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뢰 스캔들

 

1. 개요
2. 스캔들의 주인공- Mark.14 어뢰
3. 발생한 문제점들
3.1. 적정수심보다 더 깊게 항주해버렸다.
3.2. 자기기폭장치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3.3. 기폭장치의 격침이 구형 어뢰의 충돌 기준이라 불발이 발생했다.
3.4. 어뢰발사관에서 제대로 사출이 안 된다.
3.5. 항주가 불안정하거나 원주 운동을 해 버린다.
4. 해결을 위한 노력
4.1. 평가
5.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
6. 외부링크


1. 개요


'''Torpedo Scandal'''

어뢰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어뢰를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1]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에서 운용하던 Mk.14 어뢰의 결함으로 인해 벌어진 각종 논란을 일컫는다.

2. 스캔들의 주인공- Mark.14 어뢰


태평양 전쟁 초창기, 가토급 잠수함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 대부분이 사용한 Mk.14 어뢰는 중량 1,490 kg에 토펙스(Torpex) 작약 292 kg이 충전되었고 길이 6.2 m, 최대사거리는 31노트, 항주시 사거리 8,100 m에 최고속도 46노트인 에탄올 추진식 어뢰였다. 이 어뢰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미 해군이 잔뜩 기대하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가 발견되어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개량된 뒤에는 일본제국의 선박에 큰 손실을 입힌 무기가 되었다.

3. 발생한 문제점들



3.1. 적정수심보다 더 깊게 항주해버렸다.


[image]
연습 표적함을 명중하지 못하고 배 밑을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Mark.14 어뢰 - 1926년 촬영
원인은 황당하게도 테스트에서 제대로 된 탄두를 사용하거나 실 탄두와 무게가 흡사한 무게추 등을 넣고 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탄두에 물만 채워 넣고 테스트한 후 그 결과 그대로 양산에 돌입했다는 것.''' 이유는 예산 절약. 당시 미 해군이 어뢰에 쓰던 Torpex 폭약은 물보다 1.6배 정도 무거웠으므로, 탄두에 물만 채우면, 폭약을 채웠을 때보다 훨씬 가볍다.
그렇게 가벼운 탄두로 '적절한 항주수심'을 맞추어 어뢰를 양산하자 실제 전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폭약을 채운 무거운 탄두로 발사해보니 적절한 항주수심보다 깊이 들어가서 배 밑바닥을 지나쳐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항주수심 조종 계통도 문제가 있어 어뢰의 항주수심이 너무 얕다고 인식해 더 깊은 수심으로 항주할 수 있도록 반응하는 문제로 Mark.14 어뢰가 고속항주를 할 때 이 현상이 더 심화하였다.

3.2. 자기기폭장치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image]
문제의 Mark.6 자기기폭장치(Mark.6 Magnetic Exploder).
Mark.6 자기기폭장치는 군함에서 발생되는 자기장에 반응하여 전파량이 증가했다가 감소되는 순간을 노려 기폭하는 기술이 들어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비였다. '''이론상'''으로는 용골을 지나치는 순간 터져 단 한방에 적함을 두 동강 내버리리라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터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터지지 않거나, 미리 터지거나, 뒤늦게 터지는 상황이 다발하였다. 함선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장이 발생하며, '''특히 적도 부근에서는 함선의 항진 방향으로 자기장이 쏠린다.''' 자기기폭장치를 사용하려면 당연히 이 점을 반영해야 했지만, 이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몰랐기 때문에 어뢰 설계시에 반영하지 못하였다.

3.3. 기폭장치의 격침이 구형 어뢰의 충돌 기준이라 불발이 발생했다.


Mark.14 어뢰의 기폭장치에 쓴 격침(擊針)[2]이 Mark.10 어뢰의 충돌 기준이라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심해 충돌해도 잘 격발되지 않았다.

3.4. 어뢰발사관에서 제대로 사출이 안 된다.


추진력이 부족하여 발사해도 어뢰발사관에서 나오다가 마는 사례도 있었다. 어뢰발사관이 어뢰를 사출할 만한 기압을 뿜어내어 어뢰를 밀어내고 항주해야 했지만, 어뢰가 불량이라 발사 도중 어뢰발사관 입구에서 멈춰 걸려 버리는 문제가 생긴 것.
아래는 그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 중 가장 유명한 예.
로렌스 다스핏(Laurence Randall Daspit)[3] 소령이 지휘하는 가토급 72번함 SS-283 티노사(Tinosa)는 자신의 4번째 순찰 임무 중이었던 1943년 10월 26일, 일본군 13선단을 포착해 4, 5, 6번 어뢰발사관에서 어뢰를 발사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일본 구축함에게 발각되어 긴급잠함하던 도중 '''전방 어뢰실에서 5번 어뢰 발사관이 폐쇄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결국 티노사는 고생 끝에 일본 대잠망을 피해 겨우겨우 부상할 수 있었다. 장교 2명이 수면으로 다이빙하여 직접 눈으로 검사한 결과, 해당 어뢰발사관에서 발사된 어뢰가 발사되다 만 채 걸려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티노사의 승조원들은 일본군이 우글거리는 해상에서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수중으로 들어가 기폭장치를 무력화한 후 어뢰를 밖으로 사출하여 겨우 겨우 모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겼다고 추정된다. 당시 잠수함 어뢰발사관은 압축공기를 이용해 수압으로 어뢰를 밀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와중에 펌프 고장이나 압축밸브 조작미스 등 이유로 수압이 부족해 어뢰를 차마 다 못 사출해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수압이 가해지면 엄빌리컬 케이블이 끊어지고 어뢰의 스크류 모터가 움직여 항주하는데, 역시 모종의 이유로 끊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모터의 고장이나 결함 등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수압이 낮아도 어뢰발사관 내에서 어뢰가 절반만이라도 추친되면 엄빌리컬 케이블(Umbilical Cable)이 끊어지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어뢰를 다시 사출할 당시에도 펌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어뢰를 밀어냈으나, 엄빌리컬 케이블이 확실히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어뢰는 모터가 작동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해저로 가라앉았다. 이런 문제는 다른 잠수함에서도 일어났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단순히 어뢰의 관리 문제였는지 진짜로 Mark.14 어뢰 모터 결함이었는지는 애매하고 다른 어뢰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Mark.14 어뢰의 악명만 더 높였다. '''잠수함 승조원들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기에 더 임팩트가 컸다.

3.5. 항주가 불안정하거나 원주 운동을 해 버린다.


자이로스코프 및 러더의 결함 때문에 어뢰가 예정된 경로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항주하거나, 설령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하더라도 항주가 불안정했고, 심지어는 발사하자마자 원을 그리며 돌아오는 원주 운동 현상이 발생했다. 이 원주 운동 현상은 실제 사격 동안 29건이 발생하여 보고서에 기록된 문제였고 일부 잠수함은 2, 3회 연속으로 원주 운동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Mark.14이 22건, Mark.23이 3건, Mark.18이 3건, 구형 Mark.9이 1건으로 원주 운동 발생 횟수로는 Mark.14가 압도적으로 많았다.Circular Running Torpedoes Reported by U. S. Submarines During World War II 심지어 원주 운동 때문에 '''어뢰를 쏜 잠수함이 자기 어뢰에 맞는(!)''' 초대형 사고가 '''두 번'''씩이나 터졌는데, 가토급 잠수함 74번함 SS-284 툴리비와 사르고급 잠수함의 네임쉽인 SS-188 사르고(Sargo)[4]가 이 황당한 사고의 주인공이었다.[5]
[image]
가토급 잠수함 73번함 SS-284 툴리비(Tullibee), 메어아일랜드 해군 조선소에서 취역식을 치르었다. '''이때까지는 이 잠수함이 어뢰 결함으로 인해 침몰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 '''1943년 2월 15일 촬영'''
툴리비는 1944년 3월 26일, 4번째 초계항해 중 팔라우 섬 인근 해역에서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고 끈질긴 추격 끝에 3천7백 미터까지 접근하는 데에 성공, Mark.14 어뢰를 발사했다. 하지만 약 2분 뒤, '''어뢰는 원을 그리면서 자신을 발사한 잠수함 툴리비에게 되돌아와 맞췄고''', 결국 툴리비는 '''자기가 쏜 어뢰에 자기가 피격'''되어 침몰했다. 생존자는 단 1명.[6]

4. 해결을 위한 노력


Mark.14 어뢰의 한심한 성능은 진주만 공습으로 수상함대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이후 태평양에 제대로 남은 전력이 잠수함대밖에 없었던 미 해군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심지어 어떤 잠수함은 적 함대에 겨우겨우 파고들어 어뢰 6발을 발사했지만 모두 불발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미 해군 잠수함들은 구형인 Mark.10 어뢰를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7]
사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알려지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병기국에서 부정하고, 개개인의 관리문제로 치부해버린 것도 있었으며 그 동안 미 해군 잠수함장들은 '''"무능한 패배자의 변명거리나 될 것 같다"'''며 참았지만 그 불만이 어딜 가겠는가. 결국 잠수함장과 일선 잠수함 전대장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일부 잠수함장들은 병기국까지 찾아가 쌍욕을 퍼부으며 연구원들과 몸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이 와중,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해군소장 찰스 록우드[8] 제독이 임명되자 어뢰의 성능이 이상하다고 록우드 제독이 직접 정식으로 공론화하였다.
록우드 제독은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일선 잠수함 승조원들이 어뢰 때문에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잠수함들의 항해일지를 전부 뒤져 어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했는데 '''앞에 서술된 대로 가히 충격과 공포 수준이었다.''' 심지어 일부 잠수함 승조원들은 이 어뢰의 추진연료인 에탄올을 빼내 '''밀주'''[9]로 만들어 마시는 등, 안 그래도 나쁜 어뢰의 성능과 신뢰감은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록우드 제독은 참지 못하고 어뢰의 오작동을 두고 미 해군 병기개발국에 항의하며 정식 테스트를 요구하고, 1942년 6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직접 실탄사격 테스트까지 하며''' 그 자료를 바탕으로 성능 재검증을 요구했다. 하지만 개발국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서 그걸 개발했는데, 불발일 리가 없다. 너희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제대로 사용 못하는 것이다"''' 하면서 배째라로 나갔다. 어뢰 성능의 재검증에 대해서 개발국은 '''"정확한 수심대로 항주한다는 뻔한 결과를 보자고 발당 1만 달러나 되는 어뢰를 낭비할 수 없다"''' 반응하기도 했다. 이런 반응은 사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 것이, 당장 전쟁 중이어서 돈 한푼이 아쉬운 상황인 데다가 어뢰라는 무기체계는 당시에도 최첨단 기술이었으므로 발당 가격이 괴악하게 비쌌다. 하지만 개발기간 근 15년 동안 실탄두 장착 사격 테스트를 '''단 1회도 안하고'''' 결함을 발견하지 않은 채 실전에 배치함은 빼도 박도 못할 까일 거리가 맞다.
바로 이때, 미 해군 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해군대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갑자기 개입하자 상황이 급변해 버렸다. 킹 제독은 록우드 제독의 편지 사본을 읽어본 후 '''실탄두를 장착하고 테스트를 진행하라'''고 병기국에 명령을 내렸다. 해군참모총장 겸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으니 결국 병기국은 실탄두를 장착한 뒤 사격 실험을 진행했고, '''록우드 제독의 실험결과와 유사하게 어뢰가 기존 수심보다 깊이 내려간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이후 Mark.6 기폭장치의 문제에 대해서 록우드 제독은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10]의 동의하에 기폭장치 사용을 금지하고 접촉신관만 사용하도록 지시했으나, '''병기국과 개발 담당자였던 랄프 왈도 크리스티(Ralph Waldo Christie) 제독이 태클을 걸어왔다.'''
결국 폭발한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전폭적 지원과 동의 아래 워싱턴 D.C의 해군본부에서 병기국 인원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만일 병기국에서 어뢰를 똑바로 안 만들 것 같으면 우리 잠수함대는 함선국에 요청해서 어뢰 대신 함선을 잡아 끌어당겨 구멍을 낼 갈고리 장대를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If the Bureau of Ordnance can’t provide us with torpedoes that will hit and explode… then get the Bureau of Ships to design a boat hook with which we can rip the plates off a target’s sides.”)[11]

라는 돌직구를 날리며 어뢰 성능을 개선하라고 촉구하고, 병기국 인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어뢰 결함문제를 공론화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어뢰 개발에 관련된 인사들이 물갈이되고 어뢰 개선과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당장 그 상황의 공백을 메꿀 필요도 있었기에 아래와 같은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항주수심 오작동 문제는 록우드 제독이 테스트하여 수심조절 다이얼에 나오는 것보다 약 3.3-3.4m 이상 깊게 항주한다는 결과가 나왔기에, 이후부터는 항주수심을 약 3 m 이상 얕게 임의로 설정해 어뢰를 발사하도록 조치가 시행되고 고치기 위한 키트가 배포되었다. 문제가 된 항주수심 조종 계통도 후에 개량되었다.
자기기폭장치는 잠수함장들과 지휘관들의 재량하에 사용을 금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뢰가 충돌해도 격발되지 않는 문제가 터졌다. 해군 병기국은 "결국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미숙하게 사용한 것이다." 반응하며 반격에 나섰다.
록우드 제독이 하와이의 해안 절벽에 대고 어뢰 3발을 쏘아 불발 어뢰 1발을 회수해 조사한 결과,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심해 불발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격침을 훨씬 가벼운 것으로 개량한 것만으로 불발률이 확 떨어진 것이다. 문제의 격침은 진주만 공습 때 격추됐던 일본군 항공기에서 회수한 프로펠러를 재사용한 알루미늄 합금을 썼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Mark.14 어뢰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수정하고 나서야 잠수함대는 이 어뢰를 두고 '''이제야 좀 쓸 만하다'''는 평을 내렸다.
하지만 상기된 자이로스코프의 오작동 문제로 툴리비가 침몰하는 사고가 터진 적이 있었다. 병기국에서부터 제7함대 잠수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된 랄프 크리스티 소장은 '''Mark.6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휘하 잠수함장들에게 강요'''했으며, 자신의 계급과 짬을 이용해서 Mark.6 자기기폭장치에 불만을 표시하는 잠수함장들이나 지휘관들에게 인사적 불이익을 주거나 본토나 지상근무 등의 한직으로 내쫒는 '''보복성 인사 조치'''까지 자행하고 있었다! 자기기폭장치 사용을 금지한 록우드 제독의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와 사용을 강요하는 크리스티 제독의 제7함대 잠수함대 사이에서 잠수함장들은 심하게 곤욕을 치르었다.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 이전에도 각 함선마다 알아서 자기기폭장치를 해제했지만, 크리스티 제독 휘하 제 7함대 잠수함대 소속 함장들은 항구 입항 때나 기폭장치를 활성화하고 '''출항하자마자 해상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대처했다.'''[12]
당시 Mark.6 자기기폭장치 개발 총책임자 랄프 크리스티 제독은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을 듣고 뚜껑이 열려, 병기국과 함께 니미츠 제독에게 "자기기폭장치 사용 금지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고 싶다." 하고 항의했다. 니미츠 제독은

"그것은 아무래도 이 대응책을 준비했거나, 특이조건 하에 기폭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거나, 요구되는 발사 조건이 비현실적인 것 때문으로 추정됨."

이라고 답변했다. 약간 의역하면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니가 만든 게 불량이니까 안 쓰겠다.''' 니미츠 제독은 당시 록우드 제독을 상당히 신뢰한 데다 자신도 잠수함 근무를 해본 짬밥이 있었고[13], 당시에는 자기기폭장치 결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힐 방도는 없었으나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 답변으로 니미츠 제독은 크리스티 제독을 쌩깐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티 제독은 병기국과 함께 호주의 프레멘틀(Fremantle)에서 토론회를 열어 자기기폭장치를 꼭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결론 내리고 그 결과를 록우드 제독에게 서신으로 보냈다.

"일단 Mark.6 자기기폭장치는 '''최소한 가끔씩'''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흘수선 깊이가 낮은 소형 선박에 대한 공격방법은 자기기폭장치 활성화가 해답인데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물건을 포기하면 앞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영영 상실할 것임.''' 자기기폭장치가 문제가 있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태평양 잠수함대, 제7함대와 해군 병기국이 공동으로 조사해야 하며 '''최소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바임."'''

이 서신에는 약 1년 전, Mark.14 어뢰의 문제점에 대해 매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개선요구를 묵살하던 때랑은 완전 딴판인, 당혹감과 절박감까지 느껴지는 어투가 줄줄 묻어나왔으나 록우드 제독은 쌩까버렸다.
사실 크리스티 제독의 말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자기기폭장치 결함의 원인이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흘수선이 낮은 소형선박을 공격할 방법으로 상당히 주목받은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꼭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격 시험을 해야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개발국과 7함대의 이런 갈등은 어쩌면, 이 시점까지도 위도에 따라 센서가 다른 값을 출력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어뢰가 병기개발국 시험장 바다에서는 잘 동작하고 남태평양에서는 막장이어서 생겼을지도 모른다.[14]

이미 병기국과 자기기폭장치를 신뢰할 수 없었고, 장치를 사용하여 생긴 결과와 피해를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이 서신은 무시되었다. 크리스티 제독은 "자기기폭장치를 반대하면 곧 어뢰를 반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어뢰를 써서 전과 자랑을 하고 돌아댕긴 놈이 누구냐?" 하며 격분했다.
크리스티 제독이 이렇게 막 나가는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해군본부 병기국이라는 막강한 빽을 등에 업고 앞뒤 재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해도 억제할 방법이 마땅찮아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군 잠수함장들은 그저 '''눈치껏''' 알아서 대응하는 실정이었다.
카펜더 제독의 후임으로 임명된 제7함대 사령관인 토마스 킨케이드 제독[15]이 이 상황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킨케이드 제독의 명령으로 Mark.6 자기기폭장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여 미 해군 잠수함대는 겨우 그 장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1. 평가


이 속칭 '''어뢰 스캔들'''은 미 해군 병기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되었고, HVAR 항공 로켓탄 등의 명작 무기체계를 만들어낸 병기국의 성과에 심각한 흑역사로 남았다. Mark.6 자기기폭장치 개발 총책임자 크리스티 제독은 1944년 11월, 제7함대 잠수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당하고 본토로 전출되고 말았다. 그래도 어뢰 스캔이 일단락된 후 한동안 유임되었는데, 그럭저럭 지내다 지휘체계를 위반한 월권행위를 몇 번 일으켰다가 상관 킨케이드 제독에게 들켜 해임되었다고한다.[16] 그 후 미 본토 워싱턴주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장으로 지내다 종전을 맞았다. 전후엔 그 악평에도 불구하고 중장까지 진급하고 1949년 8월 1일에 필리핀 주둔 해군사령관을 마지막으로 퇴역, 1987년 12월 19일에 94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관과 항주장치를 두고 지휘부끼리 옥신각신하던 것과는 별개로 어뢰는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 작약은 함선용 어뢰인 21" (53.3cm) Mark 15 Mod 3부터는 탄두에 HBX 373 kg이 들어가 파괴력에서 93식1형과 비슷해졌다. 과산화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잠수함용 어뢰인 21" (53.3cm) Mark 16은 Mod 0은 TPX 572 kg이 들어간 탄두를 장착하고 46노트로 6,400 m를 항주 가능했으며, Mod 1는 HBX 435 kg이 들어간 탄두를 장착하고 46노트로 10,500 m를 항주 가능했다.[17]
사정거리는 여전히 산소어뢰에 밀리긴 했지만, 산소어뢰는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좌우항주오차가 심하게 나서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져서 일본 해군도 좀처럼 최대 사거리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카달로그 스펙의 차이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18] 물론 산소어뢰의 탄두 크기에서 오는 위력의 우위가 사라지진 않았다. 미국 수상함대의 주력 어뢰인 Mk.15에는 HBX가 373 kg이 들어가므로 위력계수 1.3을 곱하면 TNT 484.9 kg에 해당하며 93식1형이 작약 490 kg이 들어가므로 비슷하지만 3형에서는 780 kg으로 늘어나서 위력에서는 93식이 여전히 우위였다. Mk.17은 배치시점도 너무 늦었고(1945년) 실전투입이 되지 않았다.
전기추진방식의 Mark.18 어뢰 배치와 기존 어뢰의 개량 이후에도 어뢰에 대한 불신은 있었다. 이 불신은 전혀 근거가 없질 않아서 위에서 언급된 툴리비의 자침과 같은 어이없는 사고가 Mark.18에서도 일어났다. 피해자는 '''발라오급, 아니 미 해군 잠수함 최고의 에이스이자 격침톤수 1위'''였던 SS-306 탱. 기술적으로는 1943년 9월 즈음에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일선에서 툴리비나 탱의 경우처럼 어뢰로 인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일반 공산품도 마찬가지지만 무기체계의 경우 사용자의 목숨과 직결된 터라 한 번 불신이 쌓인 무기체계는 일선에서 사용을 기피하게 되고, 해당 체계의 개선이 이뤄져도 일선에서 사용을 기피해대니 개선 성과 입증에 긴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입증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나마 어뢰의 경우 잠수함의 주력 대함 무기체계였기 때문에 개선 성과를 입증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전과를 올렸다. 그 예중 하나로 1944년 6월에 있었던 필리핀해 해전에서 다이호쇼카쿠가 미 해군 잠수함의 어뢰에 피격되었고 그로 인해 침몰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2차 대전 초기, 미군만이 아니라 당시 호밍어뢰 등 다양한 방식을 시험하던 독일 해군도 미 해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다.

5.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


미 잠수함대의 중어뢰가 신뢰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때, 미 해군 항공대의 Mark.13 항공어뢰[19]도 낮은 신뢰성과 까다로운 사용 조건 때문에 일선에서 외면받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뇌격기 부대들이 전과는 하나도 거두지 못하고 몇 대가 겨우 살아온 것 이외에 몽땅 전멸해버린 데엔 이 항공어뢰가 한 몫 단단히 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항공어뢰 투하조건은 고도 '''15 m'''에 200 km/h였는데, 이미 방공태세를 갖춘 적 앞에서 이런 저공저속비행은 '나 잡아잡주슈'하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실제로 어뢰 투하를 준비하던 뇌격기들은 빠른 기동력을 지닌 제로센을 위시한 일본군 전투기들에게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적의 요격을 피해서 어뢰를 투하해도 어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뢰가 공중에서 투하된 후 입수 시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항주장치나 격발장치가 먹통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위의 가혹한 투하 조건 역시 이러한 신뢰성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뇌격기 조종사들은 역시 "효과도 없는 어뢰 쓰느니 그냥 철갑탄 쓰겠다."해서 한동안 함선을 상대로 폭격을 해댔는데, 물론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전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부의 월권 행위라는 외부 사정에 휘둘렸던 잠수함대의 중어뢰와 달리 항공어뢰의 개량에는 이런 방해가 없었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와의 협조하에 입수시의 충격으로부터 어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였다는 점이다.
덕분에 항공어뢰는 눈부신 성능 향상을 보여주었다. 1943년 초에는 투하 고도가 60 m로 완화되었다. 1943년 말에는 어뢰에 핀 스태빌라이저(fin stabilizer)[20]가 추가되었고 1944년에 이르면 nose drag rings과 둥근 팔찌 모양처럼 생긴 tail shroud ring이 장착되어 뇌격기에서 어뢰가 투하되어 물속으로 입수하기 전에 낙하 속도를 늦추어 적정 속도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1944년에는 고도 약 240 m에 약 550 km/h로 투하 조건이 완화되었다.
1945년초엔 고도 1,500 ~ 2,100 m에서 떨어뜨린 어뢰도 6발 중 5발이 정상 작동함을 확인했으며, 종전 즈음엔 '''고도 730 m에 759 km/h'''로 투하조건이 완화되었다.[21] 실제로 전쟁 후반 미군 뇌격기들의 어뢰 투하고도는 높았고 그 속도도 빨랐다. 1944년,45년 당시 미군의 항공뇌격을 당했던 일본 해군 승조원들은 처음에는 미군 뇌격기들이 어뢰를 너무 급하게 투하하고 달아난다며 의아해하거나 비웃었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항공 어뢰가 정상적으로 작동해 돌진해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인 미군 항공대가 갖고 있던 기존의 허당 이미지를 깨부수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뢰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던 잠수함대와 달리 뇌격기들은 폭탄을 이용한 수평폭격이나 활강폭격, 해군항공대 전체로 보면 급강하폭격이라는 추가 선택지가 있었다.[22][23] 항공기를 이용한 뇌격의 효과와 생존성에 대해 불신이 잔뜩 쌓인 전쟁 초중반 미 해군 항공대에게 다른 선택지를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쟁 중반까지는 전투력이 살아 있는 목표물에 대한 항공뇌격은 사실상 없었고, 선행 공격에 의해 절름발이가 된 표적을 상대로 한 것이 전과의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항공어뢰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씻어낸 것은 필리핀 해 해전 이후였다.

6. 외부링크


The great torpedo scandal, 1941-43

[1] 즉 어뢰 문제는 미국 대통령인 루스벨트 역시 알았다는 것이다.[2] 탄환의 뇌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송곳 모양의 총포(銃砲)의 한 부분. 군필자에게 익숙한 단어인 '공이'가 격침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3] 1905-1979. 최종 계급은 해군 소장.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여 훈공장{Legion of Merit)를 수여받았다. 1979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출처[4] 사르고는 침몰은 면했다.[5] 사실 Mark.14 어뢰 말고도 Mark.18 어뢰 역시 똑같은 사고를 내 미 해군 잠수함들 중 탑 에이스였던 발라오급 잠수함 탱(Tang)이 침몰하는 사고도 있었다.[6] 이 유일한 생존자는 함교 위에 있던 병기 담당 인원이었다. 잠수함이 침몰한 뒤 정신을 잃고 표류하다가 일본 구축함 와카타케에 구조되어 전후에 미국으로 귀환했다.[7] 한 가지 웃기는 것은, 구식 S급 잠수함은 어뢰발사관의 길이가 짧아 Mark.14 어뢰를 사용할 수 없어 본의 아니게 Mark.10 어뢰만 사용하게 되어 피해를 덜 봤다는 사실.[8] Charles Andrews Lockwood, 1890년 5월 6일 버지니아 주 미들랜드 출생. 1912년 애나폴리스 졸업 후 미시시피, 애커슨 등의 수상함 근무를 시작으로 1914년 잠수함에서 근무하며 잠수함 전문 장교로서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되어 잠수함부대 참모장 역임. 당시 미해군 잠수함 계의 권위자이자 잠수함 오타쿠로 1942년 5월 소장으로 진급한 후 남서태평양 잠수함부대 사령관으로 부임.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며 태평양함대 잠수함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잠수함 전력 강화를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그 공로와 잠수함대의 활약을 인정받아 전후 수훈장 3회 등 훈장을 수여받고 1947년 퇴역, 1967년 6월 7일 사망.[9] 이렇게 만든 밀주는 이름하여 '''어뢰 주스(Torpedo Juice)'''. 물론 미 해군에서도 이걸 못 마시게 하려고 빨간색 염료를 타기도 했지만 보급 식빵을 잘 말려 겹겹이 쌓은 후 에탄올만 걸러내 마신다든가, 혹은 어디선가 부품들을 삥땅쳐 염료를 걸러내는 장치를 만든다든가 하여 어떻게든 마셨다. 어뢰를 일본군 함대에 발사하느니 어뢰에 든 에탄올로 술을 만들어 마시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육군에 비유하자면 전쟁터에서 총의 신뢰성이 너무 형편없어 망치 같은 공구로 쓰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평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참 적과 싸우는 군인들에게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병기를 고작해야 술 만드는 재료로 취급할 정도로 성능과 인식이 최악이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미군은 군인에 대한 대우가 굉장히 좋은 편이다. 술 안 마셔도 스트레스 많이 안받을 정도로. 1914년이후 함내 음주를 금지하고 나서 부터 아이스크림을 병 사기진작에 관한 주요 품목 7종중 하나로 지정하고 아이스크림 보급에 힘쓰고, 대전 말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냉장/냉동 시설이 부족한)소형함을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배 자체에서 시간당 5.7톤씩이나 생산할수있는 전용 아이스크림함 까지 만들어 배치할 정도였다. 저 어뢰의 성능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에 대한 훌륭한 반증.[10] 참고로 니미츠 제독도 잠수함에 관심이 많았다. 항목 참고.[11] 원문을 직역하면 "병기국에서 우리에게 제대로 적중하여 폭발하는 어뢰를 주지 못한다면, 함선국에 연락하여 목표 함선의 측면을 찢어발길 수 있는 갈고리 장대를 제작하라고 하라!"[12] 이것에 열받은 크리스티 제독은 직접 잠수함에 동승하는 기행을 벌였는데 잠수함 함장들이 제독을 탑승시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임무에 소극적으로 변해서(투스타가 탑승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역습당해 격침되기라도 하면...) 전과를 제대로 못 올리는 일이 발생해서 또 평판을 깍아먹었다.[13] 심지어 잠수함용 디젤 엔진에 관해서는 니미츠 제독만큼 상세히 아는 해군 관계자가 없었을 정도라서, 기업에서 거액의 스카우트 요청이 들어올 정도였다..[14] 그리고 이것은 독일 해군도 겪은 문제였다. 이리 될 수 밖에 없는게 지구의 자기장은 적도를 기준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형성된다. 이게 문제가 된 것.[15] 전임자와는 다르게 더글러스 맥아더의 신임을 얻었고 이전엔 과달카날 전역에서 치열했던 전역 중반에 한동안 항모부대를 지휘해서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했고 북태평양군 사령관으로 타군 장성들과 별 마찰 없이 전구를 지휘하는 등, 개인적 역량도 나쁘진 않았고 '미 해군의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지지인맥도 상당했다.[16] 월권행위에는 규정을 무시하고 훈장을 남발한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술한 잠수함에 동승한하는 기행으로 잠수함 함장들 사이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의 평판을 어떻게 만회해려는 시도였다고.[17] 실전 투입되지 않았지만 함선용 어뢰인 21" (53.3 cm) Mark 17은 HBX 399 kg으로 탄두중량을 약간 줄이는 대신 46노트로 16,500 m를 항주 가능했다.링크[18]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은 사정거리를 줄이고 탄두를 대형화하는 개량을 한 93식 산소어뢰 3형을 개발했다.[19] 이 어뢰는 미 육군항공대에서도 사용하였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B-26이 뇌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전과는 거두지 못했다.[20] 선박이 좌우로 요동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정 장치.[21] 사실 이 조건은 이미 1944년에 확인되었다. 참고로 760 km/h면 당시 전투기들의 속도보다 빠르다. F4U-4의 최대속력은 746 km/h까지 나왔으며 스핏파이어 후기형도 최대속력이 710~730 km/h이다. 미 해군의 폭격기나 뇌격기는 500 km/h도 안 나오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고 속력은 기준 기상 상황, 지정 고도에서 수평 비행할 때 이야기다. 적함선을 향해 강하할 때는 더 빠른 속력이 나온다.[22] 물론 전함을 상대로는 급강하 폭격기만으로는 격침하기 어려워서 좋든 싫든 뇌격기를 써야 하지만 다행히(?) 일본 전함들은 호텔 노릇이나 하고 있었으니.[23] 전쟁 후반에 이르면 HVAR 같은 공대지 로켓이 등장하여 대함공격에 사용되었다. 다만, 이 당시만 해도 로켓의 탄두가 작아서 구축함 이하의 소형 함정은 몰라도 대형함을 상대로는 대공포 같은 외부 구조물들을 파괴하거나 갑판의 승조원들을 날려버리는 정도에 그쳤다. 대형함의 선체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의 대형 로켓(ex.타이니 팀)들은 전쟁이 끝날 때나 되어야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