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리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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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Barbary) 해적.
15세기 말부터[1] 19세기 초까지 약 3백년 동안, 지금의 북아프리카인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와 리비아의 해안 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전 유럽을 상대로 약탈을 벌였던 무슬림 해적 집단. 유럽의 사략선과 기본개념은 비슷하다. 종교는 이슬람을 믿었지만, 기독교 신자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한 패로 받아들여 주었다. 심지어 기독교를 믿던 유럽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해적단의 한 무리를 지휘하는 해적 두목이 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유대인이 두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2] 1530년과 1789년 사이에 대략 '''120만 명 이상'''[3] 에 달하는 유럽 기독교인과 유대인 및 미국 선원과 여행자들이 납치당해 중동 지역과 북아프리카(마그레브)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적 자체는 서기 7~8세기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15세기 이전에도 기독교도들을 학살하고 붙잡아 노예로 삼기로 악명이 높은 무리들이었다. 서기 7~8세기부터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은 수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프랑스 일대와 동로마 제국에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하여 과장이 좀 섞인 기록상으로 수백만 명[4] 에 달하는 기독교도를 노예로 끌고갔다. 846년에는 심지어 로마시 외곽마저 대규모 이슬람 해적의 공격에 불타고 구 성 베드로 성당이 약탈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탈리아는 아말피, 제노바 같은 해양 도시들이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며 대응해나가기 전까지 사라센 해적에 심각하게 시달렸다. 이는 사실상 중세 내내 이어졌고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무슬림들에게 잔인하고 강경하게 대처했던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이탈리아 해양 도시 출신들이있다.
827년에 알 안달루스에서 추방된 무슬림 해적 집단에 의해 점령된 크레타는 961년 니케포루스 포카스에 의해 재정복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은 오늘날의 헤라클리온에 해당하는 칸다끄 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니케포루스 포카스가 칸다끄를 점령하고 도시의 무슬림 주민들을 전부 학살했고, 크레타 섬 교외 지역의 주민들은 이슬람과 기독교 교리를 헷갈려하며 두 종교를 동시에 다 믿는 상태였는데, 이후 동로마 본토에서 다시 선교사들이 도착하면서 다시금 기독교 지역으로 복귀하였다.
1390년에는 프랑스와 제노아 연합함대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바르바리 해적의 주요도시였던 마흐디아를 포위 공략했으나 실패한적도 있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후원자였던 하프스 왕조가 쇠락하고 갑자기 바르바리 해안 해적들이 정치혼란의 틈을 타 기세가 강력해지자 경각심을 느낀 유럽인들이 "바르바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
이 해적들 중 가장 이름을 남긴 이는 바로 하이르 앗 딘이다.
동유럽 정복 과정에서 이미 강대해져 가는 서유럽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오스만 제국이 서유럽 국가들을 본진에 묶어놓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면서 그 세력이 엄청나게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무슬림이나 유대인이 합류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같은 해인 1492년에 '그라나다 칙령' 을 반포하여 스페인 전역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했는데, 그들이 갈 곳이라곤 북아프리카 뿐이었기 때문[5] . 그리고 그 가운데 해적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스페인 출신이다 보니 그쪽 지리에 밝은 것은 당연지사.[6] 물론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쇠퇴하게 되지만 그와 관계없이 해적집단의 노략질은 그 뒤에도 300여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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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활동 무대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해안 지대였으나, 18세기가 되자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서구의 범선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여 그 무대를 점차 넓혀나갔고, 아일랜드와 영국, 심지어 아이슬란드의 해안가에 나타나 주민들을 납치하고 약탈을 일삼는다. 1627년 네덜란드 출신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해적인 얀 얀스존이 이끄는 일련의 바르바리 해적들은 아이슬란드를 침략해 400명의 아이슬란드 주민들을 납치했는데, 그들중에서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노인과 허약한 사람들을 교회 안에 가둔 다음 불태워 죽이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결국 400명의 아이슬란드인들 중 242명만이 살아남아 바르바리 해적들한테 붙잡혀 갔다. 그들 중 주교인 올라프 에길슨은 몸값을 내고 다음 해인 1628년에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노예로 붙잡힌 고통스러운 경험담을 책으로 써냈다. 이 책은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에서 출판되었다.
1665년과 1660년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바르바리 해적들의 침략을 받았다. 물론 유럽 국가들은 워낙 강력한 상대이다보니 서유럽 쪽은 약탈을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벽촌만 골라서 털었고 후원자인 오스만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는 적당히 눈치를 봐서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의 선박과 주민들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서유럽 자체를 못털고 약소국이었던 러시아와 동유럽만 노렸으며, 19세기 초 이런 전략의 최대 피해국이 미국과 러시아였다. 미국은 거리가 멀다보니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러시아는 투르크와 가까워서 바르바리 해적들이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들에게 납치된 유럽인들은 모로코나 알제리, 혹은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려갔다. 남자들은 해적선과 이슬람 선박들의 노잡이나 북아프리카 카이루안의 목욕장, 이슬람권의 각종 노역장에서 죽을때까지 착취를 당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개죽음을 당했고[7] , 여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서 하녀로 살거나 이슬람 군주, 귀족들의 첩, 하녀가 되었다고 한다. 단, 몸값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살던 본국에 연락하여 몸값을 내면 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몸값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 잡혀가면 평생 노예로 살다죽었다보면 된다. 이러다보니 유럽인들은 바르바리 해적이라면 치를 떨었다.
물론 유럽 국가들도 가만있지 않아 몸값을 낼 수 없었던 가난한 기독교도들을 구출하고자 따로 구출 기사단과 구출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무력 행위는 구호기사단이나 성 스테파노 기사단이 했고, 구출 수도회나 구출 기사단은 몸값을 마련해 기독교도 노예들을 사들여 해방시켰다. 또한 일부 기독교도들은 보복으로 같은 해적단을 만들어 이슬람권 도시들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해적선과 해적 근거지만 공격한다고 했지만 실은 레스보스 섬, 보드룸 등 일반 도시도 자주 침략하여 무슬림들을 노예로 잡아 팔았다. 로도스 섬에는 대놓고 무슬림 노예 시장이 있었다고 하며[8] 레판토 해전에서도 무슬림 노잡이들이 쓰였다.[9] 당장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인 바바 우르지와 하이르 앗 딘 형제도 어린 시절에 화물 운송업을 하던 중에 구호 기사단에 포로가 되어 로도스에 갇혀 있다가 탈출, 앙심을 품고 해적이 된 경우이다. 물론 대다수의 기독교도 해적들은 대서양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정규 해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10] 사실 바르바리 해적이 오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오스만 제국이 뒤를 봐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당하고 살던 유럽 국가들이 족치려고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17~18세기경에 이미 소멸되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후원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북아프리카 전체가 '''하나의 해적 국가'''였다는 사실이다.[11] 이미 17세기부터 유럽 해군은 여러 차례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를 폭격하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조약을 강요했으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완전한 근절에는 실패했다.[12] 때문에 프랑스에 의해 근거지인 알제리가 점령된 후에야 비로소 바르바리 해적이 완전히 소탕될 수 있었다.
미국이 프랑스에 파견한 2대 대사인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 주재 초대 미국 대사 존 애덤스와 함께 1785년 런던 주재 트리폴리 대사를 만났을 때 충격을 받았다. 두 미국 대사는 미국인들에 대한 납치에 항의하며 베르베르 이슬람 국가들이 무슨 권리로 미국 선원들과 여행자들을 납치하는지 물었다. 이에 트리폴리 대사는 쿠란과 이슬람 율법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국가 사람들은 죄인이며 전투에서 대항하는 자는 죽이고 항복하는 자는 노예가 된다고 코란에 적혀 있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이 세력은 미국이 처음으로 외교 조약을 맺은 대상이자, 최초로 미군이 해외에 파병하여 수행한 국제 전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트리폴리 조약과 1차 바르바리 전쟁 항목을 참고할 것.
19세기 초, 산업 혁명에 성공한 서구 열강은 북아프리카에서 활개치며 자꾸 유럽을 약탈하는 바르바르 해적단에게 빡쳐서 그들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서구 열강의 공격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큰 피해를 입었다. 맨 먼저 1801년과 1815년에 미국이 트리폴리를 공격하여 초토화시키면서 해적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1차 바르바리 전쟁, 2차 바르바리 전쟁), 1816년과 1820년에는 노예 무역 근절에 열을 올리던 영국이 모로코를 공격하여 남아있던 해적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이후로도 해적질은 계속되었으나 1830년 프랑스가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하여 식민지화함에 따라 바르바리 해적단은 사라졌다.
바르바리(Barbary) 해적.
1. 개요
15세기 말부터[1] 19세기 초까지 약 3백년 동안, 지금의 북아프리카인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와 리비아의 해안 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전 유럽을 상대로 약탈을 벌였던 무슬림 해적 집단. 유럽의 사략선과 기본개념은 비슷하다. 종교는 이슬람을 믿었지만, 기독교 신자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한 패로 받아들여 주었다. 심지어 기독교를 믿던 유럽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해적단의 한 무리를 지휘하는 해적 두목이 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유대인이 두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2] 1530년과 1789년 사이에 대략 '''120만 명 이상'''[3] 에 달하는 유럽 기독교인과 유대인 및 미국 선원과 여행자들이 납치당해 중동 지역과 북아프리카(마그레브)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2. 역사
2.1. 초창기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적 자체는 서기 7~8세기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15세기 이전에도 기독교도들을 학살하고 붙잡아 노예로 삼기로 악명이 높은 무리들이었다. 서기 7~8세기부터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은 수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프랑스 일대와 동로마 제국에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하여 과장이 좀 섞인 기록상으로 수백만 명[4] 에 달하는 기독교도를 노예로 끌고갔다. 846년에는 심지어 로마시 외곽마저 대규모 이슬람 해적의 공격에 불타고 구 성 베드로 성당이 약탈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탈리아는 아말피, 제노바 같은 해양 도시들이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며 대응해나가기 전까지 사라센 해적에 심각하게 시달렸다. 이는 사실상 중세 내내 이어졌고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무슬림들에게 잔인하고 강경하게 대처했던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이탈리아 해양 도시 출신들이있다.
827년에 알 안달루스에서 추방된 무슬림 해적 집단에 의해 점령된 크레타는 961년 니케포루스 포카스에 의해 재정복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은 오늘날의 헤라클리온에 해당하는 칸다끄 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니케포루스 포카스가 칸다끄를 점령하고 도시의 무슬림 주민들을 전부 학살했고, 크레타 섬 교외 지역의 주민들은 이슬람과 기독교 교리를 헷갈려하며 두 종교를 동시에 다 믿는 상태였는데, 이후 동로마 본토에서 다시 선교사들이 도착하면서 다시금 기독교 지역으로 복귀하였다.
2.2. 중세 후기
1390년에는 프랑스와 제노아 연합함대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바르바리 해적의 주요도시였던 마흐디아를 포위 공략했으나 실패한적도 있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후원자였던 하프스 왕조가 쇠락하고 갑자기 바르바리 해안 해적들이 정치혼란의 틈을 타 기세가 강력해지자 경각심을 느낀 유럽인들이 "바르바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
이 해적들 중 가장 이름을 남긴 이는 바로 하이르 앗 딘이다.
동유럽 정복 과정에서 이미 강대해져 가는 서유럽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오스만 제국이 서유럽 국가들을 본진에 묶어놓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면서 그 세력이 엄청나게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무슬림이나 유대인이 합류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같은 해인 1492년에 '그라나다 칙령' 을 반포하여 스페인 전역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했는데, 그들이 갈 곳이라곤 북아프리카 뿐이었기 때문[5] . 그리고 그 가운데 해적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스페인 출신이다 보니 그쪽 지리에 밝은 것은 당연지사.[6] 물론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쇠퇴하게 되지만 그와 관계없이 해적집단의 노략질은 그 뒤에도 300여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2.3.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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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활동 무대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해안 지대였으나, 18세기가 되자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서구의 범선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여 그 무대를 점차 넓혀나갔고, 아일랜드와 영국, 심지어 아이슬란드의 해안가에 나타나 주민들을 납치하고 약탈을 일삼는다. 1627년 네덜란드 출신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해적인 얀 얀스존이 이끄는 일련의 바르바리 해적들은 아이슬란드를 침략해 400명의 아이슬란드 주민들을 납치했는데, 그들중에서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노인과 허약한 사람들을 교회 안에 가둔 다음 불태워 죽이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결국 400명의 아이슬란드인들 중 242명만이 살아남아 바르바리 해적들한테 붙잡혀 갔다. 그들 중 주교인 올라프 에길슨은 몸값을 내고 다음 해인 1628년에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노예로 붙잡힌 고통스러운 경험담을 책으로 써냈다. 이 책은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에서 출판되었다.
1665년과 1660년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바르바리 해적들의 침략을 받았다. 물론 유럽 국가들은 워낙 강력한 상대이다보니 서유럽 쪽은 약탈을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벽촌만 골라서 털었고 후원자인 오스만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는 적당히 눈치를 봐서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의 선박과 주민들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서유럽 자체를 못털고 약소국이었던 러시아와 동유럽만 노렸으며, 19세기 초 이런 전략의 최대 피해국이 미국과 러시아였다. 미국은 거리가 멀다보니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러시아는 투르크와 가까워서 바르바리 해적들이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들에게 납치된 유럽인들은 모로코나 알제리, 혹은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려갔다. 남자들은 해적선과 이슬람 선박들의 노잡이나 북아프리카 카이루안의 목욕장, 이슬람권의 각종 노역장에서 죽을때까지 착취를 당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개죽음을 당했고[7] , 여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서 하녀로 살거나 이슬람 군주, 귀족들의 첩, 하녀가 되었다고 한다. 단, 몸값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살던 본국에 연락하여 몸값을 내면 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몸값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 잡혀가면 평생 노예로 살다죽었다보면 된다. 이러다보니 유럽인들은 바르바리 해적이라면 치를 떨었다.
물론 유럽 국가들도 가만있지 않아 몸값을 낼 수 없었던 가난한 기독교도들을 구출하고자 따로 구출 기사단과 구출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무력 행위는 구호기사단이나 성 스테파노 기사단이 했고, 구출 수도회나 구출 기사단은 몸값을 마련해 기독교도 노예들을 사들여 해방시켰다. 또한 일부 기독교도들은 보복으로 같은 해적단을 만들어 이슬람권 도시들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해적선과 해적 근거지만 공격한다고 했지만 실은 레스보스 섬, 보드룸 등 일반 도시도 자주 침략하여 무슬림들을 노예로 잡아 팔았다. 로도스 섬에는 대놓고 무슬림 노예 시장이 있었다고 하며[8] 레판토 해전에서도 무슬림 노잡이들이 쓰였다.[9] 당장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인 바바 우르지와 하이르 앗 딘 형제도 어린 시절에 화물 운송업을 하던 중에 구호 기사단에 포로가 되어 로도스에 갇혀 있다가 탈출, 앙심을 품고 해적이 된 경우이다. 물론 대다수의 기독교도 해적들은 대서양에서 주로 활동했다.
2.3.1. 오스만 제국의 후원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정규 해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10] 사실 바르바리 해적이 오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오스만 제국이 뒤를 봐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당하고 살던 유럽 국가들이 족치려고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17~18세기경에 이미 소멸되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후원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북아프리카 전체가 '''하나의 해적 국가'''였다는 사실이다.[11] 이미 17세기부터 유럽 해군은 여러 차례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를 폭격하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조약을 강요했으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완전한 근절에는 실패했다.[12] 때문에 프랑스에 의해 근거지인 알제리가 점령된 후에야 비로소 바르바리 해적이 완전히 소탕될 수 있었다.
미국이 프랑스에 파견한 2대 대사인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 주재 초대 미국 대사 존 애덤스와 함께 1785년 런던 주재 트리폴리 대사를 만났을 때 충격을 받았다. 두 미국 대사는 미국인들에 대한 납치에 항의하며 베르베르 이슬람 국가들이 무슨 권리로 미국 선원들과 여행자들을 납치하는지 물었다. 이에 트리폴리 대사는 쿠란과 이슬람 율법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국가 사람들은 죄인이며 전투에서 대항하는 자는 죽이고 항복하는 자는 노예가 된다고 코란에 적혀 있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이 세력은 미국이 처음으로 외교 조약을 맺은 대상이자, 최초로 미군이 해외에 파병하여 수행한 국제 전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트리폴리 조약과 1차 바르바리 전쟁 항목을 참고할 것.
2.4. 최후
19세기 초, 산업 혁명에 성공한 서구 열강은 북아프리카에서 활개치며 자꾸 유럽을 약탈하는 바르바르 해적단에게 빡쳐서 그들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서구 열강의 공격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큰 피해를 입었다. 맨 먼저 1801년과 1815년에 미국이 트리폴리를 공격하여 초토화시키면서 해적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1차 바르바리 전쟁, 2차 바르바리 전쟁), 1816년과 1820년에는 노예 무역 근절에 열을 올리던 영국이 모로코를 공격하여 남아있던 해적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이후로도 해적질은 계속되었으나 1830년 프랑스가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하여 식민지화함에 따라 바르바리 해적단은 사라졌다.
3. 대중 매체에서
-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 로빈슨이 3번째 항해에서 이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잡혀 한동안 노예생활을 하다 탈출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로델레로의 강화 버전으로 등장하는 용병. 일반 해적들은 무법자로 취급되어 인구 수만 무지나게 많이 처먹기에 효율이 별로지만, 이쪽은 가성비가 아주 훌륭하여 대 기병 전력이 부실한 국가에겐 반가운 존재다.
- 엠파이어 토탈워에 오스만의 보호국인 마이너팩션으로 나온다. 게임 처음에 "전 유럽국가와 전쟁상태"이다. (...) 덕분에 오스만이 좀 손해를 본다. 보호국이기 때문에 동맹관계인데, 이 관계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와 동맹이 불가능하다. 국력은 대단할 것 없지만, 꾸준히 나와서 약탈하고, 그렇다고 점령해봐야 먹을 것도 없는 귀찮은 존재. 다행히도 지중해의 세력들이 알아서 잡아주니 큰 문제는 안된다.
- 문명 5/등장 문명/오스만의 국가 특성으로 언급된다.
[1] 사실 바르바리 지역의 해적들은 7세기 이전부터 꾸준히 있었다. 단지 튀니지와 알제리의 정치적 혼란으로 강성해지고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은 후기 바르바리 해적이 더 유명할 뿐이다.[2] 해적단은 철저한 능력 위주이기 때문에 국적과 출신은 상관 안한다. 설령 유대인이라도 이해타산이 맞거나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스카웃을 하거나 협력하는 경우도 있다.[3] 어디까지나 추정치이기 때문에 과대하게 추정된 수치라는 비판이 있지만, 상당히 많은 인구가 끌려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4] 시라쿠사에서는 7만 명, 레조에서는 1만 5천 명이 한꺼번에 노예로 끌려갔다.[5] 당시 황제 바예지드 2세의 원조로, 오스만 제국으로도 꽤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한 유대인은 쉴레이만 대제의 주치의가 되기도 한다.[6] 여담이지만, 무슬림들을 북아프리카로 수송해주어 이름을 얻은 사람이 하이르 앗 딘의 형 바바 우르지다. 그는 후에 알제를 차지한 뒤 이러한 명성을 한 축으로 하여 잠시동안이나마 독립 왕국을 세웠고, 하이르 앗 딘도 해적 일을 하는 틈틈이 형의 이런 사업(?)을 계속해나갔다.[7] 사실 이는 유럽인 노예만 그런게 아니라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도 이렇게 당했다.[8] 로도스 섬을 근거지로 삼았던 구호기사단이 오스만 제국에게 밀려나 몰타섬으로 이주하자, 몰타섬으로 무슬림 노예 시장이 옮겨졌다. 물론 구호기사단은 로도스 섬에서 활동했던 시절처럼 무슬림들을 상대로 납치와 인신매매 같은 무자비한 해적질을 일삼았다.[9] 한편 당시 레판토해전에서 오스만 측도 똑같이 기독교 포로/노예 출신 노잡이를 썼다.[10] 그러나 이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오스만 제국에 충성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오스만 제국은 거리가 너무 멀어 신경쓸 여유가 없었으며 동지중해 지역에 중심지를 둔 이슬람 세력까지 북아프리카(정확히는 마그레브)까지 직할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무와히드 왕조와 같은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은 오랜 기간 중동의 무슬림과는 별도의 국가를 세워왔으며, 이들은 종속적 관계에 있지 않았다. 아래 언급된 하이르 앗 딘의 형 바바 우르지만 하더라도 '알제의 술탄' 을 칭하며 독립 왕국을 세우려 했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이 통일되고, 지중해에 세력권을 형성하며 바르바리에 대한 토벌을 시작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바르바리와 오스만은 결국 파디샤(황제)가 해적 두목에게 에미르라는 작위를 주면서 해군 제독의 직함을 내리는 방식으로 서로 해군과 육군을 제공하는 공조관계를 맺게 된다.[11] 이는 다른 면에서 보면 이미 해적이 제1산업이 되었을 정도로 다른 산업 발달이 미비했음을 암시한다.[12] 바르바리 해적은 당연히 유럽 국가와의 조약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나 스페인 같이 바르바리 해적들의 약탈과 납치에 시달린 유럽 나라들은 아예 바르바리 해적들을 상대로 매년마다 따로 돈을 주고 자국민들을 상대로 납치나 약탈을 벌이지 말라는 협상까지 벌여야했다. 이는 중국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들의 약탈과 납치에 시달리다 그들한테 매년 공물을 바치고 달랬던 일과 비슷하다. 토벌을 하러 군대를 보내봐야 제대로 효과가 없고, 차라리 돈을 줘서 달래는 편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