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 점령

 

1. 개요
2.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2.1. 배경
2.2. 점령
3. 나치 독일의 발트 3국 점령


1. 개요


발트 3국 점령이란, 2가지 사건을 뜻한다.

2.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2.1. 배경



[image]
독소 불가침조약에서의 원래 분할안(왼쪽)과, 폴란드 침공 이후 실제로 갈린 분할안(오른쪽)
소련이 스탈린 치하에서 국력을 키워나갔고 나치 독일소련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발트 3국은 원래 독소 불가침조약에서는 리투아니아나치 독일이, 라트비아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영역으로 합의되었다.
그해 9월 소련은 독일과 함께 폴란드침공했다. 그해 11월에는 핀란드침공했다.

2.2. 점령



이때 이후 발트 3국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졌다. 소련은 1939년,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상호간의 군사기지를 건설과 상호 원조 조약을 허용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1] 에스토니아는 9월 28일, 라트비아는 10월 5일, 리투아니아는 10월 10일 체결되었다. 결국 발트 3국에는 총합 75,000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40년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발트 3국을 병합할 자세를 보였다. 몰로토프는 발트 3국이 소련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에게 무제한으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발트 3국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6월 15일 소련은 라트비아를 침략했고, 6월 16일에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침략했다. 소련은 일주일만에 발트 3국을 점령했고 각국의 군대는 무장해제당한다. 이후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을 꼬드겨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과 15일 사이에는 합병에 관한 짜고치는 투표가 이루어지고 소련은 이를 통해 자발적으로 3국이 소련에 합병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선전했다. 7월 21일에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된다.[2] 이후 반공, 반소적인 인사들은 추방되었다. 추방된 사람은 최소 1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 발트 3국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신청을 했다. 이는 받아들여졌고 리투아니아는 8월 3일, 라트비아는 8월 5일, 에스토니아는 8월 9일 소련에 병합되었다.
이 때문에 리투아니아를 뺏긴 히틀러가 격렬하게 항의하자 스탈린이 양보해서 폴란드의 땅을 30% 정도 독일한테 떼준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을 비난했고, 서방 국가들은 대부분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후 벌어진 2차대전으로 인해 소련의 입지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그들의 외교적 입장이 발트 3국의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 이 3국 정부는 모두 1차 대전 직후 성립된 독립국 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이며 소련 구성국 체제는 말하자면 괴뢰 정권으로 보고 적법한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소련에 병합된 이후 소련에서 가장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경제 수준이 좋았지만 인접해있는 핀란드나 스웨덴에 비하면 소득 수준이 크게 낮았던 데다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 현지 문화를 적극적으로 익혔던 것도 아니었고 주요 공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박탈감이 심했었다.

3. 나치 독일의 발트 3국 점령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한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그해 7월에는 발트 3국 전체를 점령했고 동방 국가판무관부를 설립한다. 발트 3국 국민들은 독일군을 환영했다. 독일도 발트 3국에선 유대인이나 슬라브인을 제외한 인종에겐 별다른 학살을 저지르지 않아서 발트 3국 국민들도 독일에게 협조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당시 소련령 발트국가들이 특별 상태국으로 분류되었다.

[1] 폴란드 해군 잠수함이 에스토니아를 거쳐 영국으로 탈출한 것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2] 소련에게 병합당하기 전에는 소련의 괴뢰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