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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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Bobby Lee Bonds
생몰일자
1946년 3월 15일~2003년 8월 23일
국적
미국
출신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포지션
우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자유계약
소속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68~1974)
뉴욕 양키스(1975)
캘리포니아 에인절스(1976~1977)
시카고 화이트삭스(1978)
텍사스 레인저스(1978)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79)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980)
시카고 컵스(1981)
'''1973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조 모건
(신시내티 레즈)

'''바비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스티브 가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 삼진'''
데이브 니콜슨
(1963, 175)

'''바비 본즈
(1970, 189)'''

애덤 던
(2004, 195)
보유 기록
최다 30홈런 30도루
5회[1]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2.3. 은퇴 이후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타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호타준족으로 발 빠르고 장타력도 좋은 공격형 1번 타자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선수이다.
통산 성적은 14시즌 동안 타율 .268, 출루율 .353, 장타율 .471, OPS .824, 순장타율 .203, BB/K 0.52, wRC+ 130, 1886안타, 332홈런, 461도루를 기록했다.
30-30을 총 5번 달성했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 8명밖에 없는 3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이었으며 3번의 골드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수비력도 좋은 선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리그를 씹어먹었던 ''' 배리 본즈의 아버지'''로서 더 유명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태어났다. 가족 내력이 대단한데 누나인 로지 본즈는 1964 도쿄 올림픽에서 허들 선수였고 동생인 로버트 본즈도 고등학교 시절 허들 육상 선수로 활동했고 이후 NFL의 미식 축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들인 배리 본즈 역시 발이 빨랐기 때문에 본즈 집안 대대로 준족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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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한 후 3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68년 6월 25일 자이언츠의 숙적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데뷔 첫 안타를 때려냈는데 그 안타가 무려 '''그랜드슬램'''. 150년에 가까운 메이저리그 역사상 데뷔 첫 안타를 그랜드슬램으로 장식한 일은 단 6번 밖에 없었는데 20세기로 한정하면 이 기록은 바비가 유일하다.
그리고 잔여 기간 동안 자신의 잠재력을 인정받게 되고 이듬해부터 풀타임 우익수 및 1번 타자로 출장하게 된다. 그러나 1번 타자라기에는 클린업 트리오 급의 파워를 보여줬는데 풀타임 첫 해 32홈런 90타점 42도루를 기록했다. 이는 켄 윌리엄스, 윌리 메이스, 행크 애런에 이어 4번째로 기록한 30-30 클럽 기록이었다. 그리고 리드오프로서의 능력도 충실하게 발휘하여 120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홈런 타자답게 삼진도 많이 기록했는데 무려 '''187개'''를 기록했다. (...) 이는 당시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신기록인데 풀타임 2년차해에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00안타 및 3할 타율을 기록했고 26홈런 48도루를 기록했으나 삼진 수도 189개를 기록하여 전년도에 기록한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2]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강타자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1971년 26도루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는 매년 40도루와 100득점을 기록하기도 했고 1971년에는 생애 첫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해보기도 했다. 1973년에는 총 11개의 리드오프 홈런(경기개시 홈런)으로 루 브록이 가지고 있던 통산 21개의 리드오프 홈런을 경신했다.[3]
1973년은 바비에게 있어서 가장 경이적인 시즌이었는데 타출장 .283 .370 .530에 39홈런 43도루를 기록하며 '''단 1개의 홈런을 못쳐서 40-40 클럽에 가입하는데 실패했다.''' 홈런 1개를 더 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큼지막한 홈런성 타구를 2개 날렸지만 모두 파울이 되었다. 만약 홈런 1개만 더 쳤더라면 최초의 40-40 클럽 가입자가 될 수 있었고 훗날 아들 배리 본즈가 40-40을 기록했기 때문에 부자가 40-40 클럽에 가입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수도 있었다. 어쨌든 MVP 투표 3위까지 오르고 골드 글러브, 그리고 올스타전 MVP에 뽑히는 등 바비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즌이라면 바로 1973 시즌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1970년대 초반, 팬들로부터 짐 레이 하트와 함께 윌리 메이스, 윌리 맥코비 같은 레전드의 뒤를 이을 선수로 꼽혔다. 하지만 레이 하트는 어깨수술과 그 후유증으로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팬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바비에게로 쏠리게 된다. 슈퍼스타다운 쇼맨십도 없었고 주당으로도 유명해서 그로 인한 비판도 있었지만 활달하면서 붙임성이 좋고 카리스마로 팀원들의 신뢰를 많이 얻었다. 그리고 승부근성 역시 대단해서 팀의 리더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바비는 결국 자이언츠를 떠났다. 이유는 감독과의 불화. 당시 감독은 찰리 폭스였다. 그 감독은 홈런 많이 때리는 것보다는 그냥 똑딱이에다 발빠른 리드오프로서의 모습을 바비에게 원했고 바비가 삼진을 많이 당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게다가 성격까지 다혈질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무 이유없이 바비를 선발 라인업에서 빼버리고 벤치에 앉혀버리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결국 감독과의 불화로 염증을 느낀 바비는 1974 시즌이 끝나고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다.

2.2. 저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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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뉴욕 양키스 생활을 시작으로 저니맨이 되었다. 여전히 기량은 살아있어서 32홈런 30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3번째 30-30을 기록하는데 성공했고 생애 최고 기록인 20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30-30은 양키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했다. 다만 매년 30~40개의 도루와 리그 정상급의 수비를 보여주면서 무릎이 성하지 않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0-30을 또 다시 기록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무릎이 성하지 않은데도 열심히 뛰는 바비를 보고 당시 양키스의 동료들은 그를 존경심 반, 의아함 반의 태도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1976년 또 다시 트레이드 되었는데 이번에는 고향팀인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에인절스로 트레이드 된 첫 해 시범경기에서 당한 손가락 골절상이 시즌 내내 괴롭혔지만 8월 2일부터 11일까지의 9경기에서 8개의 홈런을 쏘아올렸고 이듬해에는 37홈런 115타점 41도루로 생애 4번째 30홈런-30도루와 더불어 생애 2번째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1978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시즌 도중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 해에 생애 5번째 30-30을 기록하는데 성공한다. 1979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또 다시 트레이드, 25홈런 34도루를 기록하며 친구이자 우상이었던 윌리 메이스에 이어 2번째로 '''300-300 클럽'''에 가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도루 실패 역시 23개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그에게도 황혼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결국 1980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81년 시카고 컵스에서의 성적이 부진했고 컵스에서의 생활을 끝으로 35세의 나이에 은퇴하게 된다.

2.3.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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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기도 했고 199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FA로 풀린 아들 배리 본즈와 함께 친정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코치로 입단하여 4년간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2003년 폐암과 뇌종양의 합병증으로 향년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호타준족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이긴 하지만 3000안타는 커녕 2000안타도 못 때렸고 타율도 낮았을 뿐더러 리그를 압도할 만한 포스를 낸 선수는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누적스탯이 부족해서 끝내 명예의 전당에는 헌액되지 못했다.

3. 배리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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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코치였던 바비, 오른쪽은 배리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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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본즈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단연 배리 본즈를 꼽을 수가 있다. 1963년에 결혼하여 1964년 배리 본즈를 낳았는데 이 당시 바비의 나이가 18세였다. 만약 바비가 선수 생활을 오래했더라면 켄 그리피 시니어, 켄 그리피 주니어 부자처럼 부자가 같이 선수 생활을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비는 아들인 배리를 정말 애지중지 키웠다. 바비는 아들인 배리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이언츠의 레전드 윌리 메이스에게 대부를 부탁하기도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바비 자신은 슈퍼스타다운 쇼맨십도 없었고 주당이라는 비판점도 있었기 때문에, 슈퍼스타였던 윌리 메이스를 배리가 본받고 배우도록 하고 싶어 이런 부탁을 한 것. 메이스도 배리를 귀여워 했던 터라 대부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스타덤에 오른 이후에도 바비는 여가 생활을 오직 배리를 위해 썼으며 아들이 자기보다 나은 선수가 되길 원했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더 유리한 야구의 특성상 오른손잡이었던 배리를 좌투좌타로 키우게 된다. 그리고 배리가 어린 시절 바비는 팬들에게 자신의 싸인을 받기 전에 미래의 슈퍼스타가 될 자신의 아들의 싸인을 받도록 하기도 했다. 게다가 배리가 출전하는 경기 중 시간이 된다면 다 참석해서 관람했다. 어떨 때는 아들에게 되려 부담이 될까 변장해서 관람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아들인 배리는 아버지와의 사이는 돈독했지만 실력이 올라갈수록 성격은 날로 거만해져가며, 붙임성이 좋아 인간관계가 좋았던 아버지 바비와 달리 친구 하나 없이 독불장군으로 생활해 나갔다. 게다가 학창시절 때부터 훈련을 지멋대로 빼먹는 일이 잦아서 코치진의 평가는 정말로 안 좋았고 프로 입단 후에도 팀 케미스트리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클럽하우스를 선도할 정도의 성격은 절대 아니었고 언론과의 사이도 극악이었다. 너무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됐건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화려한 부자임은 틀림없다. 30-30 클럽 최다 기록은 총 5회로 공동 1위인데 공교롭게도 바비와 배리가 이 부문에서 공동 1위였다. 게다가 부자 둘 다 300-300 클럽에 가입했으니 호타준족으로서 빼어난 기량을 보인 두 부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등번호 25번은 아버지인 바비 본즈가 달았던 번호이기도 했다.
[1] 아들 배리 본즈와 더불어 메이저리그 역대 유이한 기록[2] 이 기록은 훗날 애덤 던이 경신했고 이후 라이언 하워드, 마크 레이놀즈가 차례로 기록을 깼다. '''21세기에.'''[3] 이후 14개의 리드오프 홈런을 기록하며 통산 35개의 리드오프 홈런을 기록했다. 통산 리드오프 홈런 기록은 이후 리키 헨더슨이 경신했는데 내셔널리그로 한정하면 아직까지 바비가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