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시 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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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군인. 일제강점기 제4대 조선 총독.
부패한 "금권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질과 탐관오리로 유명했는데, 결국 이것으로 인해 정치생명이 끝장났다. 조선총독부 부임 전에도 시베리아 출정 당시 일본군이 획득한 황금을 횡령하는 등의 혐의로 군부내에서 '배금 장군'이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본 우익들에게조차 역대 조선총독들 중 이 총독만큼은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2. 생애
야마나시 한조는 1864년 4월 6일, 에도 막부 사가미국 오스미군에서 태어났다. 188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을 하였으며, 1892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뒤 1921년 하라 다카시 내각의 육군 대신이 되었다. 이 시기 야마나시는 정치군인으로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의 군 개혁에 크게 반발하여 이를 무산시키면서도, 세계적 대세였던 감군과 군축에는 동의하여 2차례에 걸쳐 이른바 야마나시 군축을 단행하는 등 정당세력과 군벌세력간에서 중간적인 입장에 있었고, 그 덕분에 당시 수차례 내각이 바뀌었음에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육군대신을 그만 둔 후 관동 대지진 시절에는 관동 계엄 사령관 및 도쿄 경비 사령관을 하기도 했다.
1925년 4월 동기이자 정치선배인 다나카 기이치가 정우회의 총재로 되자 곧바로 다음 달인 5월에 전역해서 예비역이 되었고, 정치에 발을 담그면서 동기가 있는 정우회와 정우본당 사이에서 간을 보았는데, 결국 야마나시가 정우본당의 뒤통수를 치고 정우본당의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정우회로 끌여들이는 등 적극적인 정치공작을 벌인 것이 발각되어 정우본당, 그리고 나중에 정우본당이 헌정회와 합당하여 창당된 민정당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이 때의 자금 출처가 문제로 되면서 시베리아 출병 당시 비자금을 빼돌렸다가 쓴 것이 확실하다는 의혹까지 일어났다.
전임 조선총독부의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4일)의 전권대표로 조선 총독직을 일시 사임하자 야마나시는 신임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야마나시가 총독일 당시에는 사이토의 문화 통치를 이어 받아 느슨한 통치를 했으며, 심지어 더 느슨해졌다. 심지어 구색맞추는 기관에 불과했던 친일파 중추원 의원들이 조선인의 권익을 증진하자는 대규모 청원과 요구를 퍼부었는데, 야마나시는 '관대하게도' 이에 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경성일보>들에 비판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직책을 맡으면서 그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장나게 되었다. 당시 미곡상이 경성(서울)에 미곡 거래소 설립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야마나시 장군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해 조명하가 타이완에서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을 암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그는 불과 1년 8개월만에 조선 총독에서 사임하게 되고 전임 총독 사이토 제독이 다시 총독으로 복귀했다. 일제의 패전과 광복으로 물어난 아베 노부유키를 제외하면 최단임 총독이다.
그는 재판을 받고 주변 사람들은 유죄를 받았으나 야마나시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이 되었으나 이로 인해 1929년 말에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계속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44년 7월 2일,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자연사했다. 그의 나이 향년 80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