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도슨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를 주름잡은 호타준족이다. 메이저리그에서 300홈런 300도루를 달성한 여덟 명의 선수[1] 중 한 사람이다. 1977년 신인왕과 1987년 리그 MVP에 오르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강타자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외야수다. 별명은 매(The Hawk).
통산 성적은 21시즌 동안 타율 0.279, 출루율 0.323, 장타율 0.482, OPS 806, 순장타율 0.203, BB/K 0.39, wRC +117, 2774안타 438홈런 1591타점 314도루를 기록했다.
2. 선수 생활
2.1.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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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는 역대 최악으로 악명이 높다. 이유는 1라운드 지명자 25명 중에서 명예의 전당 입성자는커녕, 단 한 명의 올스타도 배출되지 않았던 것.[2] 이 해에 드래프트된 선수 중에서 가장 빛난 선수는 이 글의 주인공인 안드레 도슨이었는데, 그 도슨의 지명 순위는 겨우 12라운드 250번(...)이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로 고교 시절 미식축구와 야구를 병행하던 도슨은 미식축구 경기에서 무릎을 크게 다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평가가 박해졌다. 둘째로는 그가 진학한 대학교가 야구에 관해서는 전혀 명문이 아닌 플로리다 농공업 대학(Florida Agricultural and Mechanical University)이었다는 점.[3] 덕분에 고작 12라운드에 몬트리올에 지명받아 입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모든 구단 스카우트들의 완벽한 오판이었고, 도슨은 일찍부터 마이너리그를 평정하면서 1976년 확장 로스터 때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그리고 주전으로 출장한 첫 해인 1977년 0.282, 19홈런, 67타점, 21도루의 기록을 내며 신인왕에 올랐다. 그 뒤로 몬트리올을 떠나는 1986년까지 매년 꾸준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몬트리올의 중견수 자리를 책임졌다.
몬트리올 시절 총 5회의 20홈런-20도루를 달성했고, 1983년까지 매년 20도루 이상을 기록하면서 빠른 발을 자랑했다.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범위를 활용해서 6년 연속 골드 글러브에 선정될 정도로 수비력도 인정받았다. 몬트리올은 그가 있을 때인 1981년에 팀 역사상 유일한 PO 진출에 성공하는데, 도슨은 1981년과 1983년 두 차례 MVP 2위에 선정되는 등, 몬트리올의 간판으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몬트리올의 홈구장인 '''스타드 올랭피크'''(Stade Olympique de Montreal)는 몬트리올의 추운 기후 때문에 인조잔디가 깔린 구장이었고, 인조잔디가 깔린 구장에서 도루하고, 수비를 위해 실컷 뛰어다닌 대가는 그렇지 않아도 고교 시절 다쳤던 무릎의 악화였다. 결국 무릎 부상으로 인해 주력은 급격히 감소[4] 했고, 선수 자신도 잔부상에 시달리면서 마침내 FA 자격을 취득하는 1986 시즌 후, 무조건 천연잔디가 있는 구장으로 뛰기를 희망하며 사실상 엑스포스와 결별했다.
2.2. 시카고 컵스 시절
그런데 이 때 FA로 풀린 거물급 선수들을 두고 경쟁을 벌이면 FA 선수들의 몸값이 올라가니까 구단주끼리 적당히 작당해서 답합으로 몸값을 억제하려던 시절에 하필이면 도슨이 풀렸다. 결국 도슨은 계약도 못할 뻔했다가 결국 낮은 연봉을 감수하고, 시카고 컵스에 가게 되었다. 연봉은 고작 50만불이고, 25만불은 리그 MVP와 올스타전 출전 및 선발 출장이 조건으로 걸린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도슨은 이적 첫 해인 1987년 49홈런 137타점을 기록하면서 진짜로 리그 MVP와 올스타전 출장 및 선발 출전을 이뤘다. 이 때부터 컵스의 주포로서 활약했는데, 인조잔디에서 벗어나 비록 주력은 예전같지 않아 도루를 마음껏 하지는 못했지만, 빠른 발을 이용한 수비력은 다시 살아나서 두 차례 골드 글러브를 더 수상했고, 꾸준히 20개의 홈런을 쳐내면서 팀의 주포로서 활약했다.
컵스 시절에 도슨은 팀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스타 중 한 사람이었고, 39년 연속 PO진출 실패의 암흑기를 끝내고,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PO에 올라가는 컵스의 1980년대 짧은 중흥의 시기에서 활약했다. 단, 옥의 티라면 1989년 PO에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면서 0.105에 그치는 부진. 여하튼 노쇠로 인해 점차 기량이 쇠퇴하면서 그는 자연히 팀에서 나오게 되었다.
2.3. 선수 생활 말년
말년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먼저 2년을 뛰었다. 지명타자로 뛰면서 두 자리 수 홈런은 기록한 정도. 파업이 일어난 1994년에는 75경기에서 16홈런을 치면서 재기 가능성도 보였기 때문에 파업이 정말 아쉬울 법 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뛴 팀은 그의 고향인 마이애미에 위치한 플로리다 말린스. 여기서 2년간 대타 요원으로 뛰면서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그런데 말린스는 도슨이 은퇴한 바로 다음해인 1997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도슨이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끝내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했음을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3. 스타일
다재다능한 호타준족 스타일이었다. 스타드 올랭피크의 인조잔디 때문에 무릎이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에는 도루 실력도 좋았고, 홈런도 20홈런 이상은 터뜨릴 수 있는 타자였다. 정교한 유형의 타자는 아니어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시즌이 0.310이고 매시즌 3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전형적인 슬러거도 아니라서[5] 통산 홈런도 438개로 약간 애매하다. 선구안이 뛰어나지도 않아서 통산 출루율도 겨우 0.323에 불과하다. 결국 빠른 발과 준수한 장타력을 바탕으로 활약했던 선수다. 2000년대 선수와 비교하자면 카를로스 벨트란과 매우 비슷한 타입.
다만 무시할 수 없는 점이 비록 타이틀을 딴 것은 홈런왕 1회, 타점왕 1회, 최다안타왕 1회에 불과했지만, 매년 10위권 안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으며 꾸준히 활약을 했다는 것. 매시즌 20홈런, 100타점 정도의 성적을 냈으며 약체팀들에서 뛴 탓에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항상 꾸준하게 성과를 내면서 동시대에 무시할 수 없는 타자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장타력과 주력을 모두 겸비했고, 8회의 골드 글러브에서 알 수 있듯이 수비력도 좋았다.
4.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입성
명예의 전당은 9번의 도전 끝에 2010년 입성에 성공했다. 입성이 지연된 원인은 역시 좀 어정쩡한 성적, 낮은 비율 스탯, 부족한 임팩트 정도를 들 수 있다. 다만 부족한 임팩트는 MVP 1회로 만회했고, 낮은 비율 스탯은 300홈런 - 300도루 달성으로 메우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결국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선수 자신은 내심 시카고 컵스의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몬트리올의 후신인 워싱턴 내셔널스가 과거의 역사와 다소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6] . 실제로도 도슨은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그의 등번호 10번이 영구결번되었다가 워싱턴으로 연고가 이전된 후, 취소되었다가 2010년 다시 부활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 때문에 더욱 컵스 모자를 쓰고 가기를 원했지만, 웨이드 보그스의 구단 선택 과정에서의 소문 때문에[7] 모자 선택의 권한을 가지게 된(물론 선수 본인의 의사를 우선적으로 존중하긴 한다) 명예의 전당 위원회가 모자를 엑스포스 모자로 결정하면서 결국 몬트리올 엑스포스 모자를 쓰게 되었다.[8] 사실 성적이나 기간 모두 몬트리올이 더 길고, 더 좋긴 하다. 단지 임팩트 있는 시즌이 시카고 시절이었을 뿐이다.
도슨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되자, 내셔널스는 8월 10일 홈구장인 내셔널스 파크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당사자인 도슨뿐 아니라 앞서 엑스포스 소속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던 전설적 포수 게리 카터도 초청되었는데, 도슨과 카터 모두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상기된 표정으로 행사에 임했다. 심지어 도슨은 결국 눈물을 보이기도. 이 행사뿐 아니라, 과거 지워버렸던 영구결번도 다시 비공식적으로나마[9] 부활시키는 등 오늘날 내셔널스는 과거 엑스포스의 역사를 이전에 비해 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Center Field (13th)
6. 은퇴 후
2008년부터 플로리다에 있는 장례식장을 소유하고 직접 운영도 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장례 절차를 직접 주관하기도 하면서, 평상시와 같은 망자에 대한 대우를 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말이 기사를 통해 나오기도 했다. #
7. 관련 문서
[1] 나머지 일곱명은 윌리 메이스, 본즈 부자, 레지 샌더스, A 로드, 스티브 핀리, 카를로스 벨트란이다. 여기서 아버지 본즈, 샌더스, 핀리를 제외한 5명이 400홈런을 넘겼다.[2] 그나마 1라운드 이후에는 이 항목의 주인공 안드레 도슨을 포함해 통산 478세이브에 빛나는 리 스미스(2라운드 28번), 1981년 AL 타격왕 카니 랜스포드(3라운드 49번),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역사상 최고의 2루수로 꼽히는 루 휘태커(5라운드 99번) 등 거물급 선수들이 몇 명 나오긴 했다.[3] 약칭 Florida A&M으로 역사적 흑인대학(HBCU)이다. 이 대학 출신의 메이저리거는 총 4명으로 도슨을 빼고 가장 유명한 사람이 마퀴스 그리솜. 공교롭게도 도슨처럼 그리솜도 몬트리올의 지명을 받게 된다.[4] 이는 2002년 39-40을 정점으로 주력이 급격히 악화된 게선생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5] 그래도 1987년 컵스에서 49홈런을 때려내면서 슬러거의 면모를 보인적은 있다. 그리고 그해 리그 MVP 획득[6] 워싱턴 세네터스와의 연관성을 딱히 내세우지 않는 미네소타 트윈스가 이와 유사한 사례. 과거 워싱턴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월터 존슨에 대해서도 미네소타의 공식 홈페이지에 자팀 레전드로 설명되어 있을 뿐, 딱히 그를 기리는 움직임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7] 3000안타를 달성한 3루수인 보그스는 말년에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에서 뛰었는데, 그 당시 명예의 전당 모자를 탬파베이를 쓰는 조건으로 돈을 받고, 영구결번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선수 본인은 이를 부정하고, 모자 선택을 명예의 전당 위원회에 넘겼다.[8] 폭스 스포츠의 기사에 따르면, 컵스 모자를 선택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도슨 본인은 비통하다(gut-wrenching)고 언급했다.[9] 굳이 '비공식적'으로 표기한 이유는, 내셔널스가 과거 엑스포스의 영구결번이었던 8, 10, 30을 '기념'은 하되 그렇다고 비워 두지는 않고 있기 때문. 2019년 3월 기준 로스터상 현재 8은 내야수 카터 키붐, 10은 포수 얀 고메스, 30은 투수 코다 글로버가 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