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카게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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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杉景勝 (うえすぎ かげかつ) 상삼경승
(1556.01.08 ~ 1623.04.19)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이자 에도시대 요네자와번(米沢藩)[1] 의 초대 번주.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로, 원래 이름은 나가오 아키카게(長尾顕景).
원래 겐신의 누이인 아야고젠의 아들로, 겐신의 원 성씨인 산조 나가오가(三条長尾家)의 방계인 우에다 나가오가(上田長尾家)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의 자식이다. 나가오 마사카게는 겐신이 형 나가오 하루카게(長尾晴景)를 몰아내고 에치고를 장악할 적에 최후까지 저항했음에도 이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집안 내에서 좋지 않은 본보기였다.
이후 나가오 마사카게가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定満)와 뱃놀이 도중 함께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난다.[2] 이로 인해 우사미 일족은 에치고에서 추방당했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카게카츠는 우에스기 켄신의 양자가 되었다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카게카츠 말고도 호조(北条) 가문에서 들인 양자 카게토라가 있었다. 호조가 출신의 양자 우지히데(北条氏秀)는 우에스기 겐신의 첫 이름이었던 카게토라(景虎)를 내려받아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되었으며, 카게카츠보다 5년 정도 앞서 우에스기성을 사용했다. 게다가 카게토라의 거주지가 카게카츠보다 혼마루에 가까웠으며, 겐신에게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家) 성[3] 과 관동관령(関東管領)[4] 직을 양도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카게토라 편에 붙은 걸로 보아,[5] 겐신은 카게토라를 후계자로 삼고, 카게카츠를 보좌역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반대로 겐신 생전에 카게카츠에게 겐신의 관위였던 단죠노쇼히츠(弾正少弼)직을 물려준 점, 겐신 생전에 작성된 '우에스기가 군역첩'에 카게카츠가 겐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던 고미죠사마(御実城様)와 비슷한 고나카죠사마(御中城様)로 기록된 점 등에서 미루어볼 때 오히려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삼으려했다는 설이 있다. 또 카게토라에게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를, 카케카츠에게는 나가오 우에스기[6] 를 잇게 하여 분가시키려 했다는 설 등 아직 역사학계에서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다만 어느쪽이든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이어받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성과 관동 관령직은 카게토라에게 넘기려 했다는 설이 많다.
겐신이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고 급사하자, 어릴 적부터 카케카츠를 섬겼던 측근이자 실세를 잡고있었던 나오에 카네츠구는 카게카츠를 급히 옹립하고 카게토라파를 축출했다. 다행히 선대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카키자키(柿崎), 기타조(北条)[7] 등을 제외한 선대의 중신들 이로베(色部), 사이토(斎藤), 나카죠(中条), 아마카스(甘粕), 혼조(本庄) 등은 모두 카게카츠 파였다.[8]
초반에는 카게토라가 본가인 호조가와 다케다가의 후원을 받아 우세했으나, 카게카츠가 다케다 집안에 엄청난 뇌물을 먹이고[9] 다케다 신겐의 딸 키쿠히메(菊姫)와 약혼하는 등 후원을 얻었으므로 카게토라는 대패하고 도망가던 길에 죽었다. 난의 초반에는 외부세력의 힘을 등에 업은 카게토라의 세력이 명백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호조의 본대가 적대가문인 사타케(佐竹)-우츠노미야(宇都宮)의 연합군에 발이 묶여 진군이 늦어졌고 이후 다케다의 변심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패배하게 되었던 것.[10]
아무리 승계에 카네츠구가 공이 컸다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애송이'라는 소릴 들으며 범재 취급을 당한걸 보면 그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네츠구는 아예 대놓고,
다만 이는 에도시대 군담소설 등에 나오는 이야기로, 실제로도 이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장 카네츠구는 카게카츠보다 5살 연하로, 카게카츠가 우에스기가의 당주가 되었을 때 카네츠구는 겨우 19살이었다. 더구나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자신의 직신(直臣)이 될 것을 요구했을 때, 카네츠구는 카게카츠에 대한 충정을 내세워 거절했다. 본인이 깔보던 주군 때문에 더 조건이 좋은 스카웃을 거절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겐신을 훌륭한 무장으로서 존경하고 있던 카게카츠는, 항상 겐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행동했다고 한다. 카게카츠가 늙어 병에 걸렸을 때 출가하여 소신(宗心)이라는 법명을 썼는데, 이는 겐신이 예전에 교토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던 법명이다.
그렇게 카게카츠가 우에스기 가의 당주가 되긴 했지만, 더한 시련이 오고 있었다. 먼저 은상문제로 중신인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가 시바타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호응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파견한 시바타 카츠이에가 마에다 토시이에, 삿사 나리마사 등과 함께 엣추 방면에서 우에스기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11] 텐모쿠잔에서 다케다 카츠요리가 패사한 뒤에는, 북시나노 방면에서 모리 나가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가 북상해 카게카츠는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진다. 여기에 오다테의 난[12] 으로 틀어진 호조가 마저 코즈케 방면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마침내, 엣추가 오다 세력에 떨어지고, 이 때 카게카츠 본인도 옥쇄를 각오하고, 무사시의 오타 스케마사(太田資正)[13] 에게 "일본의 60여 주를 상대로, 에치고 일국으로 도전하게 되다니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내용의 유언장까지 남겼다.
하지만 곧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카게카츠는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14]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키요스 회의를 거쳐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대두된다.
카케카츠가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와 상대할 것을 준비하고 있을 때, 히데요시는 '''혼자 카케카츠 진영에 직접 들어가서''' 카케카츠와의 강화를 이끌어낸다. 나름 뭐 담대한 히데요시같기도 하고 적국의 총대장을 그냥 보낸 카케카츠가 더 대인배같기도 하지만, 일화로는 단신으로 적국에 방문한 히데요시에게 감동했다는듯. 어쨌든 패배하여 항복한게 아니기에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의 대우 역시 거진 이에야스보다 약간 못한 정도였다.
어쨌든 이에 카게카츠도 이에 응해 히데요시를 지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토야마의 역에서 히데요시 측을 지원하여 히데요시의 신임을 산다.
이후, 상경해 히데요시와 회견해 신종, 오오기마치 덴노를 알현해 조정의 벼슬까지 얻게 된다.
임진왜란 때는 이에야스 처럼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한 다이묘가 아니기에 히데요시도 대대적으로 참전을 요청하기는 힘들었고, 이에 카케카츠도 1592 6.9 ~ 9.8 딱 3개월간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나오에 카네츠구와 다카나시 요리치카(高梨頼親) 등을 대동하여 조선으로 도해하여 현재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웅천왜성을 축성하였고, 그 기간 동안에도 싸움보다는 조선에서 서적을 털어가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1597년 오대로의 일원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오대로가 되었다.
1598년 1월, 히데요시는 당대 강력한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테 마사무네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해 이 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카게카츠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번으로 전봉시켰다. 이 때 고쿠다카도 기존의 90만 석에서, 120만 석으로 전국 넘버3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얼마 전, 카게카츠는 후시미저택을 떠나 아이즈 영지로 돌아가서 군비를 증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발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토벌군을 이끌고 출발했으나 아이즈로 향하는 도중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을 듣고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대신 모가미 요시아키와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집안을 상대하도록 했다. 우에스기 군은 무문의 명문답게 다테군을 개발살내며 선전했지만, 세키가하라의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사기가 떨어지고 후퇴 및 수비 일변도로 변하여 모가미군과 다테군의 반공에 시달렸다.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마디했을 뿐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죄를 요구했고, 1601년 8월 16일.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오사카성을 찾아가 이에야스에게 사죄한다. 그리고 원래 영지의 북쪽 일부였던 요네자와로 영지를 옮기게되고, 고쿠다카는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4분의 1로 줄어들게된다. 원래 이에야스는 가이에키[15] 처벌을 생각했으나 이에야스의 차남이자 우에스기 토벌군 대장이었던 유키 히데야스가 카게카츠를 높게 평가하여 적극적으로 구명하고, 나오에 카네츠구가 혼다 마사노부를 만나 나오에가의 후계자를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로 정하기로 한 끝에 가이에키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시대 초기 우에스기 가문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16][17]
게다가 요네자와번 4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上杉綱憲)[18] 시절엔 30만석의 절반인 15만석으로 감봉까지 되었다. 이는 3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카츠(上杉綱勝)가 아들도 없는 상태에서 양자 같은 후계자 지명도 없이 급사했고, 따라서 후계자 없는 요네자와번은 원칙적으론 가이에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츠나카츠의 장인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19] 의 노력으로 츠나노리를 말기양자[20] 로 들이는 것과 영지의 절반인 15만석 감봉의 조건으로 겨우 가이에키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에스기가의 재정난은 계속되고, 후대 번주(藩主)들은 어떻게든 감봉된 영지의 회복을 꾀하고자 없는 돈에 빚까지 끌어다 로비까지 했는데,[21] 오히려 이는 빚만 더 늘어나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 재정난은 18세기 요네자와번의 9대 번주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22] 이 단순한 절약만이 아닌 적극적인 식산흥업과 복지정책, 의식개혁을 일으킨 덕에 그 만년에야 겨우 어찌어찌 수습된 뒤 지역 명사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몬 후유지가 쓴 소설 우에스기 요잔(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불씨)에 이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전투씬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전투를 다룬 소설처럼 치열함이 느껴진다.
도쿠가와 가문과는 안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우에스기 가문이지만, 보신전쟁시에는 의리를 지켜 막부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고, 판적봉환이 실시되면서 요네자와도 몰수된다. 그래도 후손들은 화족으로 대우받고 관직도 부여받으며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았다.
사족이지만 2014년 현재 요네자와 우에스기가의 당주는 우에스기 쿠니노리(上杉邦憲, 1943년생)라는 사람인데,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그 동생인 우에스기 다카하루(上杉隆治)는 음악가였다고 한다.(2006년 사망) 이 두 사람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출신이라서 오늘날 도쿠가와 종가와 요네자와 우에스기가는 인척 관계인 셈이다.
에도시대 초기에는 우에스기 집안 내에서도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저평가를 당했지만, 후에 긍정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믿을 수 있는 사나이', '무문명가의 대장'같은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요네자와 번[23] 우에스기 가의 일사불란한 가풍과 무문 모두의 명문이라는 자긍심은 가게카츠의 대에 와서 확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말수가 적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지라, 온 집안의 인간들이 가게카츠를 두려워했다. 다음은 가게카츠의 인품에 관련된 일화 몇 가지.
모에화되어 우에스기 카츠코로서 등장.
어느정도의 전투형 만능 다이묘이다. 양아버지보다는 통솔, 무력이 낮지만 다른 능력치인 지력, 정치는 양아버지보다 높다. 물론 겐신이 지력, 정치가 너무 낮은 이유가 있지만.
천하창세에서는 마지막 등장 기준으로 정치:80, 통솔:85, 지력:67, 교양:67, 특기:기마2, 철벽,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양아버지가 있든 없든 쓸만한 무장.
천도에서는 통솔 90, 무용 87, 지략 71, 정치 84에 전법이 양아버지의 전법인 차현지비로 비록 양아버지만큼은 못하지만 역시 쓸만하다.
창조에서는 통솔 83, 무용 80, 지략 70, 정치 82에 보수 성격으로 전작보다 하향된 것으로 보이나, 천도는 능력치 최고가 120, 창조는 초기에 100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상당히 상향된 편이다. 천도처럼 최고치 120으로 계산하면 지략만 빼고 모두 90이 넘는 특급 능력치다. 또한 창조 역시 경험을 통해 120까지 능력치 상향이 가능하기 때문에 최종능력치는 아니다.
코에이의 삼국지 12에서는 등장하는데. 어째선지 병종이 창병에 전법이 기병격봉인이라서 기병이 득실한 우에스기보다는 유비, 원소, 오다 노부나가에게 쓸만한 무장이다.
역사대로 겐신의 양자. 남자다. 능력치도 미묘하게 낮다. 말수가 적어서 어깨위의 원숭이인 사루가 대신 의사소통을 한다. 검덕후.
우에스기 카게카츠(전국무쌍) 항목 참조.
큰 비중은 없으나 우에스기 겐신 카드를 얻기위해선 플레이해야 할 인물. 우에스기 겐신 병사 이벤트를 볼 경우 후계자가 되고, 겐신의 주인공 카드를 얻게 된다. 이 방법외에 겐신의 카드를 얻는 방법은 시바타 가츠이에로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뿐이다.
上杉景勝 (うえすぎ かげかつ) 상삼경승
(1556.01.08 ~ 1623.04.19)
1. 출신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이자 에도시대 요네자와번(米沢藩)[1] 의 초대 번주.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로, 원래 이름은 나가오 아키카게(長尾顕景).
원래 겐신의 누이인 아야고젠의 아들로, 겐신의 원 성씨인 산조 나가오가(三条長尾家)의 방계인 우에다 나가오가(上田長尾家)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의 자식이다. 나가오 마사카게는 겐신이 형 나가오 하루카게(長尾晴景)를 몰아내고 에치고를 장악할 적에 최후까지 저항했음에도 이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집안 내에서 좋지 않은 본보기였다.
이후 나가오 마사카게가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定満)와 뱃놀이 도중 함께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난다.[2] 이로 인해 우사미 일족은 에치고에서 추방당했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카게카츠는 우에스기 켄신의 양자가 되었다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카게카츠 말고도 호조(北条) 가문에서 들인 양자 카게토라가 있었다. 호조가 출신의 양자 우지히데(北条氏秀)는 우에스기 겐신의 첫 이름이었던 카게토라(景虎)를 내려받아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되었으며, 카게카츠보다 5년 정도 앞서 우에스기성을 사용했다. 게다가 카게토라의 거주지가 카게카츠보다 혼마루에 가까웠으며, 겐신에게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家) 성[3] 과 관동관령(関東管領)[4] 직을 양도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카게토라 편에 붙은 걸로 보아,[5] 겐신은 카게토라를 후계자로 삼고, 카게카츠를 보좌역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반대로 겐신 생전에 카게카츠에게 겐신의 관위였던 단죠노쇼히츠(弾正少弼)직을 물려준 점, 겐신 생전에 작성된 '우에스기가 군역첩'에 카게카츠가 겐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던 고미죠사마(御実城様)와 비슷한 고나카죠사마(御中城様)로 기록된 점 등에서 미루어볼 때 오히려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삼으려했다는 설이 있다. 또 카게토라에게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를, 카케카츠에게는 나가오 우에스기[6] 를 잇게 하여 분가시키려 했다는 설 등 아직 역사학계에서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다만 어느쪽이든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이어받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성과 관동 관령직은 카게토라에게 넘기려 했다는 설이 많다.
2. 후계분쟁과 승계
겐신이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고 급사하자, 어릴 적부터 카케카츠를 섬겼던 측근이자 실세를 잡고있었던 나오에 카네츠구는 카게카츠를 급히 옹립하고 카게토라파를 축출했다. 다행히 선대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카키자키(柿崎), 기타조(北条)[7] 등을 제외한 선대의 중신들 이로베(色部), 사이토(斎藤), 나카죠(中条), 아마카스(甘粕), 혼조(本庄) 등은 모두 카게카츠 파였다.[8]
초반에는 카게토라가 본가인 호조가와 다케다가의 후원을 받아 우세했으나, 카게카츠가 다케다 집안에 엄청난 뇌물을 먹이고[9] 다케다 신겐의 딸 키쿠히메(菊姫)와 약혼하는 등 후원을 얻었으므로 카게토라는 대패하고 도망가던 길에 죽었다. 난의 초반에는 외부세력의 힘을 등에 업은 카게토라의 세력이 명백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호조의 본대가 적대가문인 사타케(佐竹)-우츠노미야(宇都宮)의 연합군에 발이 묶여 진군이 늦어졌고 이후 다케다의 변심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패배하게 되었던 것.[10]
아무리 승계에 카네츠구가 공이 컸다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애송이'라는 소릴 들으며 범재 취급을 당한걸 보면 그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네츠구는 아예 대놓고,
라고 했으며, 카게카츠도 이를 잘 따라 경거망동하지 않았다.'돌아가신 어르신을 따라잡기는 요원한 일이나, 주군께서 어르신의 모습을 흉내내어 가만히 있고, 소인이 어르신의 군략을 흉내내면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다만 이는 에도시대 군담소설 등에 나오는 이야기로, 실제로도 이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장 카네츠구는 카게카츠보다 5살 연하로, 카게카츠가 우에스기가의 당주가 되었을 때 카네츠구는 겨우 19살이었다. 더구나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자신의 직신(直臣)이 될 것을 요구했을 때, 카네츠구는 카게카츠에 대한 충정을 내세워 거절했다. 본인이 깔보던 주군 때문에 더 조건이 좋은 스카웃을 거절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겐신을 훌륭한 무장으로서 존경하고 있던 카게카츠는, 항상 겐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행동했다고 한다. 카게카츠가 늙어 병에 걸렸을 때 출가하여 소신(宗心)이라는 법명을 썼는데, 이는 겐신이 예전에 교토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던 법명이다.
3. 오다가와의 싸움
그렇게 카게카츠가 우에스기 가의 당주가 되긴 했지만, 더한 시련이 오고 있었다. 먼저 은상문제로 중신인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가 시바타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호응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파견한 시바타 카츠이에가 마에다 토시이에, 삿사 나리마사 등과 함께 엣추 방면에서 우에스기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11] 텐모쿠잔에서 다케다 카츠요리가 패사한 뒤에는, 북시나노 방면에서 모리 나가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가 북상해 카게카츠는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진다. 여기에 오다테의 난[12] 으로 틀어진 호조가 마저 코즈케 방면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마침내, 엣추가 오다 세력에 떨어지고, 이 때 카게카츠 본인도 옥쇄를 각오하고, 무사시의 오타 스케마사(太田資正)[13] 에게 "일본의 60여 주를 상대로, 에치고 일국으로 도전하게 되다니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내용의 유언장까지 남겼다.
하지만 곧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카게카츠는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14]
4. 히데요시에게 항복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키요스 회의를 거쳐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대두된다.
카케카츠가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와 상대할 것을 준비하고 있을 때, 히데요시는 '''혼자 카케카츠 진영에 직접 들어가서''' 카케카츠와의 강화를 이끌어낸다. 나름 뭐 담대한 히데요시같기도 하고 적국의 총대장을 그냥 보낸 카케카츠가 더 대인배같기도 하지만, 일화로는 단신으로 적국에 방문한 히데요시에게 감동했다는듯. 어쨌든 패배하여 항복한게 아니기에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의 대우 역시 거진 이에야스보다 약간 못한 정도였다.
어쨌든 이에 카게카츠도 이에 응해 히데요시를 지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토야마의 역에서 히데요시 측을 지원하여 히데요시의 신임을 산다.
이후, 상경해 히데요시와 회견해 신종, 오오기마치 덴노를 알현해 조정의 벼슬까지 얻게 된다.
5. 전봉과 감봉
임진왜란 때는 이에야스 처럼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한 다이묘가 아니기에 히데요시도 대대적으로 참전을 요청하기는 힘들었고, 이에 카케카츠도 1592 6.9 ~ 9.8 딱 3개월간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나오에 카네츠구와 다카나시 요리치카(高梨頼親) 등을 대동하여 조선으로 도해하여 현재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웅천왜성을 축성하였고, 그 기간 동안에도 싸움보다는 조선에서 서적을 털어가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1597년 오대로의 일원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오대로가 되었다.
1598년 1월, 히데요시는 당대 강력한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테 마사무네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해 이 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카게카츠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번으로 전봉시켰다. 이 때 고쿠다카도 기존의 90만 석에서, 120만 석으로 전국 넘버3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얼마 전, 카게카츠는 후시미저택을 떠나 아이즈 영지로 돌아가서 군비를 증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발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토벌군을 이끌고 출발했으나 아이즈로 향하는 도중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을 듣고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대신 모가미 요시아키와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집안을 상대하도록 했다. 우에스기 군은 무문의 명문답게 다테군을 개발살내며 선전했지만, 세키가하라의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사기가 떨어지고 후퇴 및 수비 일변도로 변하여 모가미군과 다테군의 반공에 시달렸다.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마디했을 뿐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죄를 요구했고, 1601년 8월 16일.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오사카성을 찾아가 이에야스에게 사죄한다. 그리고 원래 영지의 북쪽 일부였던 요네자와로 영지를 옮기게되고, 고쿠다카는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4분의 1로 줄어들게된다. 원래 이에야스는 가이에키[15] 처벌을 생각했으나 이에야스의 차남이자 우에스기 토벌군 대장이었던 유키 히데야스가 카게카츠를 높게 평가하여 적극적으로 구명하고, 나오에 카네츠구가 혼다 마사노부를 만나 나오에가의 후계자를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로 정하기로 한 끝에 가이에키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시대 초기 우에스기 가문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16][17]
게다가 요네자와번 4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上杉綱憲)[18] 시절엔 30만석의 절반인 15만석으로 감봉까지 되었다. 이는 3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카츠(上杉綱勝)가 아들도 없는 상태에서 양자 같은 후계자 지명도 없이 급사했고, 따라서 후계자 없는 요네자와번은 원칙적으론 가이에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츠나카츠의 장인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19] 의 노력으로 츠나노리를 말기양자[20] 로 들이는 것과 영지의 절반인 15만석 감봉의 조건으로 겨우 가이에키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에스기가의 재정난은 계속되고, 후대 번주(藩主)들은 어떻게든 감봉된 영지의 회복을 꾀하고자 없는 돈에 빚까지 끌어다 로비까지 했는데,[21] 오히려 이는 빚만 더 늘어나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 재정난은 18세기 요네자와번의 9대 번주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22] 이 단순한 절약만이 아닌 적극적인 식산흥업과 복지정책, 의식개혁을 일으킨 덕에 그 만년에야 겨우 어찌어찌 수습된 뒤 지역 명사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몬 후유지가 쓴 소설 우에스기 요잔(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불씨)에 이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전투씬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전투를 다룬 소설처럼 치열함이 느껴진다.
도쿠가와 가문과는 안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우에스기 가문이지만, 보신전쟁시에는 의리를 지켜 막부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고, 판적봉환이 실시되면서 요네자와도 몰수된다. 그래도 후손들은 화족으로 대우받고 관직도 부여받으며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았다.
사족이지만 2014년 현재 요네자와 우에스기가의 당주는 우에스기 쿠니노리(上杉邦憲, 1943년생)라는 사람인데,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그 동생인 우에스기 다카하루(上杉隆治)는 음악가였다고 한다.(2006년 사망) 이 두 사람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출신이라서 오늘날 도쿠가와 종가와 요네자와 우에스기가는 인척 관계인 셈이다.
6. 평가
에도시대 초기에는 우에스기 집안 내에서도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저평가를 당했지만, 후에 긍정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믿을 수 있는 사나이', '무문명가의 대장'같은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요네자와 번[23] 우에스기 가의 일사불란한 가풍과 무문 모두의 명문이라는 자긍심은 가게카츠의 대에 와서 확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말수가 적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지라, 온 집안의 인간들이 가게카츠를 두려워했다. 다음은 가게카츠의 인품에 관련된 일화 몇 가지.
7. 대중문화에서
7.1. 란스 시리즈
모에화되어 우에스기 카츠코로서 등장.
7.2. 노부나가의 야망
어느정도의 전투형 만능 다이묘이다. 양아버지보다는 통솔, 무력이 낮지만 다른 능력치인 지력, 정치는 양아버지보다 높다. 물론 겐신이 지력, 정치가 너무 낮은 이유가 있지만.
천하창세에서는 마지막 등장 기준으로 정치:80, 통솔:85, 지력:67, 교양:67, 특기:기마2, 철벽,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양아버지가 있든 없든 쓸만한 무장.
천도에서는 통솔 90, 무용 87, 지략 71, 정치 84에 전법이 양아버지의 전법인 차현지비로 비록 양아버지만큼은 못하지만 역시 쓸만하다.
창조에서는 통솔 83, 무용 80, 지략 70, 정치 82에 보수 성격으로 전작보다 하향된 것으로 보이나, 천도는 능력치 최고가 120, 창조는 초기에 100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상당히 상향된 편이다. 천도처럼 최고치 120으로 계산하면 지략만 빼고 모두 90이 넘는 특급 능력치다. 또한 창조 역시 경험을 통해 120까지 능력치 상향이 가능하기 때문에 최종능력치는 아니다.
코에이의 삼국지 12에서는 등장하는데. 어째선지 병종이 창병에 전법이 기병격봉인이라서 기병이 득실한 우에스기보다는 유비, 원소, 오다 노부나가에게 쓸만한 무장이다.
7.3. 센고쿠히메
역사대로 겐신의 양자. 남자다. 능력치도 미묘하게 낮다. 말수가 적어서 어깨위의 원숭이인 사루가 대신 의사소통을 한다. 검덕후.
7.4. 전국무쌍 시리즈
우에스기 카게카츠(전국무쌍) 항목 참조.
7.5. 태합입지전 5
큰 비중은 없으나 우에스기 겐신 카드를 얻기위해선 플레이해야 할 인물. 우에스기 겐신 병사 이벤트를 볼 경우 후계자가 되고, 겐신의 주인공 카드를 얻게 된다. 이 방법외에 겐신의 카드를 얻는 방법은 시바타 가츠이에로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뿐이다.
[1] 현재의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일대.[2] 과거에는 사다미츠가 겐신의 명령을 받아 익사를 위장해 암살한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현재로는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있다.[3] 참고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씨는 후지와라 계통이고, 본디 겐신의 성씨인 나가오씨는 타이라 계통이다.[4] 무로마치 막부에서 관동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간토쿠보(関東公方)를 보좌하기 위한 집사직.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는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외가였기때문에 이후 대대로 당주가 관동관령을 맡았다.[5]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카와고에 야전에서 카게토라의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해 에치고로 도망친 사람이다.[6] 우에스기 겐신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를 계승한 이후의 우에스기를 나가오 우에스기라고 별칭하기도 한다.[7] 가키자키가는 선대 당주 카키자키 카게이에(柿崎景家)가 겐신에게 모반의혹을 사서 살해당했고, 기타조는 선대 기타조 타카히로(北条高広) 대부터 누차에 걸쳐 타케다, 호조가와 밀약을 맺고 모반을 일으킨 바 있다.[8] 혼조 시게나가가 이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서 간혹 카게토라 파였다고 잘못 아는 사람도 있다 [9] 선수를 쳐 거성인 가스가야마 성을 장악하고 성내에 그동안 모아둔 막대한 양의 황금을 적절하게 이용한게 컸다. 영지인 에치고에는 다케다의 가이와 마찬가지로 사도금광 등 금광이 많았다.[10] 그렇다고 다케다가 원군을 보내서 승부가 결정 난 것은 아니고, 그냥 카게카츠군과 카게토라군이 외부지원 없이 붙어서 카게토라가 패배한 것이었다.[11] 발음은 둘다 시바타에 이름도 비슷하지만 시바타 시게이에는 新発田씨고, 시바타 가츠이에는 柴田씨다.[12] 御館の乱. 겐신 사후 카게카츠와 카게토라간에 벌어진 후계자 계승다툼을 일컫는 용어이다.[13]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씨(扇ヶ谷上杉家)의 집사로 유명한 오타 도칸(太田道灌)의 증손자.[14] 이때 우에스기군이 워낙 거세게 저항해서 시바타 카츠이에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우에스기군과 싸우고 있었다.[15] 영지 전부를 몰수하는 일[16] 다른 가문의 경우 어쩔 수 없이 가신들을 정리해고하여 살 길을 도모했지만 우에스기가는 차마 가신들을 내버릴 수 없어 정리해고 없이 모두 받아들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백성들을 모두 이끌고 힘들게 도망치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17]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대폭의 감봉 및 전봉된 다이묘들 상당수는 영지를 이전하면서 기존의 가신들에게 매우 촉박한 기한을 급작스럽게 통보하여 이동을 명령하고 많은 가신들을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해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사쓰마의 시마즈, 죠슈의 모리 등은 전봉이 아니라 기존 영지의 3~4분의 1로 영지가 감봉되어 훨씬 적어진 고쿠다카로 기존의 가신단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게되었는데 그런 외양 웅번들은 에도막부 내내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점점 해당 지역들의 농업생산력이 높아지면서 19세기 무렵에는 번의 재정이 상당히 회복되기도 했다.[18] 추신구라에서 악역을 담당한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의 장남, 요시히사의 정실이 요네자와번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츠(上杉定勝)의 딸. 웃기게도 키라는 켄신이 멸망시킨 본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山内上杉家)의 방계 자손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츠나노리의 대에 이르러 다시 원래 우에스기가로 복원된 셈이 되어버렸다.[19] 에도 막부 2대 쇼군이었지만 공처가였던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아내가 무서워 숨겨둔 자식으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이 된다. 형 이에미츠에게 꽤나 중용되어 아이즈 번까지 받았다.[20] 생전이 아닌 사후에 들인 양자. 한국사로 치면 봉사손과도 비슷하다.[21]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규모가 큰 번들은 막부에 청원해서 막부로부터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리로 공식적인 대부금을 받는 경우 또한 있었다.[22] 본명은 우에스기 하루노리(上杉治憲). 요잔은 만년에 은거하면서 칭한 호. 본래 휴가 타카나베번 6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미츠(秋月種美)의 차남으로, 외할머니가 츠나노리의 딸이었기때문에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上杉重定)의 서양자가 되어 우에스기가를 계승했다.[23] 전술했듯이 본래 우에스기의 영지는 에치고였지만, 도요토미 시대에 아이즈로 전봉되었고, 세키가하라 패전 후에 감봉되면서 요네자와의 영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