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씨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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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흥 레 왕조가 성립된 후, 찐씨 정권과 함께 대월을 실질적으로 양분한 제후국. 명목상으론 후 레 왕조의 제후국이기에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다.
2. 역사
2.1. 초기
응우옌씨 정권을 개창한 응우옌호앙(Nguyễn Hoàng, 阮潢)은 군사력의 열세로 인해서 후 레 왕조 조정의 권력을 탈환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남쪽에서의 기반을 확실히 다질 필요를 느꼈다. 응우옌호앙이 남하하여 푸쑤언(Phú Xuân, 富春, 지금의 후에)을 거점을 삼음으로서 남진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응우옌호앙 때만 해도, 후 레 왕조의 권력을 차지한 찐끼엠과의 사이는 공통의 적인 막 왕조도 있고 해서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찐씨 정권이 후 레 왕조의 이름을 빌려 응우옌호앙의 아들인 응우옌푹응우옌(Nguyễn Phúc Nguyên, 阮福源)에게 조세를 바칠 것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전쟁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와중에 도착한 1명의 유럽인이 존재하였다. 알렉산드로 드 로드 신부.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는 프랑스인으로 1624년에 대월에 도착하여 반년 후에는 베트남어로 선교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1627년 북부로 옮겨서 선교하던 중 대월의 전통적인 지도이념이었던 유교 교의나 의식을 거부하라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찐씨 정권으로부터 추방됐다가 다시 입국하기를 반복하였다. 약 7년 동안 대월에 머물면서 드 로드는 대월의 언어, 풍속, 역사, 자원 등에 대해 많은 저작을 남겼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쓴 ‘동경의 역사’가 유명하며,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한 ‘베트남어, 라틴어, 포르투갈어 대조사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후 찐씨 정권과 응우옌씨 정권은 령 강(송 강)을 국경으로 서로 대치하게 된다.[3] 구전자료에 의하면 이 북-남 양국을 당시에는 처당외(Xứ Đàng Ngoài), 처당중(Xứ Đàng Trong)이라고 불렀고, 문헌에서는 북하, 남하라고 불렀다.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서는 교지국, 광남국이라고 불렸다. 명목상으로는 후 레 왕조 황실의 신하였기 때문에 국호나 연호는 쓰지 않았다.
2.2. 응우옌씨 정권의 남방 확장과 베트남 영토의 완성
한편, 응우옌호앙이 기반을 닦자, 참파는 더 이상 위협을 좌시하지 못하고 1611년에 먼저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1471년, 후 레 왕조의 성종에게 격파당한 뒤 완전히 쇠퇴기에 있었던 참파의 공격에 응우옌호앙은 마치 기다린 것처럼 반격에 나서서 영토를 다이 라인 갑까지 확대하였다. 1653년, 참파가 다시 공격해오자 당시 정권의 수장인 응우옌푹딴(Nguyễn Phúc Tần, 阮福瀕)은 다시 참파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판랑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이제 응우옌씨 정권의 영토가 오늘날의 카인 호아 성을 넘어 판두랑가까지 확대되자 참파는 수도를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7대인 응우옌푹쭈(Nguyễn Phúc Chú, 阮福凋)의 시기에 이미 참파는 판리를 중심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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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경의 베트남 영역
이후 응우옌씨 정권은 캄보디아로 눈을 돌렸다. 당시 캄보디아는 시암(후의 태국)의 속국이었고, 시암의 지배에 벗어나기 위해 당시 캄보디아 국왕인 체이 쳇타 2세는 혼인 동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늑대를 몰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온 것이었다.''' 사돈 관계를 빌미삼아 응우옌씨 정권은 캄보디아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고, 당시 잦았던 왕위 계승 분쟁 때마다 개입하여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1690년 캄보디아의 부왕(副王)인 앙논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응우옌씨 정권은 1698년까지 쁘르이 노꼬(ព្រៃនគរ)를 비롯한 쟈 딘, 미 토, 동 나이, 비엔 호아, 바 라이 등을 병합하였다. 이것으로 완주의 영토는 메콩강에 이르렀고, 대월인, 화교의 이주도 장려되었다.
1714년에는 시암만에 인접한 옛 캄보디아의 영토 하띠엔(Hà Tiên)을 다스리던 중국인 막구(鄚玖)가 시암의 위협으로 투항하였고, 1757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구실로 델타 북부까지 할양받았다. 그 외에도 바 싹, 쩌우 독 등도 세력에 넣어 베트남의 남부 영토가 완성되게 되었다. '''이 완주에 의해 베트남은 극적으로 확장을 하여 현재의 베트남 영토가 완성되었다.''' 더 나아가 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 서남부 해안지대까지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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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완성된 베트남 영토
2.3. 떠이선 농민 봉기와 멸망
전성기를 이룬 응우옌푹코앗 이후 즉위한 응우옌푹투언 시기엔 그를 옹립한 권신 쯔엉푹로안의 만행과 이전 응우옌푹코앗 때부터의 잦은 징세, 자연재해, 응우옌푹투언의 무능으로 민심이 악화되었고, 결국 1771년 도적[4] 응우옌냑의 반란으로 쯔엉푹로안은 실각하고 응우옌푹투언은 쟈딘성으로 도망, 찐씨 정권마저 광남의 부춘을 함락하자 응우옌씨 정권은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만다.
광남 대부분의 영토와 권한을 차지한 응우옌냑은 자신의 괴뢰인 응우옌푹투언의 친척 응우옌푹즈엉을 광남왕으로 옹립한 후 찐씨와의 협약을 맺어 광남의 통치자가 된다. 응우옌냑은 이후 쟈딘으로 도망간 응우옌푹즈엉, 응우옌푹투언을 비롯한 응우옌씨 일족들을 사로잡아 처형하여 응우옌씨를 완전히 멸족시켰다.
3. 역대 국왕
- 명목상으로는 후여가의 신하이기에 황제가 아닌 왕(王)임.
- 완조 건국후 개정된 묘호는 표기하나, 시호는 표기하지 않음. [예 : 열조(완주) / 태조(완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