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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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양근환(梁槿煥)
이명
양태환(梁泰煥), 양삼성(梁三成)
생몰
1894년 5월 9일 ~ 1950년 9월
출생지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사망지
경기도 파주시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대형 사고를 치다
2.3. 일본 유학
2.4. 민원식 암살 사건
2.5. 해방 후 행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양근환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 배천읍에서 양금성(梁金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일보 초대 여기자를 지낸 추계(秋溪) 최은희(崔恩喜, 1904~1984)는 양근환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회고를 남겼다.

[1]

는 노예를 해방하고 문서를 불질렀다. 데리고 내려간 일꾼은 농사를 떼어주어 그의 큰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자활하게 하였다. 둘째 아들은 장사 밑천을 주어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셋째 아들 양삼성(梁三成)은 공부를 시켰다.

추계 최은희 전집: 여성전진 70년-초대 여기자의 회고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양근환의 아버지는 본래 노비였다가 주인의 선처로 해방되었다. 또한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양근환의 본래 이름은 양삼성이었는데, 조선보병대를 다니던 중 일본인과 싸운 일을 계기로 아버지를 해방시켜준 최병규에게 "민족의식이 강한 놈"이라고 칭찬받고 근환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첫째형 양계환은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고, 둘째 형 양진환은 상업에 종사했다.
양근환은 최병규의 도움으로 동명학교에 입학했다. 동명학교는 1906년에 최병규가 세운 인문계 학교로, 일본어 교사를 초빙해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재정난에 시달려서 매번 폐교 위기를 지역 유지의 의연금을 받아가며 가까스로 모면했고, [2] 1911년 3월에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한 뒤 영명학교와 통폐합하여 동흥학교로 전환했다. 양근환은 동명학교의 마지막 졸업생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형 양진환이 1921년 3월 2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양근환은 동명학교와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갔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총독부관보>에 수록된 경성 공업전습소의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졸업생 명단에는 양근환 또는 양삼성의 이름이 없다.
반면 최은희는 "양삼성이는 동명학교를 졸업한 뒤 해주 양잠전습소로 공부를 보냈다"고 회고했다. 해주 양잠전습소, 곧 황해도 양잠전습소는 1912년 4월 1일에 개교하여 '은사금'으로 경영되는 기관으로서 전습기간은 매년 4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8개월 간이었다. 양근환은 1912년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그곳에서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대형 사고를 치다


양잠전습소를 졸업한 양근환은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는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 이후에 편성된 근위보병대의 후신이다. 일제는 1913년 3월 조선기병대를 폐지하고 조선보병대를 2개 중대 규모로 축소해 창덕궁의 경비와 의장대의 역할을 맡겼다. 조선보병대는 필요에 따라 모집으로 결원을 보충하는 '용병제'의 성격을 띠었다. 병사들은 모두 조선인으로서 일부 장기 재직자도 있었지만 대개 1년 정도 근무한 후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났다. 창덕궁의 경비와 호위 외에는 특별히 중요한 임무가 없었으므로 평상시에는 교련에 힘썼다.
양근환은 이 곳에 입대해 한동안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1915년 6월 30일 대형 사건을 터트렸다. <매일신보>는 그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30일 밤 아홉시쯤 되어 경성부 욱동 일등목 대구보변호수 사무소 앞에서 조선은행 앞 청목당 앞을 지나는 길거리 행인의 왕래가 복잡한 틈에 별안간 군복을 입은 병졸 한 명이 왕래하는 사람을 누구를 막론하고 함부로 창을 들어 찍고 때려 뜻밖에 부상한 자가 여섯 명이 났다. 그 날밤은 더욱이 더움을 피해 산보하러 나온 사람이 자못 많은 때문으로 사람이 산과 같이 모여 수라장이 되었다.

그 병졸은 조선보병대 제1중대 이등졸인 양삼성이란 자로, 그날 밤 각처에서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경성 욱동 일등목으로 조선은행 앞을 휘쓸고 나오며 길이 좁다고 휘두르면서 이로 말할 수 없는 흉포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 병졸은 차고 있던 창으로 좌충우돌을 했고 마침 지나가던 목수 일행이 잡아서 얼른 본영경찰사로 안치했다가 곧 헌병분대로 넘겼다. 부상자 윤삼강(21), 천천귀웅(41) 외 세명은 근처 소림병원에 보내어 치료중이라는데, 그 중 중상자는 윤삼강으로 눈두덩 깊이가 한치나 되게 상하였고 정수덕남(15)은 머리에 상처가 한치나 되게 상하였다더라.

<매일신보> 1915년 7월 2일자 기사

요약하자면 1915년 6월 30일 양근환이 조선은행 앞 거리에서 군복을 입고 만취한 상태에서 창을 휘둘러 지나가던 행인 6명을 다치게 했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친구는 1921년 3월 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가 조선보병대에 다닐 때에도 울분한 심회로 달 밝은 밤에 남산 공원에 앉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와서 길을 물을 때에 대답이 불손하자 일본인들이 "요보"하며 버르장머리 없이 대하고 꾸짖으니까 양군은 "무엇, 요바라는 무엇이냐"하고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싸움이 되었습니다. 원래 양군은 기골이 강장하므로 함부로 치니까 일본인들은 쫓기어 조선은행 앞까지 내려왔는데, 조선은행 앞에서는 일본 사람의 수효가 점점 늘어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므로 할 수 없이 칼을 뽑아 몇 사람을 상하게 해 경찰서에 체포된 일도 있었으나, 취중의 일이므로 50일 구류를 지낸 후에 석방된 일이 있었습니다.

최은희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보병들과 섞여 앉은 술좌석에서 조선 사람 한 명과 싸움이 붙어 주머니칼을 뽑아 가지고 서로 으르렁대다가 상대방이 먼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 일로 하옥된 삼성이의 구명운동을 아버님이 서둘러서 풀려 나오게 하였다 한다. 사연인즉 그 상대방이 일본을 추켜 세우고, 스스로 민족을 모욕하는 비굴한 언사를 쓰는 데 분개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해당 사건에 대한 설명이 제각기 다르므로 정확한 사건 경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가 취중에 조선은행 앞에서 창이나 칼을 휘둘러 행인 6명을 다치게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 양근환은 본정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조선군사령부로 넘겨져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가 최병규의 규명운동 덕분에 50일간 구류를 살다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찍혀버린 그는 곧 조선보병대를 그만둬야 했다.

2.3. 일본 유학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독립운동사: 의열투쟁사>에 따르면, 양근환은 3.1 운동에 참가했고 그해 9월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송상도가 집필한 <기려수필>에 의존한다. <기려수필>은 송상도가 애국지사들이 벌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한 2차 문헌으로, 그가 양근환에 대해 서술한 기록은 전적으로 양근환이 민원식을 암살한 이후 3월 2일 총독부의 보도금지가 해제되자마자 각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한 기사들을 바탕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신문 내용들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엇갈리는 부분도 많다.
먼저 일치하는 사실은, 양근환이 일본에 건너가 신문배달과 우유배달, 국수 장사와 인력거꾼 등을 하며 학비를 스스로 벌었다는 점, 일본 여성 석정승자(石井勝子)와 혼인해 두 딸을 낳았다는 점, 천도교 신자였다는 점 등이다. 반면 엇갈리는 부분은 양근환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점과 그가 재학했던 학교다. 동아일보는 5년 전에 건너갔다고 해 그가 1916년에 건너갔음을 암시했지만, 다른 신문들은 1915년 8월에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양근환이 다닌 학교에 대해, <매일신보>는 그가 와세다대학에 다녔다고 보도했으며, 그 외 신문들은 니혼대학에 다녔다고 보도했다.
이렇듯 엇갈리는 부분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양근환이 1919년 9월에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위 근거는 민원식 암살 사건에 관한 1심 공판 때 그가 "나는 대정 팔년(1919년) 9월에 고학을 할 목적으로 동경에 가서 당시 일본대학에 입학했다."고 진술한 데 있다. 하지만 당시의 보도 및 1927년 2월 사법성 작성 문서, 예심결정서 등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18년에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
양근환이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1921년 3월 2일자 <경성일보> 기사에 그가 일본에서 신문배달을 하던 중 "조선의 어떤 운동에 참가했다"는 것과 같은 날 <조선신문> 기사에 그가 "손병희 일파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에 있다. 이로 볼 때 그가 3.1 운동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조선이 아닌 일본 도쿄에서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예심결정서, 1심 공판 때 양근환이 "나는 니혼대학에 입학했다"고 한 진술, 1927년 2월 사법성 작성 문서 등에는 양근환이 일본대학에 재학하고 있다고 서술되었으므로, 그는 기존에 알려진 대로 와세다대학이 아니라 니혼대학에 재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순천(朴順天, 1898~1983)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양근환은 당시 도쿄 유학생이었던 그녀의 뒤를 여러번 밟았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하숙집까지 따라와 편지를 던지고 갔는데, 펴보니 ‘나는 상해서 온 독립군 테러단이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하숙집에 나타나 중국 옷을 한 벌 얻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구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2.4. 민원식 암살 사건


1921년 2월 16일, 양근환은 국민협회장 민원식을 암살했다. 민원식은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국민협회를 조직하고 <시사신문>을 발간하여 조선인 참정권(參政權)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자치론자였다. 그는 일본 의회의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조선에도 실시하여 조선인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일본 국민 가운데 하나이므로 일본 신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독부는 그런 그를 적극 후원했고 군수의 직책을 수여했다.
국가보훈처가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서 기술한 내용에 따르면, 양근환은 민원식과 같은 친일인사들이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민족적 치욕이며, 이런 자의 소행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장차 친일파가 더욱 창궐하여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민원식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비수를 품고 민원식이 체재한다는 도쿄역 호텔 제14호실로 찾아가 자신을 '이기령'이란 이름의 유학생이라고 밝히고 면담을 요청해 민원식과 쉽게 대면할 수 있었다.
양근환은 우선 민원식의 경계감을 풀기 위해 도쿄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고, 유학생동우회에서 환영회를 열고자 하니 왕림하여 고견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요즘 국내 사정이 어떠한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민원식이 국내는 현재 아주 평온하다고 답하자, 양근환은 지금 3천만 조선인 모두 궐기하여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터에 무슨 소리냐면서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이다.”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민원식은 독립운동자들을 모두 ‘불량 폭도’라고 매도하면서 오히려 반발했다. 이에 격분한 양근환이 언쟁을 벌이려 하자, 민원식은 벼루를 들어 그를 치려 했다. 그걸 본 양근환은 품었던 비수를 뽑아 민원식의 배를 깊숙이 찔렀고, 민원식은 앞으로 거꾸러지면서 즉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근환이 법원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민원식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민원식이 상해에 있는 우리 동포의 운동하고 있는 것을 폭도라고 하여서 나는 그 말에 분개하여 폭도라는 것은 무슨 일로 그 사람들을 폭도라고 하느냐 한 즉 민원식은 나에게 벼루집을 집어던져서 이에 격투가 되며 나는 비수로서 목을 찔렀는데, 처음부터 죽이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매일신보> 1921년 6월 9일자 기사

민원식을 경계할 목적으로 만일의 경우에 쓰려고 단도를 가지고 16일 오전 11시에 면회를 청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일본대학교 이기령이라고 변명한 뒤에 다시 면회를 얻어서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두세가지 의론으로서 서로 다투다가 뜻밖에 싸움이 되어서 과연 격투가 되었음으로 어찌되어 단도를 들었지만 정말로 죽이고자 하는 뜻은 없었다.

<조선일보> 1921년 6월 11일자 기사

즉, 양근환은 민원식이 자신을 어찌할 것을 염려해 단도를 소지했지만 정말로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예심조서를 제외한 취조와 재판의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었다. 이에 대해 검사 측은 예심조서를 절대적으로 신뢰해 양근환이 진술을 번복했다고 몰아붙였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기 때문에 민원식을 만날 때 주소와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단도를 가지고 간 것 자체가 의심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양근환이 처음부터 민원식을 죽이기 위해 계획을 짜서 단도를 구입한 뒤 신분을 속이며 그에게 접근해 살해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법정에서 진술한 대로 그의 '우매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즉흥적으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다가 홧김에 죽여버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민원식을 살해한 뒤에는 상하이로 도피하려다가 나가사키에서 체포되었고 예심을 거쳐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항소했지만 1922년 4월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이후 양근환은 일본의 여러 형무소를 전전하다가 1933년에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왔지만 국사범으로 낙인찍혀 일제 경찰들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그렇게 10여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했다.

2.5. 해방 후 행적


양근환은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가담했고 1945년 11월 청년 남성들을 모아 혁신탐정사(革新探偵社)를 설립했다. 그는 <자유신문> 1945년 11월 29일자 기사에 혁신탐정사를 설립한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8월 15일 이후 벌써 3삭여가 지났다. 현하 정치적 정세는 매우 혼돈하여 국민 대중이 바야흐로 희구하는 대동 단결 자주 독립 완성은 하시일에 도래할는지 참으로 막연하다. 나는 기간 정관(靜觀)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중이 절실히 바라는 민족 통일 전선과는 딴 방면으로 분열의 길로만 질주하고 있으니 이것은 누구의 소위(所爲)인가. 그들은 즉 친일파 민족 반역자 매국노 또는 경제 교란자들의 음흉한 술책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나는 본다.

3000만 동포에게 나는 엄숙히 선언한다. 민족 통일 전선을 방해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매국노 또는 경제교란자들은 각오하여라. 너희들에게는 민족의 존귀한 피로서 물들여주려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범주를 규정한다. 그러나 이 기준 밑에서 최후적 결정권은 우리 신 정부에 있지만 위선 잠정적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교란하는 사이비 민주주의자는 곧 처단하려 한다.

이후 양근환은 좌익 인사들에 대한 백색 테러를 감행했다. 특히 여운형을 암살한 김영철과 신동운은 양근환과 대화, 토론하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결의했으며, 양근환으로부터 99식 권총 한 자루를 받았다. 이 일로 미군정으로부터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은 그는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한편, 그는 송진우 암살 배후로도 의심받아 공판에 서기도 했으나 역시 무혐의로 풀려났다.
1946년 12월 3일, 경무국 수사국장이었던 최능진이 경무부장 조병옥의 비행을 폭로, 비판했다가 파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양근환은 조병옥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 경무부수사과장 최능진의 파면을 계기로 한 경무부 내의 내분 사건에 관련하여 혁신탐정사 양근환은 조 경무부장이 이번 사건의 전책임을 지고 사직하라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경찰 수뇌부로서 근신치 않는 태도에 분개하는 동시에 경고를 발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6년 12월 15일자 기사

이에 대해 조병옥은 혁신탐정사의 해산을 발표했다.

시내 수송동 46번지의 1호에 본거를 둔 혁신탐정사는 16일부로써 그 해산을 명하였다. 그 해산 명령은 그 기관 대표자인 양근환에게 전달하였다. 원래 사설탐정사는 군정청에서 승인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 혹은 집단을 불구하고 이러한 기관을 운영하는 사실이 발견되는 때에는 그 행위는 1945년 11월 13일부 군정청법령 제28호 제3조에 해당한 범죄다. 그러므로 그 사실은 즉시 경찰에 보고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18일자 기사

그는 이후에도 건국청년회를 조직해 반공운동을 전개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김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김구의 뜻을 따라 백색 테러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갔다가 7월 5일 조선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파주시에서 인민재판에 끌려가 사형 선고를 받고 9월 15일에 처형되었다. 향년 5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에 양근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최은희의 부친 최병규(崔秉奎).[2] 조선 총독부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동명학교는 1912년 5월 말 교사 2명, 학생은 재적 40명에 출석자는 불과 24명 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