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나스 스메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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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2.1. 학창 시절
2.2. 초기 활동
2.3. 정계 입문
2.4. 독재
2.5. 망명
3. 평가


1. 소개


리투아니아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영웅,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지만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독재자이다. 20세기 초반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룰때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2. 생애



2.1. 학창 시절


안타나스 스메토나는 1874년 8월 10일 러시아 제국 하 리투아니아의 우크메르케라는 빌뉴스 북서쪽 카우나스 북동쪽의 두 도시 사이에 있는 소도시 부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1885년 아버지를 여위고 가정 형편이 안좋았음에도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한때 가족의 바램으로 가톨릭 성직자를 목표로 카우나스의 사모기티아 신학교를 다녔으나 신학자가 되는것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결국 현 라트비아의 옐가바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이 고등학교에서 만난 요나스 야블롱스키스, 빈차스 쿠디르카와 함께 비밀 리투아니아 학생회라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반차르주의 학생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반정부단체에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한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제9고등학교에 진학하는것은 허용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졸업을 하게 된다.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무부로 진학한 스메토나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단체를 가입하의 의장으로서 리투아니아어 서적 출간 및 보급을 담당하여 단기간 옥살이를 살게 되었다. 1902년 스메토나는 졸업하고 빌뉴스 농업 은행에서 일하며 1904년 소피아 초다카우스카이테와 결혼한다.

2.2. 초기 활동


빌뉴스에 있으면서 스메토나는 여러 리투아니아계 단체를 접하게 되었고 리투아니아 민주당의 빌뉴스 의회에서 당 대표가 되었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리투아니아어 신문 '리투아니아 신보'의 부사장을 맡았으며 1905년에서 1906년까지 주간지 리투아니아의 농부들을 편집하였다. 이런 여러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혹은 리투아니아어 신문 발간에 참여하며 리투아니아어 보급에도 활동을 하였다.

2.3. 정계 입문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빌뉴스로 이동, 리투아니아 구호 협회 중앙위원회의 부서기장, 후에 서기장이 되었고 독일 동부전선 사령관에 리투아니아의 자주 국가로서의 권리를 첨언하는 각서를 전달하였고 1917년 '리투아니아의 메아리'라는 신문 발행으로 리투아니아의 독립의지를 고취하였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혁명으로 혼란한 상황 속 1917년 9월 18일에서 22일 사이 빌뉴스 국가 평의회에 참석, 1919년까지 의장직을 맡았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리투아니아 왕국이 성립되는 동안 스메토나는 독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돌며 리투아니아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919년, 독일이 물러나자 귀국, 리투아니아 국가 평의회의 선출로 초대 대통령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전쟁 동안 대통령으로 지내고 리투아니아 평의회가 선출한 후계자 알렉산드라스 스톨긴스키스에게 권력을 몰려준다.
'''이렇게 평범한 독립영웅으로서 물러날 줄 알았지만...'''

2.4. 독재


1926년 쿠데타의 주역으로서 리투아니아 제 4의회를 몰아내고 리투아니아의 4대 대통령으로서 재취임한다. 자신이 초대 대통령때 총리였던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를 총리로서 임명하여 대통령의 권리를 강화하는 신헌법을 의회에 몰아붙여 제정하고 1929년 총리까지 몰아내어 절대권력을 손에 넣은 독재자가 되었다. 이후 9년간 스메토나는 대통령으로서 사법권과 입법권 모두를 휘둘렀고, 1936년 국민들의 요구로 허수아비 의회를 세울때까지는 의회도 없이 다스렸다. 국가주의자로서 스메토나는 폴란드어 학교들을 폐쇄, 폴란드인들의 강제적 리투아니아인화를 밀어붙였고 러시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하지만 30년대의 늘어나는 국내불안, 리투아니아의 메멜란트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나치 독일, 그리고 인밀레 공업화로 성장한 소련의 위협은 소국 리투아니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찼다. 자유화를 요구하는 민주화 세력들과 독일계 나치[1],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스메토나는 결국 1938년, 리투아니아는 유지하기도 벅차고 나치들이 판치며 독일이 지속적으로 내놓으라 위협하던 메멜란트를 독일에 반환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다. 스메토나는 결국 권력을 유지하긴 하지만 1940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의해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점점 위협하여 결국 리투아니아 SSR로 개편, 소련에 병합된다.

2.5. 망명


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이 가시화되자 다른 리투아니아 정부수반과 함께 다른 리투아니아계 피난민과 독일 동프로이센주로 건너가 나치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베를린에 정착한다.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을 의식한 독일 정부에 의해 스메토나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당했고 다른 리투아니아 정부수반과의 접촉도 매우 경계받았다. 이에 스메토나는 독일의 미국 대사관에 연락하여 미국으로의 망명 허가를 요청하였고, 미국 정부는 이를 승인하였으나 스메토나가 그 어떤 정부 수반도 아닌 민간인으로서 입국한다는 굴욕적인 조건 하에 이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스메토나는 이를 받아들여 베른, 리스본, 리우데자네이루를 거쳐 뉴욕에 도착한다. 스메토나는 미국의 구 리투아니아 대사관에서 당분간 머물렀지만, 현지의 리투아니아 교민들과 리투아니아 외교관들은 권력을 잃은 독재자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고 결국 스메토나는 클리블랜드에서 정착하여 그곳에서 사망한다.

3. 평가


독립운동가로서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이바지하였고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나 후에 독재자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이승만과 꽤 흡사하다. 하지만 독재자로서 정적들을 탄압하고 국가주의자로서 비리투아니아계들 또한 탄압하였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2] 공업화, 경제 발전이나 해외 투자 등을 제한하여 1940년 리투아니아가 멸망할때까지 리투아니아는 경제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고 억압적인 독재 때문에 현 리투아니아인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듯.

[1] 여담으로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최초로 나치들을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한 국가이다[2] 당시 리투아니아는 농업국가였고 스메토나의 주 지지층도 농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