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명하
趙明河'''

'''출생'''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
'''사망'''
1928년 10월 10일 (향년 23세)
일본령 대만 다이호쿠 다이호쿠 형무소
'''본관'''
함안(咸安) 조씨[1]#
'''별칭'''
일본 이름 아카가와 도미오(明河豊雄)
'''학력'''
황해도 송화 풍천보통학교 중퇴
일본 오사카 상공업중학교[2] 상업학부 중퇴
'''이력'''
황해도 송화군청 판임관[3]
찻집 부귀원(富貴圓) 종업원
'''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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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明河
(1905년 4월 8일 ~ 1928년 10월 10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다.
특이하게도 한반도중국 대륙, 미국이 아닌 타이완 섬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나 폭탄이 아닌 을 이용해서 의거를 일으킨 것도 특이한 점. 일제 식민지였던 타이완 섬에서 다이쇼 덴노의 바깥사돈이자 쇼와 덴노의 장인, 고준 황후의 친정아버지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을 처단했다. 조명하는 일본 황족을 처단하는데 성공한 유일한 한국인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 태생#으로 젊었을 때는 황해도 신천군 군청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 운동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 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을 떠났다.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 섬에 도착했다가, 바로 상하이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타이중시에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찻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타이완 섬의 항일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대만총독부의 총독 등 요인을 암살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답답해 하다가, 1928년 5월 대만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력인 대만군검열하기 위해 당시 천황 쇼와 덴노의 장인(고준 황후의 아버지)이자 본인도 황족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이 육군특별검열사로 파견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5월 14일 타이중시에서 열린 환영식 환영인파 속에서 기다리다가 구미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독을 묻힌 칼[4]을 집어던졌고[5]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목에 칼을 맞은 구니노미야는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칼에 찔린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다음해 1월 죽었다.
'''체포 직후 촬영된 조명하의 머그샷. 왼쪽은 한국 연구진이 대만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진이다.'''
조명하 의사는 1928년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6]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7],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8]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24세.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 가미야마 만노신이 사임했으며, 이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가 조선인 '관리' 및 후속 조치 미흡으로 사임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3. 사후


'''서울대공원에 세워져 있는 동상[이미지출처]'''
독립 후인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現 독립장)이 추서되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조명하 의사의 동상이 과천 서울대공원에 있다. 주 타이베이 한국학교에도 조 의사의 동상이 있다.#
1989년 5월 13일, KBS1에서 특집드라마 '조명하'를 방영하였다. 극본은 이상현, 연출은 최상현 PD였고 궁예김두한으로 유명한 '''김영철이 조명하 의사 역을 맡았으며,''' 구니노미야 역은 최명수가 연기했다. 그 외 출연진은 이낙훈, 신구, 연규진, 박원숙, 안영주, 장희진, 고아라, 장항선, 김하림, 백찬기, 이원종, 김종구, 김창봉, 최수종, 서영진, 이한승, 박정웅 등이다.
2018년에는 대만 타이중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관련 기사
2020년에 단도의 사진 등 추가 사료가 발견되었다.#

조명하 의사 증손 조경환씨 인터뷰

[1] 29세손 口제(濟) 항렬. 아버지 조용우(趙鏞禹)는 28세손 용(鏞) 항렬.[2] 현재의 오사카 공립 돈다바야시 중고등학교[3] 군청서기[4] 독이 아니라 배설물을 가볍게 도포했다고도 한다. 상처에 감염증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5] 조명하 의사는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조직과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기 때문에 총이나 폭탄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타이완의 항일운동가들에게 무술과 검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6] 현재는 대만 사법원 및 대만고등법원 건물로 쓰이나, 현재의 건물은 1934년에 준공된 건물이다.[7] 당시 일본에서 황족에 위해를 주는 사건은 대역죄라 하여 1심제였고 사형만이 선고될 수 있었다.[8] 현재는 타오위안으로 이전했고 옛 건물은 철거, 현재 벽만 일부 남아있다.[이미지출처] Sony DSC-RX10, 2015년, 사진 촬영자 최광모, 공용 도메인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