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식(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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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6 ~ 1921)
민원식은 구한말 시기의 관료이자 언론인, 사상가이다. 호는 정암(正菴), 난곡(蘭谷), 한동(韓東), 양하(養何)이고, 본관은 여흥(麗興)이다.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을 강하게 주장했던 인물으로 보통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여겨 지지만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의 친정 조카사위이다. 영친왕의 외삼촌 엄준원의 사위이다.[2]
2. 생애
경기도 양평군 출신으로, 평안북도 선천으로 본적지를 옮겼으며, 일설에는 선천이 그의 고향이라는 설도 있다. 고아에 떠돌이로 알려졌지만 그의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모두 1910년대까지도 살아 있었다. 양아버지 쪽으로는 약간 멀긴 하지만 명성황후는 14촌 할머니 뻘이 된다. 어깨너머로 배운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일본어 교사와 중국어 교사에 추천되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민원식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매일신문 등에 밝힌 그의 이력에 의하면 그는 동학 농민 운동 때 가족을 잃고 민영억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 청국 상인에게 이끌려 청나라로 갔다가 경성에서 민원식은 청나라 상인 왕춘원을 알게 되고 그를 따라 선양에까지 가게 되지만 그곳에 도착한 지 1년 만에 왕춘원이 병사했고 11세가 됐을 때 귀국했다'라는 것이지만 앞서 서술했듯 그의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모두 1910년대까지 살아있었다.
1897년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지만 그는 중국의 지식이 실생활에 도움되는 것이 무엇이냐며 서당을 그만두었다. 이후 전국을 떠돌다 1899년에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본인들과 사귀었고 일본어를 익혔다. 한때는 일본 후쿠오카시에서 조선어와 만주어, 한문 과목을 맡아 교사로 지내기도 했다. 일본 체류 중 그에게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일본어 교사와 중국어 교사직이 추천되었지만 그는 답장을 거부하거나, 자신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1905년 3월 2일, 경무청 총순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고 한달 만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1년만에 사퇴하였다.
일본에서 지내던 도중 을사조약의 소식을 접하고 이후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그 뒤 그는 조선시대를 문벌의 구분과 신분제의 억압으로 인한 미개의 시대라 주장하며 실력양성운동을 고창하며 친일활동을 하였다.
영친왕의 관례를 마친 뒤 순헌황귀비를 황후로 책봉시킬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동물원에 놓고 관광객들에게 구경시키는 것에 충격받아, 조선인 남녀를 돈 주고 빼온 뒤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일본 체류 중 보건, 위생에 관련된 것을 입수하여 귀국 후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장, 광제원 병원장 등을 지냈다. 그는 조선 거리의 비위생적인 점을 문제점으로 제기, 방역과 소독 활동, 도로 포장 등의 활동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906년 8월에는 경성에서 보건, 위생을 홍보하는 "위생환등회"를 개최해 경성부의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고, 참석자들에게 구충제를 나눠주었다.
1907년 5월 그는 고종과 엄귀비의 밀명을 받고 국권 회복과 엄귀비의 황후책봉 승인 임무를 받아 일본에 궁내성 시찰관사무로 파견되었다.
1907년 5월에는 도쿄권업박람회의 인종 전시실에 갇힌 조선인 두 사람을 보고 이들을 돈을 주고 석방시켜 데려왔다. 당시 정덕규와 박씨가 일본인에게 유괴당해 동경으로 갔고 이 두 사람은 나이 삼십 미만으로 어리석었는데, 일본인들은 정씨는 상투를 틀어 올리고 망건으로 묶은 위에 큰 삿갓을 썼으며, 소매 넓은 도포를 입었다. 박씨는 쪽을 지고, 좁은 소매의자에 묵묵히 앉아 있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시키는 대로 묵묵히 앉아서 있었다. 다행히 민원식이 시찰차 갔다가 보고서 매우 안타깝게 여겨 몸값을 주고 데려왔다.
그는 한국인이 '짐승과 마찬가지로 공중의 관람에 제공된 것'을 보고, 일본 경무청 당국자들을 찾아가 항의하였다. 그는 일본 정부에 조선인은 동물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납치 관계자의 체포를 목격하고 귀국하였다. 민원식은 박람회를 가보고 큰 충격을 받아 다른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을 (풀려나게 한 뒤) 귀국시켰다. 그는 이 일로 충격을 받고 조선에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과 조선은 동문동종"이라 하면서 이런 부도덕한 행위를 꺼리지 않으니 이는 우리 조선민족을 모멸함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되어서 인류를 능욕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는 조선인이 되어 같은 조선인의 모욕을 눈감을수 없고 또한 인류가 되어 같은 인류가 다른 인류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을 보고 참고 넘어갈수 없어 불가불 그 죄상을 고하겠소."
- 민원식
귀국 이후 그는 조선인이 일본인들에게 짐승 취급을 받는 것은 개화가 되지 않은 점과 판단력 부재, 과거의 관습과 미신에 사로잡힌 것을 문제점으로 삼았고, 낮설다고 무조선 배격하지 말고 우리 실생활에 유익하다면 언제든지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노비와 백정의 자손들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7년 2월부터 서상돈, 김광제, 윤웅렬 등에 의해 일본에 빌린 국채 보상 운동이 추진되었다. 관직을 사퇴한 뒤로는 통감부의 지원 하에 친일 언론인,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해 7월 고종이 강제로 양위하자 양위 반대 상소를 올렸지만 묵살당했다. 이후 그는 대한실업협회 등의 친일 단체에 참여했다. 또 언론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정치의 부패와 사회변화를 알기 위해 가정에서 신문을 구매해서 보자고 주장하였다.
1910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후에 그는 "나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말했는데 한국의 독립의 능력이 없으면, 병합도 역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경술국치 직후부터 이규완 등과 함께 조선인 참정권 허용론과 자치권 허용을 주장, 조선인도 일본 제국의회 의원을 선출, 투표할 권리를 요구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조선인의 참정권, 투표권, 자치권을 허용해줄 것을 여러 차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정부에 건의하였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1911년 양지군수가 되고 1913년 양지군수에 유임, 1914년 경기도 이천군수, 1915년 7월 고양군수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에 반대하고 무력 시위를 한다고 바로 독립되지는 않는다며 매일신보에 비판적 논조의 칼럼을 실었다. 1919년 11월 고양군수직을 사퇴하고 중추원 부찬의로 전직하였다. 고양군수를 사퇴한 11월부터 12월 일본의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며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1919년 8월과 1920년 1월 조선인 참정권을 요청하는 연명 탄원서인 건백서를 일본 정부와 하원 중의원에 보냈다.[3]
1920년에는 국민협회를 조직하여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2.1. 최후
1921년 2월, 민원식은 일본 중의원 의원들과 일본 제국의회 의원들, 지식인들에게 조선인에게도 참정권과 투표권,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에 협력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2월 15일에 양근환은 시중에서 칼을 샀고, 다음 날 오전, 양근환은 도쿄역 호텔 2층 제14호실에서 자신을 '이기영'이라고 소개하며, 동우회에서 환영회를 여는데 참석 의사를 묻고 면담을 요청하였다. 2월 16일 오전 9시 30분 양근환이 민원식을 방문했고 대화 도중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것은 매국노짓"이라면서 논쟁을 벌이다가 민원식은 양근환에게 칼을 맞았다.
이후 소리를 듣고 달려온 호텔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고, 그는 도쿄제국대학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그는 복부와 이마를 여러방 찔려 중상인 상황이었다. 일왕은 특지로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충량하였던 그를 정5위 훈4등에 서하고 중추원 찬의를 수여하였다.
2월 17일 오전 도쿄제국대학 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 2월 18일 그의 피습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부인과 장인이 그의 시신을 확인하고 다음날 2월 19일 귀국했다.
2.2. 사후
그를 찌른 양근환은 피습 후 상해로 탈출하려다가 나가사키 항에서 나가사키 경찰에 체포되었다. 5월 4일에 1차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학우회의 간부들과 방정환 등도 연행되었다. 그해 8월 2일 동경지방법원 최종 공판에서 양근환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한편 민원식의 시신은 2월 21일 경성부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중의원에서는 민원식이 암살된 것에 충격을 받았고 만장일치로 그의 청원을 채택하여 조선 사회에서 잠시 이목을 끌었지만 애초에 일본은 조선에 참정권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사실상 무산되었다. 일본 정부는 민원식이 중상을 입자 훈4등의 훈장을 서훈하고 중추원#s-4 찬의에 임명하였으며, 사망한 뒤에는 전국적으로 추도회를 열고 묘지는 총독부와 사회단체의 성금으로 마련되었다. 또한 순종은 어사를 도쿄로 보내 그의 빈소를 위문하고, 사망 소식을 접하자 순종은 다시 어사를 파견하여 향화료를 내렸다. 한편 사이토 마코토 총독, 미즈노 정무총감 등이 화환을 보내왔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민원식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죽었다라며 추도했다. 또 그는 민원식의 무덤이 초라하다고 하여 돈을 대주어 보수했다. 이후에도 매년 민원식의 사망일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부 조선인 지식인들에 의해 추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의 죽음으로 그가 운영하던 "시사신문"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명칭을 고치고 "시사평론"으로 이름을 바꿨다. 1921년 9월에는 전 국민협회 간사 정필화가 행방불명돼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운영하던 국민협회는 임시로 김명준의 회장대행체제로 갔다가 김명준이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동이 민원식 개인에 의존해 왔던 국민협회는 곧바로 자금 부족과 활동의 정체 문제에 직면했다. 이후 국민협회의 참정권 운동은 빛을 잃다가 1940년 이후 다시 조선인 참정권 운동이 나타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윤치호는 "도쿄와 조선의 일본인들이 모두 민원식의 죽음에 대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그를 주의(主義)의 순절사(殉節士)라고 치켜세우면서 영웅시한다"고 지적하였다. 윤치호는 민원식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소하였다. 윤치호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자기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민원식이 주의의 순절사로서 추도되고 영웅시되어야 한다면, 최근 2년 동안 자신들이 주의라고 여기는 것에 모든 걸 - 상당수는 자기 목숨까지 내 걸었던 수백 명의 용감한 3.1 운동 소년 소녀들이야말로 민원식보다 더 고결하지 않은가?"라고 하며 비판했다.
2.3. 영향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원식의 의견을 일단 접수하면서도 묵살했다.
그러나 1936년부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조선인 자원 입대자들이 늘어나자, 결국 조선총독부도 조선인 참정권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1940년부터는 일본 본국 정부에 조선인 참정권 허용, 자치권 허용을 건의하였다.
결국 1945년 2월에 가서야 일본 상원인 귀족원에 조선인 의원들이 당선되었다.[4] 하지만 이 떄는 이미 패전이 확정된 상황이라 별 의미는 없었다.
3. 저서
- 自序 : 민원식 자서전
- 조선통치문제 (朝鮮統治問題) (1920년)
4. 평가
독립운동가이자 양근환은 그를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것은 매국노짓"이라 평가했다. 독립운동가 겸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3.1 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열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하는 자는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적이 아니냐"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독립운동가 김규면은 그의 행동을 어리석고 비루한 행동들의 하나로 규정하면서도 그의 활동을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보기도 했다.
윤치호는 "민원식을 한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하지도 않고, 그의 정치 노선에 공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죽어야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조선이 독립을 팔아넘기자는 게 아니라, 현 상황에서 최상의 이익을 얻자는 것이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또 "설령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끝나야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조선의 역사, 특히 지난 500년 간의 역사가 당파간의 상호 살육이라는 치욕스러운 기록의 연속이었다는 점이 서글프기만 하다.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제거하라!' 이것이 조선 정치가들의 좌우명이었다. 오늘날 조선 청년들이 정치 선배들의 악습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라며 양근환과 양근환을 영웅시하는 시각을 비판하였다.
백남운은 1927년에 쓴 "조선 자치운동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에서 민원식의 자치론을 비판하였다.
5. 이야깃거리
민원식은 국민협회를 결성하고 이익을 얻지 못했다.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대다수여서 호응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재산을 사재를 털어서 활동했다.
한편 그의 참정권 청원운동이 일본인 또는 조선총독부측의 사주를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 鶴吉)의 조종 아래 참정권 청원운동을 전개했다'는 의혹도 있다.
[1] 일반적으로는 1886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아 1887년생 설, 1885년생 설 등이 있다.[2] 엄준원은 원래 엄진일의 아들들 중 한명인데, 아버지 엄진일의 동생인 삼촌 엄진삼이 아들이 없어 삼촌 엄진삼의 양자로 입양했다. 사촌여동생인 엄귀비의 오빠가 되었다.[3] 이 영향으로 그가 암살당하고 1년 뒤인 1922년 2월에도 조선인 참정권을 요청하는 지식인들의 탄원서가 일본 하원과 상원, 내각에 보내졌다.[4] 물론 이전에도 1939년 박영효가 일본 천황이 추천하는 천황 몫의 귀족원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사례는 있다. 1942년에는 박중양이 귀족원 의원에 추천되었으나, 박중양은 처음에는 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