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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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자(字)는 성재(聖哉)이다. 조선 말의 개화파 정치인이며, 친일 성향 개화파이자[1] 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이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의 숙부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2. 생애
1853년 음력 6월 29일 안광묵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을 왕래하던 인물. 그러다 1887년에 최초의 주일공사 민영준의 통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민영준이 갑작스럽게 사임하며 3개월 만에 귀국해 별군직·장위영 영관·전환국방판 등을 지냈다. 안경수는 이 시기에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화약 생산을 위한 제약소 설립과 신식 화폐를 발행하는데 힘썼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생하자 친일 성향의 개화파 관료로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우포도대장 겸 군국기무처회의원을, 제2차 김홍집내각에서는 탁지부협판을 지내면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다 1895년에 삼국간섭 이후에는 근왕파이자 친러파로 전향해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경무사와 군부대신을 지냈다. 그러나 을미사변 직후 군부대신에서 해임되었고 춘생문 사건에 가담하다 실패해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사면되었고 경무사와 중추원#s-2 일등의관직에 임명되었다.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윤치호, 이상재 등과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따라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의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7월, 김재풍, 이충구 등과 함께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박영효 등과 독립협회를 통한 복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고종은 안경수를 용서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의 주선으로 1900년 1월에 귀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수하였다. 그러나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영선군 역모사건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 미수사건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이후 대한제국은 안경수에게 안전을 보장했던 일본과 상당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교수형 당한 지 7년이 지나 1907년에 신원되었고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3. 여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1883-84년 즈음, 일본에 유학하여 방직을 배우는 과정에서 흑주교와 상당히 깊은 연을 맺었다. 흑주교회에 머물며 교리도 배웠고, 장차 흑주교가 조선에도 포교되기를 희망하였다. 1890년 일본인 흑주교 포교사가 한양에 '흑주교 경성대교회' 건축 착공행사를 할 적에 그 자리에 참석할 정도였다. 이를 보도한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안경수가 흑주교 신자였다고 보도했지만, 흑주교단의 내부 자료에서 안경수가 정식으로 입교했다는 내용은 없다고 한다. 안경수가 정말로 신자가 되었는데 기록이 없을 뿐인지, 아니면 교리도 배우고 관계도 깊이 맺었지만 입교는 하지 않았을 뿐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가 정식 흑주교 신자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깊게 일본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증거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