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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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50년에 태국에 세워진 나라. 수코타이를 멸망시키고 '''태국을 사실상 통일한 왕국'''
현재는 방콕 북쪽에 있는 주 이름이다.
2. 역사
2.1. 건국
1350년, 우통 왕[1] 이 아유타야를 세웠다. 아유타야는 그전까지 타이족을 주도하던 수코타이를 공격해 1378년에 속국으로 만들고 1438년에 완전히 병합한다. 한편 그전까지 동남아의 패자였던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도 계속하여 1431년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앙코르를 점령하였고[2] , 캄보디아는 곧 앙코르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앙코르를 더 이상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힘듦을 깨닫고 수도를 천도한다.
앙코르 이후 캄보디아의 수도는 로벡, 우동, 프놈펜을 전전했는데, 모두 지금의 시엠 리엡인 앙코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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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초기부터 '사끄띠나'라는 독자적 계급체계[3] 를 다지고, 불교와 힌두교 개념을 결합해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등 발전을 계속했으나, 이웃 버마의 따웅우 왕조의 침공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1547년[4] 따웅우 왕조의 따빈슈웨티의 공격으로 아유타야 왕 마하 짜크라팟은 부인 수리요타이 왕비를 잃었으며, 1563년 버인나웅의 침공[5] 으로 결국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고 말았다. 왕인 마하 짜크라팟은 버마에 인질로 끌려간 의혹이 보이며[6] 북부의 중심지 피싸눌록을 지키다 버마군에 항복한 반정공신 마하 탐마라차[7] 는 아들 나렛 왕자[8] 를 인질로 보냈다. 이후 마하 짜크라팟과 그 아들은 다시 저항을 하나 버인나웅의 재침공을 받고 아유타야는 함락되었다. 그리고 왕은 마하 탐마라차로 교체. 하지만 그게 버마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2.2. 나레쑤언 왕
인질생활에서 돌아온 나렛 왕자는 연이은 캄보디아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는데, 캄보디아는 아유타야 독립선언 이후까지 모두 환산하면 5번 침공을 했다. 나렛 왕자는 1581년 버인나웅이 죽고 버마가 반란에 휩싸인 틈을 타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연이은 버마의 침공을 모두 다 막아낸다. 그 기록은 무협지 수준이다.[9] 1584년 버마가 혼란에 빠지자 버마당국은 나레쑤언에게 반란진압을 요청하였고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수도 버고 일대를 약탈(아유타야인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하고 국경을 건너기 직전 독립선언을 하고, 그리고 쫓아온 버마군의 장군을 코끼리에 올라 큰 총으로 강 반대편에서 사살했다.[10] 버마의 속국이었던 란나의 침공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1586~1587년 버마왕 난다버인의 친정으로 일어난 아유타야 공성전에서 직접 반격해서 칼을 입에 물고 버마의 진지를 올라갔고 이후 난다버인이 나렛 왕자를 끔살시키기 위해 보낸 장군을 일 대 일 대결로 죽여서 버마의 침공을 끝냈다.
1590년 나레쑤언이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나렛 왕자는 1593년 농 싸라이 전투에서 일 대 일 코끼리 대결로 버마의 왕세자 밍기 스와를 죽이고,[11] 그 여파로 테나세림을 점령[12] 1594년 캄보디아를 침공해 수도 로벡을 함락시켜 캄보디아를 영원한 잉여의 길에 접어들게 하였으며 1599년 란쌍 격퇴, 란나 합병. 1600년 따웅우 공성전 등으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아유타야를 강대국으로 격상시켜버렸다. 이 이후 아유타야를 태국사학자 데이비드 와이엇(David K. Wyatt) 교수는 '아유타야 제국'이라는 장으로 구분해 버린다. 괜히 나레쑤언이 태국인에게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덧붙여 여기에 나온 무협지스러운 일화들은 신뢰성에서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전투의 승패 자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무협지적인 일화가 연이어 나온다고 해서 나레쑤언을 과장된 인물로는 결코 볼 수가 없다. 단지 동남아사가 연대기의 조합일 뿐. 참고로 나레쑤언은 영웅적인 닥돌형 캐릭터였고 실제 군사적인 업적은 친동생 에카토싸롯(나중에 왕이 된다)이 상당부분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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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쑤언 왕 관련 영화 포스터. [13]
2.3. 확장의 중단
나레쑤언이 잉와 원정 도중 사망하자 제위는 나레쑤언의 친동생 에까토싸롯에게 넘어갔고, 에카토싸롯은 그동안의 확장정책을 멈추고 내치에 들어간다. 하지만 나레쑤언의 팽창으로 아유타야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으며, 이웃 버마의 경우는 나레쑤언의 침공으로 분열되었고[14] , 곧 통일을 했지만 그동안의 확장정책을 멈추고 고립을 택하여 아유타야는 100여 년간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개방적인 문화성을 지녔던 아유타야는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으며 쏭탐왕 때는 유명한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 ? ~ 1630년)가 활약하기도 하였다. 다만 외국인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봉건제로 인한 친위세력의 부족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아유타야에 거주할 시 국왕의 친위군으로 병역에 임할 의무가 있었고, 이 때문에 아유타야에서는 외국인의 정계진출이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계속되어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때는 그리스계 영국인 콘스턴틴 풀콘(Constantine Phaulkon; 1647년 ~1688년)이 고위직에 오르고, 프랑스에 친선사절을 보냈고, 나레쑤언 왕 이후 버마에 뺐겼던 란나를 재점령 하고자 원정을 하기도 했다.[15] 이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나라이 왕과 교류를 환영했지만 속내는 태국 가톨릭화 및 식민지화였다. 당시 프랑스 측 사절이 그린 나라이 왕은 무슨 열대 덩치 큰 털보 왕으로 왜곡해 그렸다. 태국 측이 그린 나라이 왕 그림과는 인종까지 전혀 딴판이다!
하지만 지나친 개방성으로 태국 국내의 귀족층은 반발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이 원정을 와 지금의 방콕에 성채까지 짓는 상황까지 되자 태국 내에서는 프랑스가 가톨릭화를 강요하고 나아가 태국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일어난다. 결국 1688년 5월 나라이 왕이 중병에 걸리자 보수귀족들, 특히 코끼리 전투부대의 책임관이자 사령관이었던 펫 라차[16] 를 중심으로 반정이 일어나 콘스턴틴 풀콘이[17] 살해당하고 동년7월에는 중병에걸린 나라이왕이 사망함과 동시에 방콕에서는 프랑스군과 아유타야군의 공성전이 일어나 프랑스군이 철군하는 상황에 이르고[18] , 이후 펫라차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통이 다시 바뀌게되고 100여 년간 아유타야와 외국과의 교류는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19]
그동안 캄보디아를 놓고 베트남 안남국과 티격태격, 1694년 이후 분리된 란쌍을 영향력하에 두면서[20] 시간을 보내다 이웃 버마가 분열 후 재통일 됨으로써 16세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다시 버마와의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1740년 버마 남부의 몬족은 프랑스의 지원으로 독립하여 그들의 왕국 한타와디를 재건시켰고, 1752년 버마의 수도인 잉와까지 점령하여 후-따웅우 왕조를 멸망시켰으나, 꼰바웅 왕조를 세운 알라웅파야의 반격으로 1757년 다시 멸망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몬족에 의한 버마족의 학살이, 그리고 그 보복과정에서 버마족에 의한 몬족의 학살이 일어나 버마 내의 민족감정은 극심해지고 몬족은 버마족의 치하에 살기를 포기하고 아유타야로의 대규모의 엑소더스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몬족을 다시 버마로 보내기 위해,[21] 그리고 몬족의 독립을 지원했던 아유타야와의 갈등으로 인해 아유타야와 버마의 전쟁은 재발했고, 1759년 그는 아유타야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유탄으로 인해 알라웅파야는 전사하고 버마군은 철수하였다.[22] 그러나 아유타야는 더이상 예전처럼 강국이 아니었다.
2.4. 쇠퇴
1688년 반정이 일어나 기존의 나라이 왕이 속해있던 프라삿통 왕조가 무너지고 마지막 혈통이자 반정을 일으킨 펫라차의 양자였던 소라삭 왕자 역시 왕위를 거부[23] 하면서 나라이 왕계의 혈통이 끊긴다. 이후 왕사이자 재상이었던 펫라차가 반 플루 르앙 왕조를 열면서 르앙왕조의 초대 왕, 즉 아유타야의 28대왕으로 즉위한다. 펫라차 왕 시절까지는 그래도 아유타야가 어느정도 건재하였다. 30대왕인 타이싸 왕 시절에는 대규모 운하를 건설할정도로 국력을 과시하였으나 문제는 31대왕인 버롬마꼿 왕이 죽은 이후부터 시작된다. 버롬마꼿은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적장자인 에까톳은 지혜가 없고 아둔하니 그 동생인 우툼폰이 지혜로우니 왕이 되어야한다고 대놓고 선언해버렸고 왕위계승자로 지명되었던 우톰폰이 1758년 왕위에 올랐으나 에까톳 왕자를 지지하던 일파들의 미움을 사게되었다. 이로인해 정치에 별 관심이없던 우툼폰은 10일만에 형이었던 에까톳에게 선양하고 왓 프라사(wat prasa) 사원에 들어가 불교로 귀의하고 승려가 되었다.
이로인해 원래 적장자였던 에까톳이 왕위에오르니 그가 아유타야의 마지막 국왕인 스리야마린 보로마라차 3세이다. 동생의 선위로 예상된 형제간의 혈투는 일단 멈추게 되었으나 평소 인품과 성격을 알고있던 대신들 사이에서 스리야마린 왕을 인정해야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한 당쟁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스리야마린 왕은 실추된 자신의 왕권과 현 상황에 크게 실망하여 정치에는 관심을 떼고 국정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이때를 틈타 이웃 버마 꼰바웅왕조의 2대 왕이자 명군 알라웅파야는 상술한 바와 같이 버마주요지역을 대부분 장악하고 테나세림지역을 통해 아유타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먼저 수군을 보내어 원래 버마와 아유타야의 국경도시였던 다웨이를 우회하여 해안가를 따라 1759년 테나세림지역의 남쪽 끝 마을인 메르귀[24] 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메르귀에서 타닌타리강을 거슬러올라가 타닌타리 산맥을 넘어 아유타야와 방콕 인근의 펫차부리 지역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무서운 기세로 진군해오는 알라웅파야의 군대를 막기위해 보로마라차 3세는 남은 친위부대를 보내지만 모두 격파해버린다. 결국 1759년 말 아유타야는 포위당하지만 아유타야는 여러 운하와 강 해자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기때문에 수비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위에 문단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이듬해 알라웅파야는 가슴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다. 결국 버마군은 철군한다.
물론 1761년 알라웅파야의 군대는 버마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점령하지못하였던 무주공산 상태인 다웨이를 점령해 미얀마영토에 정식 편입시킨다.
아유타야는 버마와의 전쟁에서 국력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이상 재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얼마 못가 1765년 꼰바웅 왕조의 3대 왕 신뷰신은 아유타야 침공을 감행한다. 군을 2개로 나누어 한쪽은 북쪽에서 란나를 통해서 남진, 한쪽은 전통적인 버마의 아유타야 침입로인 삼탑로로 동진하였다.[25] 방 라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수개월 동안의 항쟁을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26] 프라야 딱 신[27] 등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패색은 짙어져 아유타야 왕이 속국이 되겠다고 항복을 애걸하였으나 그조차도 거절되었고[28] 1767년 아유타야는 버마군에게 함락당한 뒤 방화와 약탈을 당했으며,[29] 지배층과 백성 수만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 전쟁은 현재 미얀마-태국 민족 간의 감정을 나쁘게 하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그당시 버마는 청나라의 침공을 눈앞에 두던 상황이어서 아유타야 전토의 점령은 불가능했고 그 일대에 일부의 주둔군만 남기고 모두 철퇴하였다. 하지만 중심세력을 잃은 아유타야(이하 시암으로 서술)[30] 는 사분오열되었다. 이 상황을 해결한 사람이 프라야 딱 신(이하 딱신) 대왕이었다.
3.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17권: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56~57.
[지도설명] * 다이비엣(대월국) - 파란색
* 란나 왕국 - 자주색
* 란쌍 왕국 - 청록색
* 수코타이 왕국 - 주황색
* 아유타야 왕국 - 보라색
* 참파 - 노란색
* 크메르 제국 - 빨간색.[1]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중국 상인 출신으로서 태국 여성과 결혼해 태국인으로 동화됐다 했으며, 연대기에서는 중국 한족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 다른 지역에 있던 왕국에서 아유타야로 이동해 아유타야를 건설했다고 하는데...[2] 태국사 관련 책에서 이 이후 태국이 계속 앙코르를 점령하였다거나, 캄보디아가 태국의 속국이 되었다고 서술할 때가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캄보디아는 여전히 독립국이었으며 16세기 말까지 태국에 역습을 한다. 완전히 속국이 된 것은 나레쑤언 왕 때다.[3] 왕-승가-평민-노예 4개 계급 순이다.[4] 동남아의 기후적인 특성으로 전쟁은 양력으로 12월경 시작해서 그 다음해 봄이 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책에서 년도가 1년씩 차이가 날 때가 흔하다.[5] 이 전쟁은 흰 코끼리로 인해 일어났기 때문에 백상전쟁이라고도 불리운다. 버마가 아유타야에 흰 코끼리를 요구했고 아유타야에서는 논의 끝에 주나 안주나 어차피 전쟁을 일어난다고 해서 안 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예상대로 버인아웅은 애초부터 아유타야를 공격할 생각이었기에 버마는 이를 구실로 침공해왔다. 그래서 아유타야군은 전통적인 버마의 다이렉트 침공로인 삼탑로를 집중적으로 방어했고 북쪽에는 마하 탐마라차를 보내 부족한 방어를 보완하려고 했다. 하지만 버인나웅은 예전에 점령한 란나를 통해 북쪽으로 부터 침공을 했고 이를 예상못한 아유타야는 이 때문에 전쟁에 졌다.[6] 의혹인 것이지 정설단계까지는 아니다. 이 기록은 버마 측 연대기에 보인다.[7] 마하 탐마라차는 마하 짜크라팟을 왕으로 세운 1등공신이었다. 마하 짜크라팟의 즉위과정은 어지간한 드라마를 압도하는 스케일인데, 왕의 죽음 → 왕비의 섭정 → 왕비와 친척인 신하와의 불륜 → 왕비의 임신과 출산(!!!) → 유력한 왕자 제거시도 → 그 왕자의 출가 → 왕비가 옛아들 대신 새아들을 왕으로 추대시도 → 보다못한 신하의 쿠데타 → 왕비와 불륜상대자의 끔살과 출가한 왕자의 즉위의 과정을 거친다. 이 왕자가 마하 짜크라팟이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하가 마하 탐마라차이다. 그는 마하 짜크라팟과 수리요타이의 3남 3녀 중 장녀인 위숫까삿 공주와 결혼해 그의 사위이기도 했다.[8] 이후의 나레쑤언 왕[9] 하지만 어차피 동남아사는 연대기 중심인지라 원래 무협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만큼만 믿고 끝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괜히 말도 안되는 것을 썼다고 따지면 피곤하다. 다만 당시엔 버마가 혼란에 빠졌을 시기이니 나레쑤안이 보통이아닌 웬만한 사람보다는 리더쉽이 좋다면 찔끔찔끔 침공할 여력밖에없는 버마를 충분히 막아낼수도 있었을것이다.[10] 이때 쓴 총이 2.53미터라고 한다. 그 당시 총의 명중률상 총이 이렇게 크고 아름답지 않으면 강 건너편의 적을 맞출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이 사건이 실제라고 해도 템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11] 이때 했다고 하는 말이 간지폭풍이다. "형제여 그대는 왜 차양에 몸을 가리는가? 미래의 어떤 군주도 할 수 없는 그런 결투를 해보게나." 다만 사실과의 관계는 안드로메다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12] 편의상 영어발음으로 했지만 버마식 발음은 뜨닝다이(tanintharyi. 버마어에선 r이 없다.)이다. 태국과 버마가 서로 주고 받던 지역으로 결국은 버마령이 되었다.[13] 당시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유럽 식 플레이트 아머가 전해지면서, 일본의 남만동처럼 동남아에도 플레이트 아머를 현지화한 갑주를 만들었는데 그게 포스터에 나온 저것이다. 현지갑주는 원래 가죽제질이고 병사들이게 가슴과 배를 보호할수있는 복갑 그리고 머리만 보호할수있는 투구만 주는게 전부였으니.. 하지만 유럽식갑옷은 무게도 무게인데다가 동남아의 살벌한 더위로 인한 열피로 때문에 입은 사람은 곧잘 지치거나 열사병으로 죽어나가 많이 쓰이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나가기도 했다(…).[14] 이때 남부 버마는 프랑스계 포르투갈인인 필리페 드 브리투가 10여 년간 장악하기도 하였다.[15]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란나가 아유타야-시암의 영향력에 들어오게 될려면 18세기 말 탁신과 라마 1세의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16] 나라이 왕이 중병에 걸리고 얼마지나지않아 반정을 일으키고 스스로 재상의 자리에 취임하나 이후 왕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17] 당시 콘스턴틴 풀콘이 차기 국왕이 될 삐왕자를 이용해 태국의 통치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태국 귀족들에게서 경계의 대상이었다.[18]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터라 태국에 신경쓸수가 없었다.[19] 다만 그렇다고 아예 안한것은 아니며 네덜란드, 중국, 일본과는 교류했다.[20] 정확히 하면 루앙 프라방이 친-아유타야, 위앙 쨘이 친-버마였다. 그동안 아유타야는 영향력을 증가시키며서 영토(?)를 늘렸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다.[21] 전통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국가의 영역은 영토보다는 인민의 지배에 가까웠다. 16세기의 버마-아유타야 전쟁의 시작도 동일한 과정이었다.[22] 버마와 아유타야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아유타야에서는 유탄에 전사, 버마에서는 낙마로 전사라고 주장.[23] 소라삭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는 펫라차에 의해 부왕직을 하사받게 된다.[24] 태국어로 미에익[25] 알라웅파야 시절에는 테나세림산맥을 건너가느라 군사들이 지쳐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재대로 수행할수 없게되자 신뷰신은 아예 테나세림 산맥을 우회하여 테나세림지역의 북쪽통로라 할수있는 삼탑로를 통해 미얀마 남부해안도시인 모울메인을 지나 태국국경인 메솟으로 진군했고 남진하여 나콘사완, 롭부리를 수중에 넣으며 아유타야를 북쪽에서 포위하였다.[26] 태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어떻게하면 케이블에서 볼 수는 있는듯하다[27] 딱의 제후 신이라는 뜻. 이후의 딱신 대왕[28] 당연히 한번더 아유타야를 살려주면 나레쑤언대왕때 처럼 다시 버마를 박살낼께 뻔하기 때문에 살려두질 않으려는 속셈 이었다.[29] 이원복 교수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아유타야 파괴 과정에서 빼앗겨진 보물은 현재 양곤 미얀마국립박물관에 보존중이라고 하나 사실여부가 불투명하다.[30] 태국의 역사에서 왕조의 이름은 수도의 이름으로 한다. 이후 아유타야가 태국사의 주역이 된 이후 아유타야는 사얌이라고 불리게 되고, 이 명칭이 태국을 뜻하는 시암이 되었다. 아유타야가 멸망하기 전부터 아유타야는 시암이었고, 아유타야가 멸망하고 방콕-톤부리가 수도가 된 이후 더이상 아유타야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 왕조를 방콕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시암이라고 부른다.
* 란나 왕국 - 자주색
* 란쌍 왕국 - 청록색
* 수코타이 왕국 - 주황색
* 아유타야 왕국 - 보라색
* 참파 - 노란색
* 크메르 제국 - 빨간색.[1]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중국 상인 출신으로서 태국 여성과 결혼해 태국인으로 동화됐다 했으며, 연대기에서는 중국 한족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 다른 지역에 있던 왕국에서 아유타야로 이동해 아유타야를 건설했다고 하는데...[2] 태국사 관련 책에서 이 이후 태국이 계속 앙코르를 점령하였다거나, 캄보디아가 태국의 속국이 되었다고 서술할 때가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캄보디아는 여전히 독립국이었으며 16세기 말까지 태국에 역습을 한다. 완전히 속국이 된 것은 나레쑤언 왕 때다.[3] 왕-승가-평민-노예 4개 계급 순이다.[4] 동남아의 기후적인 특성으로 전쟁은 양력으로 12월경 시작해서 그 다음해 봄이 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책에서 년도가 1년씩 차이가 날 때가 흔하다.[5] 이 전쟁은 흰 코끼리로 인해 일어났기 때문에 백상전쟁이라고도 불리운다. 버마가 아유타야에 흰 코끼리를 요구했고 아유타야에서는 논의 끝에 주나 안주나 어차피 전쟁을 일어난다고 해서 안 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예상대로 버인아웅은 애초부터 아유타야를 공격할 생각이었기에 버마는 이를 구실로 침공해왔다. 그래서 아유타야군은 전통적인 버마의 다이렉트 침공로인 삼탑로를 집중적으로 방어했고 북쪽에는 마하 탐마라차를 보내 부족한 방어를 보완하려고 했다. 하지만 버인나웅은 예전에 점령한 란나를 통해 북쪽으로 부터 침공을 했고 이를 예상못한 아유타야는 이 때문에 전쟁에 졌다.[6] 의혹인 것이지 정설단계까지는 아니다. 이 기록은 버마 측 연대기에 보인다.[7] 마하 탐마라차는 마하 짜크라팟을 왕으로 세운 1등공신이었다. 마하 짜크라팟의 즉위과정은 어지간한 드라마를 압도하는 스케일인데, 왕의 죽음 → 왕비의 섭정 → 왕비와 친척인 신하와의 불륜 → 왕비의 임신과 출산(!!!) → 유력한 왕자 제거시도 → 그 왕자의 출가 → 왕비가 옛아들 대신 새아들을 왕으로 추대시도 → 보다못한 신하의 쿠데타 → 왕비와 불륜상대자의 끔살과 출가한 왕자의 즉위의 과정을 거친다. 이 왕자가 마하 짜크라팟이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하가 마하 탐마라차이다. 그는 마하 짜크라팟과 수리요타이의 3남 3녀 중 장녀인 위숫까삿 공주와 결혼해 그의 사위이기도 했다.[8] 이후의 나레쑤언 왕[9] 하지만 어차피 동남아사는 연대기 중심인지라 원래 무협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만큼만 믿고 끝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괜히 말도 안되는 것을 썼다고 따지면 피곤하다. 다만 당시엔 버마가 혼란에 빠졌을 시기이니 나레쑤안이 보통이아닌 웬만한 사람보다는 리더쉽이 좋다면 찔끔찔끔 침공할 여력밖에없는 버마를 충분히 막아낼수도 있었을것이다.[10] 이때 쓴 총이 2.53미터라고 한다. 그 당시 총의 명중률상 총이 이렇게 크고 아름답지 않으면 강 건너편의 적을 맞출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이 사건이 실제라고 해도 템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11] 이때 했다고 하는 말이 간지폭풍이다. "형제여 그대는 왜 차양에 몸을 가리는가? 미래의 어떤 군주도 할 수 없는 그런 결투를 해보게나." 다만 사실과의 관계는 안드로메다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12] 편의상 영어발음으로 했지만 버마식 발음은 뜨닝다이(tanintharyi. 버마어에선 r이 없다.)이다. 태국과 버마가 서로 주고 받던 지역으로 결국은 버마령이 되었다.[13] 당시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유럽 식 플레이트 아머가 전해지면서, 일본의 남만동처럼 동남아에도 플레이트 아머를 현지화한 갑주를 만들었는데 그게 포스터에 나온 저것이다. 현지갑주는 원래 가죽제질이고 병사들이게 가슴과 배를 보호할수있는 복갑 그리고 머리만 보호할수있는 투구만 주는게 전부였으니.. 하지만 유럽식갑옷은 무게도 무게인데다가 동남아의 살벌한 더위로 인한 열피로 때문에 입은 사람은 곧잘 지치거나 열사병으로 죽어나가 많이 쓰이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나가기도 했다(…).[14] 이때 남부 버마는 프랑스계 포르투갈인인 필리페 드 브리투가 10여 년간 장악하기도 하였다.[15]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란나가 아유타야-시암의 영향력에 들어오게 될려면 18세기 말 탁신과 라마 1세의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16] 나라이 왕이 중병에 걸리고 얼마지나지않아 반정을 일으키고 스스로 재상의 자리에 취임하나 이후 왕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17] 당시 콘스턴틴 풀콘이 차기 국왕이 될 삐왕자를 이용해 태국의 통치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태국 귀족들에게서 경계의 대상이었다.[18]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터라 태국에 신경쓸수가 없었다.[19] 다만 그렇다고 아예 안한것은 아니며 네덜란드, 중국, 일본과는 교류했다.[20] 정확히 하면 루앙 프라방이 친-아유타야, 위앙 쨘이 친-버마였다. 그동안 아유타야는 영향력을 증가시키며서 영토(?)를 늘렸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다.[21] 전통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국가의 영역은 영토보다는 인민의 지배에 가까웠다. 16세기의 버마-아유타야 전쟁의 시작도 동일한 과정이었다.[22] 버마와 아유타야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아유타야에서는 유탄에 전사, 버마에서는 낙마로 전사라고 주장.[23] 소라삭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는 펫라차에 의해 부왕직을 하사받게 된다.[24] 태국어로 미에익[25] 알라웅파야 시절에는 테나세림산맥을 건너가느라 군사들이 지쳐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재대로 수행할수 없게되자 신뷰신은 아예 테나세림 산맥을 우회하여 테나세림지역의 북쪽통로라 할수있는 삼탑로를 통해 미얀마 남부해안도시인 모울메인을 지나 태국국경인 메솟으로 진군했고 남진하여 나콘사완, 롭부리를 수중에 넣으며 아유타야를 북쪽에서 포위하였다.[26] 태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어떻게하면 케이블에서 볼 수는 있는듯하다[27] 딱의 제후 신이라는 뜻. 이후의 딱신 대왕[28] 당연히 한번더 아유타야를 살려주면 나레쑤언대왕때 처럼 다시 버마를 박살낼께 뻔하기 때문에 살려두질 않으려는 속셈 이었다.[29] 이원복 교수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아유타야 파괴 과정에서 빼앗겨진 보물은 현재 양곤 미얀마국립박물관에 보존중이라고 하나 사실여부가 불투명하다.[30] 태국의 역사에서 왕조의 이름은 수도의 이름으로 한다. 이후 아유타야가 태국사의 주역이 된 이후 아유타야는 사얌이라고 불리게 되고, 이 명칭이 태국을 뜻하는 시암이 되었다. 아유타야가 멸망하기 전부터 아유타야는 시암이었고, 아유타야가 멸망하고 방콕-톤부리가 수도가 된 이후 더이상 아유타야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 왕조를 방콕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시암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