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역사
1. 고대
고대에는 페니키아가 튀니지 지방에 설치한 카르타고가 성장하면서 오늘날에 알제리에 해당하는 누미디아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카르타고인들은 오늘날 알제리 해안가에 여러 식민도시들을 건설하면서 대농장들을 운영하였다. 알제리 내륙의 누미디아인들은 카르타고와 적극 교역하였고 많은 수의 누미디아 기병 및 현지인 보병들이 카르타고군에 용병으로 일했다. 카르타고 항목 참조.
이후 로마 제국에 의해 카르타고가 멸망하고 누미디아 역시 로마의 동맹국으로 시작했다가 후에 유구르타 반란을 계기로 속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 참조. 카르타고인들이 경영했던 알제리 해안지대의 대농장들은 로마 시대에 내륙까지 더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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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기후와 중세시대 낮은 인구 밀도 덕분에 오늘날 알제리에 위치한 고대 로마 유적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한 편이라고 한다.
한 편 누미디아 왕국 남부의 가에툴리 족은 노예를 동원한 지하수 농업용수 공급을 통해 번영하였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되고 나서는 알제리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도나투스파 기독교가 번영하였다. 니케아 공의회를 따르는 대지주들에 대한 소작농들의 반감을 노리고 도나투스파 성직자들이 이 지역에 적극 포교행위를 한 까닭이었다. 후에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쳐들어왔을 때 도나투스파 현지인들이 반달족에게 적극 협력했다 한다. 반달족들은 새로이 정착한 북아프리카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서로마 제국을 끊임없이 약탈하고 공격했다.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에 의해 반달 왕국이 무너지고 다시 로마의 영토로 탈환되나, 7세기 말 아랍인들이 쳐들어오면서 동로마 제국의 통치도 얼마 안 가 종언을 고했다. 무슬림들의 정복 사업 결과 오늘날의 알제리 지역은 카르타고 일대과 함께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가 된다. 해안 지대의 도나투스파 기독교인들과 내륙의 토착 신앙을 믿는 베르베르인들은 지중해 정복 및 해적사업에 같이 참여하기 위해서(...)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2. 중세
알제리 지역과 튀니지 지역의 운명이 갈린 것은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후인데, 압바스 왕조가 튀니지 지방까지는 권역을 넓혔지만 알제리 지방은 후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면서 세력권이 갈리게 되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했던 후우마이야 왕조가 아랍인 및 베르베르인들의 갈등으로 여러 지방정권으로 쪼개지면서 멸망하고, 튀니지 지방에서 발흥한 파티마 왕조가 잠시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일했다가 베르베르인들의 무와히드 왕조가 다시 알제리를 점령하게 되었다. 무와히드 왕조가 레콘키스타로 인해 멸망한 후에는 모로코에는 마린 왕조, 알제리에는 자얀왕조, 튀니지에는 하프스 왕조가 각각 세워진다. 그런데 자얀왕조가 멸망하면서 하프스 왕조의 권역에 잠깐 포함되었다가, 하프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알제리는 아랍 대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레콘키스타와 뒤이은 종교재판으로 박해를 받는 유대인들이 대거 알제리 해안 도시들로 이주하였다 한다.
알제리 일대는 이슬람화 직후부터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1516년에 드디어...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 된다.[1] 오스만 치하에서는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상당부분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했을 때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지중해에서 대놓고 노략질을 일삼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안 좋은 기운이 끼기 시작한다.
결국 해적토벌을 명분으로 한 프랑스의 침공으로 그 끝을 장식한다.
3.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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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알제리의 정치 구도. 초록색은 알제 기반의 오스만 총독령, 그 외에는 총독에게 복속한 여러 술탄국들. 서쪽의 오랑은 당시 스페인령
1830년대부터 프랑스가 지중해 해안 일대의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 점령하면서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제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 기간 내내 계속되어 내륙의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모로코 왕국이나,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의 내륙의 유목민들과 싸워가면서 1936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국경으로 확정된다. 프랑스군이 알제리에 처음 진주했을 당시에는 알제리인 식자율이 프랑스 군인 평균 식자율보다 높았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최초로 공략당한 지역이 알제리 해안 도회지였기 때문.
식민 통치를 하면서 알제리 북부 해안지대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와 유사한 자연환경[2] 을 가졌음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를 제 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알제리 내륙이 건조하고 척박한 것과 다르게 해안지대는 겨울에 춥지도 않으면서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비가 적당히 와서 토질이 비옥했다.
1877년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 서부의 오랑에서부터 동부의 콩스탕틴에 이르는 거의 전 지역에서 최악의 기근이 발생했고, 가뭄과 굶주림이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제리 내륙의 농촌 경제는 몰락했지만 북아프리카의 가축 교역을 장악한 마르세유의 자본가들에게는 횡재로 작용했다. 가뭄으로 물과 초지가 사라지면서 가축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내륙 지역의 농민들은 거래상들에게 가축을 헐값에 팔아야만 했다. 양 수출이 두 배로 증가하는 사이에 밀과 보리의 수출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874년부터 1876년까지 3년동안 알제리에서 소 17,996마리가 수출되었으나 1877년부터 1879년 사이에 143,198마리의 소가 수출되었다. 알제리인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던 가축을 처분하였고, 내륙 지방 농민 상당수는 도시로 이주하여 유럽인, 유대인들과 격리된 장소에서 빈민 노동자로 일했다.
이 당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화에 발맞춰 수많은 유럽인들이 알제리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식민 통치가 끝날 무렵인 1950년대 말 이들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 명중 100만 명 넘게 차지했을 정도였다. 중세부터 알제리에 거주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잽싸게 프랑스 식민통치의 부역자가 되었다.[3] 알제나 오랑 등의 알제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럽쪽 도시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이 당시 이주해온 유럽인들이 이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검은 발이라는 뜻의 피에 누아르(Pied-Noir)라 불리며 식민 지배 시기 알제리 사회에서의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프랑스 극우 진영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일부 우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알제리가 근대화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인프라 투자는 피에 누아르들이 대거 정착한 식민도시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작 알제리 현지인들은 비옥한 해안가의 옥토들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뒤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피에 누아르들의 소득이 계속 증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알제리 현지인들의 소득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계속 감소하였으며, 피에 누아르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무슬림들을 일부러 학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우경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후에 알제리 독립 이후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 대우를 받거나 교사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
100년 넘게 지배를 받으면서 피지배층인 아랍계의 불만이 커지고 프랑스 식민제국이 쇠락해가면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인 끝에 1962년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과정과 그 직후 프랑스군에 부역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싸운 알제리인[4] 들은 보복으로 학살당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정착해서 좀도둑이나 막노동일에 종사하며 빈민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피에-누아르들의 상황은 아르키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피난오는 과정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많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특히 알제리에서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는 프랑스 본토로 피난 온 후에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제리 독립 전쟁 과정에서 여성들이 대거 민족해방전선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 덕분에 알제리는 다른 보수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 여성 인권이 진보적으로 보장받는 결과를 낳았다.[5] 그러나 인구 대다수인 아랍계와 오랫동안 여기 살아오던 이마지겐들 사이의 갈등이 고민거리로 남았다. 이들은 보통 베르베르인이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 유목민들로 스스로를 이마지겐으로 부른다.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인 사이의 통혼이 적지는 않다. 다만 해안지대에 살며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인 상류층들이 척박한 내륙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을 촌놈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4. 현대
196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알제리에는 민족해방전선(FLN)에 의한 일당제 정권이 들어섰고, 아흐메드 벤 벨라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65년 국방장관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의 쿠데타로 쫓겨나게 된다. 부메디엔은 독재자로 집권하면서 석유 등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국제적으로는 비동맹 정책을 폈고 오일쇼크를 맞아 막대한 외화가 알제리로 들어오게 되자 알제리는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1978년 부메디엔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샤들리 벤제디드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유가가 30달러대는 넘었기에 그런대로 경제는 굴러갔고 지지를 유지했지만 1985년부터 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하며 알제리는 경제위기를 맞게되었고, 부채의 급증과 보조금의 대대적인 축소로 인해 물가와 실업률은 급속하게 올라갔다. 이렇게 경제가 악화되면서 실업자가 된 계층들 사이에서 정권에 대한 반감이 늘어났고, 1988년에 보조금 축소와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1989년 헌법 개정으로 사회주의는 폐지되고 다당제가 인정되었다.
1990년 처음 열린 다당제 총선거에서 이슬람주의 정당(살라피즘 계열)인 이슬람해방전선(FIS)이 231석 중 188석을 가져가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여당 FNL은 15석에 그쳐 참패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정권이 집권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축출하고 FIS를 불법화시키면서 이슬람 세력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면서 이슬람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알제리 내전(1991~2002)이 발발했다. 처음에 이슬람 반군은 그냥 군부에 반대하는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장이슬람그룹(GIA) 등 강경 반군들은 민간인들과 외국인을 무차별 살해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렇게 되면서 반군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FIS의 이슬람해방군(AIS)은 1997년 정부와 휴전하게 되었다.
1999년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새로 알제리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슬람주의 세력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2000년 AIS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GIA와 GIA에서 갈라져나온 살라피스트 설교전투그룹(GSPC)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GIA는 이후 정부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쇠퇴하였고, GSPC만이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로 이름을 바꿔 살아남았지만 역시 세력이 크게 줄면서 알제리 내전은 2003년경 일단락되게 된다. 다만 이제 반군까진 아니어도 아직도 남아있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들 때문에 치안이 불안한 편.
1976년에는 아랍화 정책을 펼치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평일로 바꾸고 목금 주말제를 도입했으나 2009년에는 서방과의 교류를 위해 이전의 목•금 주말제에서 금•토 주말제로 변경하였다. 즉, 토요일~수요일이던 주중을 일요일~목요일로 바꾸고 주말을 목요일, 금요일이던 것을 금요일은 그대로 두고 목요일 대신 토요일을 주말에 끼워 넣은 셈이다. 그래도 일요일은 아직까지는 평일이다.
게다가 군부 독재같은 내부 문제와 같이 이슬람 과격파들이 세력을 늘려나간 적도 있으나, 현재는 적어도 알제리 국내에서는 다른 아랍 국가들에 비해 이슬람 극단주의를 잘 제어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알제리계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테러를 벌이는 건 엄밀히 말해서 프랑스 부역자 아르키들이 일으킨 일이기 때문에, 뉴스에서 알제리계 극단주의 무슬림 테러라고 나오면 알제리 본토 사람들이 적극 항의하기도...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이웃나라인 튀니지와 리비아에서 독재정권이 붕괴된 것에 반해 알제리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던 것을 90년대에 알제리가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나서 바로 내전으로 이어졌던 것에 대한 공포를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6] 실제로 90년대 알제리의 상황이 2010년대 들어 리비아 등 여러 아랍 국가에서 비슷하게 펼쳐지는 모양새.
2013년 1월 16일, 이슬람 과격세력이 알제리 동부 리비아 국경 인근에 있는 인아메나스 천연가스 시설에 난입하여 외국인 및 자국인 인질 180여명을 잡아두고 수감중인 동료 석방을 요구했으나 알제리 정부는 무시하고 헬리콥터 및 전차를 보내 강경진압에 나섰다. 결국 외국인 인질 23명과 무장 인질범 32명, 확인된 숫자만 55명이 목숨을 잃고 나머지 인질은 구출에 성공했다고 알려졌으나 나중에 추가로 인질 25명이 시체로 발견되면서 알제리군이 헬기에서 묻지마 사격을 가했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거세졌다. 인질 가운데 가장 많이 죽은 나라가 바로 일본인데 일본인 12명 및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는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고 나선 알제리 정부를 두둔했다. 한편 과격 세력 리더는 진압 후 며칠 뒤 방송사로 보낸 비디오로 이번 강제진압으로 인한 보복을 반드시 하겠다고 찍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2014년 4월 1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현 대통령이 '''4선'''(...)에 성공했다. 득표율은 81.5%로, 2009년 3선 때의 90.2%에 비하면 떨어지긴 했지만... 실질적 독재정권 치하에서 제대로 된 선거가 치러졌는지는 미지수.# 아무튼 4선에 성공함에 따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19년까지 임기를 법적으로 보장받아, 1999년 이래 최소 '''19년''' 동안 알제리를 통치하게 됐다.
2019년 4월 18일에 대선이 있다고 밝혔지만,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출마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부테플리카의 출마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게다가 반정부시위가 발생되는 상황에서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기어이 출마를 선언했다.# 2019년 3월 5일에 알제리의 대학생들은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재선을 반대하며 퇴진을 거부하면 총파업도 하겠다고 밝혔다.# 부테플리카의 재선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50만명이 모였다.# 결국 부테플리카는 재선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대통령 선거에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대선에 나오지 않는다는 발표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군부마저도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과도정부구성안을 발표했다.# 결국 부테플리카는 대통령직에서 20년만에 사임했다.# 이후 알제리 의회는 벤 샬라 국회의장을 임시대통령에 지명했다.# 알제리의 임시대통령은 7월 4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현재 대선은 12월 12일에 치르기로 정해졌다.#
하지만 반정부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임시대통령도 사임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11주째 금요시위를 가지면서 前 대통령의 측근 퇴진 및 정치개혁도 요구했다.# 12월 12일 대선을 앞두고 11월 1일에 다시 거리로 나왔다.#
8개월 만에 치뤄졌지만 시위대들이 후보자들이 과거 정권 인사라며 다시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 총리 출신인 압델마드지드 테분이 당선되었지만, 투표율이 40%에 그쳤다.#
2020년 11월 1일.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높아서 투표했는데, 투표율이 불과 23.7%라서 큰 의미는 없다.
알제리의 대통령인 압델마드지드 테분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
2021년 2월 18일. 테분 대통령은 정부를 개편하고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발표하면서 2년 전에 민주화 운동 시위로 수감됐던 32명에 대한 사면을 지시했다.#
[1] 바르바리 해적 참조[2] 실제로 알제리 이웃국가인 튀니지는 극단주의 테러가 뻥뻥 터지기 이전에 2013년도까지는 프랑스인들이 휴가철마다 즐겨찾던 휴양지였다.[3]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 독립 정부는 세파르딤(+피에 누아르)를 대부분 쫓아냈다. 오늘날 프랑스 유대인 상당수가 세파르딤 유대인인데 이들 과반수가 바로 알제리 출신으로 알제리 독립 당시 프랑스로 온 이들이다.[4] Harki아르키라고도 부른다.[5] 물론 알제리 독립 이후에 여권을 축소시키려는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의 압력이 있었으나 알제리 독립을 도와준 인사들 일부가 눈치를 준 덕분에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었다.[6] 10년간 알제리인이 십만 단위로 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