라[2](Paola, 뒤에 프랑스식 이름인 폴린(Pauline)으로 개명), 카롤리나[3] (Carolina, 뒤에 프랑스식 이름인 카롤린(Caroline)으로 개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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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라
카롤리나

3. 엘리자베스와의 만남


1792년 보나파르트 일가는 프랑스 본토로 이주하였으며[4], 제롬은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해군으로 입대한다. 해군 복무중 미국에 건너갈 일이 생겼는데[5], 이 때 그의 첫 인연인 엘리자베스 패터슨(Elizabeth Patterson)[6]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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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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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를 입고 있는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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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제롬과 결혼할 당시 입었던 웨딩 드레스
제롬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Baltimore)의 한 연회장에서 엘리자베스 패터슨을 보고 반해 그녀의 아버지인 지역의 유지(有志) 윌리엄을 찾아가 결혼을 승낙받은 뒤, 그녀와 1803년 크리스마스 이브(12월 24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이 결혼은 일종의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그것은 가톨릭 신자였던 제롬이 장로회(신교)도인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함으로써 가톨릭 세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고, 그 당시 이미 프랑스의 권력자였던 형 나폴레옹에게도 도전을 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제롬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자유분방한 성격의 제롬이 행여나 어떤 사고나 치지 않을까 어머니 레티치아와 동생을 들들 볶았으며 떠나기 전까지도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총각 동생은 형에 대한 반발심으로, 엿이나 먹으라는 심산으로 대놓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해버렸으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과, 당시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은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다.[7]
이윽고 엘리자베스가 임신하자, 제롬과 엘리자베스는 볼티모어를 떠나 유럽으로 이주했으며, 형 나폴레옹의 통치 영역이던 프랑스로 들어가기 위해 엘리자베스를 포르투갈에 놓아두고 프랑스로 가서 형을 설득했다. 그러나 형은 제롬이 제멋대로 결혼을 한 것에 분노하며 절대 허락하지 않고, 제롬을 계속 질책하며 당장 엘리자베스와 이혼하도록 명령했다.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기에 제롬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나와서 다시 포르투갈로 향해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그녀의 아들이 프랑스 최고 권력자의 조카로서 프랑스에서 출생하기를 원했고, 제롬은 그녀의 뜻에 동의하며 그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프랑스 국경에 거의 도달했다. 그러나 이를 이미 예상한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해 그들의 프랑스 영토 진입을 막았고, 제롬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제롬과 그녀는 고민했고, 계속 결혼생활을 고집하다가는 갓 태어난 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엘리자베스는 끝내 제롬과 이혼을 하고 만다. 태어난 아들 제롬 나폴레옹은 엘리자베스가 고향 볼티모어로 되돌아갈 때 데려갔다. 그로써 제롬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4. 베스트팔렌(Westphalia) 왕국의 왕이 되다


제롬은 이혼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나폴레옹의 호출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제롬을 프랑스 제국괴뢰국(傀儡國)이었던 베스트팔렌 왕국[8]의 왕으로 앉혔다. 제롬은 베스트팔렌 왕으로 즉위하면서, 나폴레옹이 지명한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왕국의 왕 프레데리크 1세(Frederick I)의 딸 카타리나(Catherina) 공주와 결혼했다. 이는 제롬이 원해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형 나폴레옹이 당시 한 세력 하던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계획한 일종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한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제롬의 성격이 워낙 적극적이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카탈리나와의 관계는 꽤 원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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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과 부인 카타리나.
월트 디즈니애니메이션인 '겨울왕국(Frozen)' 에 나오는 한스(Hans) 왕자모델이 바로 이 그림의 제복을 입은 제롬이라고 한다.[9]
그림 속 제롬이 들고 있는 검은 나폴레옹이 동생에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제롬은 어릴 적부터 낭비벽이 심했고 사치스러웠는데, 그런 성향은 그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는 다른 왕의 직위에 오르면서 극대화되었다. 왕궁 내부를 값비싼 금은보화와 고급 가구, 식기류 등으로 장식했으며, 진기한 동식물을 왕궁에서 기르고[10] 한 술 더 떠서 왕국의 수도(首都)인 카셀(Kassel)에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지었으며, 특히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 도시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제롬의 이런 행동을 매우 못마땅했으며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낭비벽을 줄이라고 독촉했지만, 그의 낭비벽은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폴레옹도 동생이 화려하게 꾸며 놓은 도시를 보고는 그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감탄한 나머지 그는 동생이 만들어 놓은 건물을 모델로 해서 의회 등의 국가의 주요 시설들을 건설했으며, 또한 제롬도 나폴레옹이 있던 프랑스 본토의 도시를 본떠서 더욱 현대적이고 깔끔한 도시를 만들었다. 제롬의 노력으로 인해 베스트팔렌은 그 당시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이 높았으며, 후대 여러 건축가들도 이곳의 여러 아름다운 건물들을 모델로 유럽 및 세계 여러 나라에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재정을 낭비한 탓인지 프랑스 본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려서, 나폴레옹은 제롬이 아무리 요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5. 제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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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탄 제롬
1812년, 여전히 낭비벽에 빠져 있던 제롬은 형의 명령에 따라 3개 군단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고 강행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왕인데 숙소가 이게 뭐냐' 따위의 불평불만과 투정만 일삼으며 전군의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고, 결국 루이 니콜라 다부가 애써 가로막은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을 제때 덮치지 못했다. 제롬은 나폴레옹에 의해 지휘권을 박탈당한 후 제멋대로 귀국한다. 이때 탈출한 러시아군은 보로디노 전투를 사실상 무승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수렁으로 몰아넣게 된다.#1 #2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이후 나폴레옹의 제국은 동쪽의 프로이센(Prussia)과 러시아에 의해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제롬의 군대는 계속 패하기만 하다가, 1813년 10월 26일 수도 카셀이 함락되었다. 제롬은 서둘러 수도를 빠져나가 파리(Paris)로 도피했다. 이로써 베스트팔렌 왕국은 멸망하고, 그 지역은 프로이센의 차지가 되었다.
결국 프랑스 본토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앨바(Alba) 섬에 유배를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백일천하'로 다시 권좌에 복귀한 나폴레옹은, 잠수를 타고 있던 '''제롬을 다시 등용해''' 프랑스 육군 2군단 6사단을 맡겼다. 제롬은 워털루 전투에서 불필요한 공격으로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였고,#3 나폴레옹의 군대는 결국 패했다.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제롬은...

6. 그 후 말년과 죽음


용케 전쟁통에서 탈출해서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부인 카타리나는 마리 루이즈와는 달리 제롬의 곁에서 끝까지 함께했으며, 1835년 카타리나가 사망한 이후에 이탈리아에서 한 귀족의 미망인과 1840년에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848년 나폴레옹과 제롬의 조카인 샤를루이나폴레옹[11]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탈리아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제롬도 프랑스로 돌아와 그의 형이 묻힌 곳인 르 앵발리드(Les Invalides)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1850년에는 명예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샤를루이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에는 상원 의장을 맡아 죽을 때까지 조카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1860년 6월 24일, 말년까지 천수를 누린 제롬은 프랑스 빌제니(Villegenis)에서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77세였다.

말년의 제롬. 그는 나폴레옹의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실제 사진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7. 제롬의 후손들


제롬 본인의 존재감은 크지 않지만, 현재 프랑스에 있는 보나파르트가(家)의 사람들은 정작 나폴레옹의 후손이 아니라 거의 다 제롬의 후손들이다.[12]
제롬의 아들들 중 둘째 부인 카탈리나에게서 태어난 제롬의 막내 아들인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1822-1891, Napoleon Joseph Charles Paul Bonaparte)를 필두로 그의 장남인 빅토르 보나파르트(Victor Bonaparte, 1862-1926 나폴레옹 5세), 또 그의 장남인 루이 나폴레옹(1914-1997, 나폴레옹 6세), 그의 장남인 샤를 나폴레옹(1950-, 나폴레옹 7세), 마지막으로 그의 장남인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Jean-Christophe Napoleon, 1986-, 나폴레옹 8세)로 이어진다. 현재 보나파르트 종가의 수장은(확정되지 않음) 통칭 나폴레옹 7세인 샤를 나폴레옹이며, 그의 장남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 차대 수장이다.
현 가문의 수장 샤를 나폴레옹은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경제학 박사엘리트이며, 과거 은행에서 근무하거나 컨설턴트, 부동산 등을 운영했고, 최근에는 칼럼이나 을 쓰면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또 차대 수장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은 경제학, 수학 등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과거 뉴욕런던에서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 같은 은행에 근무하면서 애널리스트로 활동한 경험이 있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에 능통하다고 한다. 한편 장크리스토프의 할아버지인 루이 나폴레옹은 1997년 그의 장남인 샤를의 귀천상혼 문제로 장손 장크리스토프를 차대 수장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샤를은 이에 반발해 자신이 여전히 현 가문의 수장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장크리스토프는 이를 묵인하고 있다.
장남 :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erome Napoleon Bonaparte) 1805 -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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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패터슨에게서 난 아이이며,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죽을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그 후로 그의 자손들은 계속 미국에 정착하고 살았으며 그의 차남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Charles Joseph Bonaparte)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아래서 해군 장관 등을 지낸 미국의 주요 인사로, 미국의 대표적인 정보 기관 FBI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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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조셉 보나파르트
차남 : 제롬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Jerome Napoleon Charles Bonaparte) 1814 - 1847
→ 카탈리나에게서 난 아이이며,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習爵)했다.
장녀 : 마틸드 보나파르트(Mathilde Bonaparte) 1820 -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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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탈리나에게서 난 아이이며, 제롬의 외동딸이다. 당시 나이 85세로 장수했다.
삼남 : 나폴레옹 조제프 보나파르트(Napoleon Joseph Bonaparte) 1822 -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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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탈리나에게서 난 아이이며, 그의 후손이 번창하여 지금의 보나파르트 종가를 이루고 있다.
장남 : 빅토르 보나파르트(Victor Bonaparte) 1862 -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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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1914 - 1997

장남 : 샤를 나폴레옹(Charles Napoleon)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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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Jean-Christophe Napoleon) 1986 -

[1] 그 중 3남 2녀는 출생 직후 또는 유년기에 사망하여, 성인이 된 것은 8남매였다.[2] 1780-1825,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제롬의 누나. 당시 굉장한 미인이었으며, 얼굴 뿐만 아니라 몸매도 좋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 비너스(Venus)(...)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한번은 폴린이 비너스와 싱크로율이 잘 맞도록(...) 그녀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벌거벗은 몸에 천 하나만 감은 모양으로 석상을 하나 조각했는데(...), 지금도 이 석상이 남아있다. 후에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인 샤를빅투아르에마뉘엘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는 나폴레옹의 정치적 계략으로, 후에 폴린은 나폴레옹의 뜻을 받들어 그와 이혼하고 과스탈라(Guastalla) 공(公) 카밀로 보르게제(Camillo Borghese)와 결혼한다. 언니 엘리자(Elisa Bonaparte)와 동생 카롤린과 달리, 성격에 욕심이 없고 순했는데 순해도 너무 순해서 머리가 조금 모자랐다고 한다. 오빠 나폴레옹에게는 절대 반대도 반항도 하지 않고 나폴레옹 그 자신도 폴린을 손수 두 번이나, 그것도 당시 상당한 미남들이었던 르클레르와 보르게제에게 짝지워주는 등 매사 챙기고 아꼈기 때문에 그 당시 나폴레옹의 반대파들에게는 폴린이 오빠인 나폴레옹과 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하기도 했다. [3] 1782-1839.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제롬의 누나로, 폴린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출신은 보잘것없었지만 당시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휘하에 들어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나폴리의 왕 조아킴 뮈라(Joachim Murat)의 부인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남편 뮈라의 강력한 조력자였으며, 뮈라가 나폴리의 왕이 되는데 큰 공헌을 한 여자다. 이처럼 카롤린의 특유의 고집과 욕망은 언니인 엘리자의 그것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아마 이 보나파르트 자매들의 성격은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가 아이들을 키우느라 어려운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악착같고 꼼꼼한 성격을 지녀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뮈라가 무리하게 병력을 움직여 크게 패하고 도주하다 잡혀 총살을 당하고 나서 카롤린은 남편을 잃고 마찬가지로 카롤린도 새로 나폴리의 주인이 된 프란체스코 맥도날드(Francesco Macdonald)와 재혼하고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1839년에 플로렌스(Florence)에서 죽었다.[4] 사실 카를로는 죽기 전에 자신이 모시던 상관이었던 코르시카 섬의 관리이자 혁명가였던 파스콸레 파올리(Pasquale Paoli, 1725-1807)가 코르시카 섬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갈 때, 루이 16세에 의해 루이 16세의 코르시카 섬 법률 고문 대표에 임명되고 그가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자, 그도 프랑스로 국적을 바꿨다. 그래서 그의 가족도 프랑스의 국민이 되었기 때문에 레티치아가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어렵지 않게 프랑스 본토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5] 당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을 쟁취하던 시절로, 당연히 영국과는 적대 관계였고, 영국은 또한 프랑스와도 전통의 적대 관계였고, 또 미국의 독립 전쟁에 프랑스가 막대한 군사지원을 해 미국의 독립에 큰 도움을 주었던 관계로 자연히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으며, 양국의 군인들도 두 나라를 서로 오가면서 많은 교류를 하고 군사 정보를 공유했다. 제롬도 이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것이다. [6] 1785-1879, 원래 아일랜드(Ireland) 장로회 교인이었던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terson)의 딸로, 윌리엄은 미국 독립 선언 당시에 미국 메릴랜드(Maryland)에 정착해 철도 회사를 세우고 그 지역의 거부(巨富)가 된 사람이다.[7] 사실 제롬은 결혼할 때 처음에는 교황 비오 7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려 했으나, 교황은 신교도와의 결혼은 용납할 수 없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제롬은 불만을 느껴 자신의 신분(프랑스 최고 권력자의 동생)을 이용해 교황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결혼을 허락했다.[8] 현재 독일의 서쪽 지역 중앙에 해당하며, 중심지가 도르트문트이다. 12세기 말부터 이 지역은 공작령(公爵領)이 되었으며,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이 지역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이전 획득해 이 지역의 지도자를 찾던 중 당시 별 직책이 없던 막내 동생인 제롬을 데려다가 왕으로 앉혔으며, 1813년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그의 손아귀에 있다가 1813년 이후로는 프로이센의 영토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이 체결되었다.[9] 제롬의 형제 자매들은 원래 모두 13명이었는데, 겨울왕국에서도 한스 왕자가 13번째 왕자로 나온다. 한스 왕자의 본명은 한스 웨스터가르드(Hans Westergaard)인데, 제롬의 왕국 이름인 베스트팔렌(Westphalia)과 앞의 'West' 라는 글자가 똑같다.[10] 전 부인 엘리자베스도 동식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11]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제롬의 형인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 1778-1846)의 아들이다.[12] 후손이 아예 없다는 세간의 평과는 다르게, 실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후손이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항목의 7.2. 문단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