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비외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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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앙리 비외탕'''
이름(영문)
'''Henri Vieuxtemps'''
출생지
벨기에 베르비에르
생몰년도
1820년 2월 17일 ~ 1881년 6월 6일
1. 개요
2. 생애
3. 작품


1. 개요


비외탕은 벨기에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1820년 벨기에에서 태어나서 1881년 프랑스 식민지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음악은 매우 난해하고 어렵기로 유명하며, 흔히 파가니니, 사라사테 등과 함께 전공자들이나 바이올리니스트도 어려워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악명이 높다. 그의 곡들은 매우 주의 깊고 어려운 테크닉과 기교를 요한다. 유명한 곡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이 있다.

2. 생애


베르비에르[1]의 직조공과 바이올린 직공 집안에서 출생했다. 음악을 애호하는 가정환경 아래에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현지 음악가로부터 바이올린의 수업을 받고 6세에 피에르 로데의 작품을 연주해 공개 데뷔를 했다.
곧 주변 도시에서도 연주를 하게 되고 브뤼셀에서 샤를 드 베리오[2]의 지원을 받아 사사하게 된다.1829년 베리오에 이끌려 파리로 향했고 현지에서도 로드 협주곡을 연주하며 대성공 끝에 데뷔했다.그러나 이듬해에는 7월 혁명이 발발한 데다 스승 드 베리오가 마리아 말리브란과 이탈리아로 달아나는 바람에 혈혈단신으로 브뤼셀로 돌아가 연주여행을 준비해야 했다. 이후에는 자력으로 바이올린의 연주 기교를 닦는다.
1833년의 독일음악 여행에서는, 루이스 슈포어나 슈만과도 친교를 맺고 슈만에게서는 「작은 파가니니」로 비유되었다. 그로부터 10년간은 유럽 각지를 순방하면서 청중뿐 아니라 베를리오즈파가니니 같은 거장들조차 초절기교로 압도했다.
그러는 한편, 작곡가에 대한 동경 때문에, 1835년의 겨울부터 빈 음악원에 유학해 지몬 제히터에게 음악이론과 대위법을, 다음 1836년부터는 파리에서 안토닌 레이하(앙투안 라이하)에게 작곡을 사사. 첫 바이올린 협주곡(나중에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으로 출간)은 이 무렵의 습작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연주회》는 184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계 초연과 이듬해 파리 초연에서 극찬을 받았으며 베를리오즈로부터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격조 높은 교향곡'으로 평가받았다. 비외탕은 파리를 거점으로 작곡가로서 큰 활약을 하였으며, 반주가로는 피아니스트 지기스몬트 타르베르크(Zigusmont Tarburk)를 파트너로 하여 유럽 각지뿐만 아니라 미합중국에서도 활약하였다. 특히 러시아 제국에서 존경을 얻었으며, 1846년부터 1851년까지 니콜라이 1세의 궁정음악가와 황실극장 수석연주가로 임명되어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였으며, 교사로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바이올린과가 번영하는 기초를 다졌다.
1871년 귀국해 브뤼셀 음악원 교수로 외젠 이자이 등의 인재를 배출한다. 뇌중풍(뇌졸중)으로 마비로 우반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그는 음악원 강좌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에게 맡기고 파리로 건너가 치료에 전념했다. 차츰 회복되는 듯하던 1879년 발작이 재발, 그만 연주가로서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가장 말년에는 딸 부부가 살고 있는 알제리로 이주해 무스타파 슈페리어의 요양소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곡활동을 계속했지만 더 이상 연주는 불가능했고, 유럽 예술문화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는 소리도 듣기조차 힘든 자신의 불행을 한탄했다. 마차로 이동 중 현지 취객이 던진 돌에 머리를 다쳐 그 상처의 합병증으로 무스타파 레잘제에서 사망했다.

3. 작품


비외탕 작품의 근간은 바이올린곡으로 7곡의 협주곡과 변화무쌍한 짧은 살롱 소품이 포함되었으나,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단념한 뒤 종종 다른 악기로 전환하여 2개의 첼로 협주곡과 1개의 비올라 소나타 등을 작곡하였다. 현악 4중주곡은 세 곡이다. 그러나 비외탕이 바이올린 역사에서 프랑코=벨기에 주파의 탁월한 연주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7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덕분이다.
비외탕의 협주곡은 위 베를리오즈의 어록에서 보듯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의 심포닉한 일체감과 음색의 대비를 추구한 작품으로 마무리되며 멘델스존베버,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악장의 결합과 형식의 실험 등 작곡기법에서도 창의성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동시대 연주가들의 협주곡에 흔치 않은, 독주악기가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초절기교를 과시하는 작품들과는 다른 차원이 있다. 말년의 첼로 협주곡은 비외탕의 울적한 심리상태를 표현하듯 답답한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
솔리스트로서의 비외탕은 자작 이외에 베토벤이나 멘델스존의 협주곡(심지어 베토벤의 실내악곡) 연주를 통해 당시의 무턱대고 겉모습만 화려함을 추구하는 바이올린계의 풍조를 규제해 고전적인 깊이를 가져왔다. 베를리오즈 등에게서 받은 칭찬은 지금은 격찬이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비외탕이 좋은 취미의 소유자이고, 진정한 음악적 감각을 갖고 싶어했다는 점은 알아두어야 한다. 결코 선배 바이올리니스트들처럼 얄팍한 연주 기교에만 빠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드 베리오나 로드 등의 협주곡이 그 내용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흐르지 못했다면, 비외탕의 협주곡은 가령 생상스의 예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 현재 벨기에 왈롱 리에주의 소도시[2]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프랑스 - 벨기에 지방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법의 창시자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