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모토 키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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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에노모토 키하치(榎本喜八)
출신
도쿄나카노
생년월일
1936년 12월 5일
사망
2012년 3월 14일 (향년 75세)
신체조건
172cm, 71kg
투타
좌투좌타
포지션
1루수
출신학교
와세다 실업 고등학교
소속팀
마이니치/다이마이/롯데 오리온즈(1955~1971)
니시테츠 라이온즈(1972)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6년
'''1960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59년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호크스)
.324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오리온즈)'''
'''.344'''

1961년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플라이어즈)
.336
'''1966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65년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320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오리온즈)'''
'''.351'''

1967년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플라이어즈)
.336
'''1966년 퍼시픽리그 최고 출루율[1]'''
1965년
대릴 스펜서
(한큐 브레이브스)
.424[2]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오리온즈)'''
'''.439[3]'''

1967년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플라이어즈)
.439[4]

1. 소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좌타 강타자.
오 사다하루 같은 당대의 거포 1루수들에 밀려 베일에 가려진 면도 있었지만, 현역 시절에는 오리온즈에서 프랜차이즈 1루수로써 정교한 타격을 앞세워 긴 세월동안 활약했으며, 장훈에 앞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처음 가진 선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데뷔했고 수많은 고졸 신인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최연소 1,000안타 및 2,000안타 달성 기록도 가지고 있다.

2. 고교 시절


드래프트를 시행하지 않았던 시기라 각 팀에서는 자유롭게 선수를 획득할 수 있었는데,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프로 입단을 꿈꾸던 에노모토는 고교 선배 아라카와 히로시[5]에 입단을 부탁했고, 아라카와는 "앞으로 3년동안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등교 전 스윙 500개씩 연습하면 해주겠다"고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에노모토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3년동안 실천했다. 고3 가을에 아라카와의 집을 방문해 "매일 연습했습니다. 입단시켜 주세요"라고 무릎꿇고 애원했고, 아라카와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입단테스트를 주선했다. 아라카와는 "에노모토는 우직하고 등교전 500개를 하라고 하면 1개도 빼먹지 않고 연습했다. 1,000개를 하라고 했으면 1,000개를 하곤 했다. 보통 1,000개라고 하면 그만큼 많이하라는 뜻인데 정말 1개도 빼먹지 않았다."라고 술회했다.
아라카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테스트 기회를 얻었고 벳토 카오루 감독과 1루수 니시모토 유키오가 이를 지켜봤다.고교생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타격폼과 뛰어난 선구안을 높이 삼아 입단에 성공했다.

3. 프로 시절


1955년 입단해서 고졸신인으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타격 기술이 훌륭하고 선구안이 뛰어나 데뷔 1,2년차에 리그 최다 볼넷 숫자 1위를 기록했다. 1960년부터 3년연속 최다안타를 기록했고 1961년의 180안타는 경이로운 숫자였다. 1968년에는 사상 최연소인 31세 7개월에 2,000안타를 달성했는데 당시 2,000안타를 기록한 타자는 카와카미 테츠하루야마우치 카즈히로뿐이었다. 좌-중-우 방향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타구를 날렸던 장훈과 달리 공을 잡아당겨 때리는 스타일이었고,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많이 양산했다. 같은 팀원이며 에노모토와 클린업을 짜고 있던 야마우치 카즈히로는 완벽한 타격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현재는 사라진 도쿄 스타디움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최다안타 타이틀은 총 4회를 획득했으며, 이는 후쿠모토 유타카, 부머 웰즈와 함께 퍼시픽리그 역대 2위이다.[6]
장훈은 "수위타자 타이틀을 놓고 다툰 건 에노모토뿐이다. 투수가 어떤 공을 던져도 결코 도망가지 않았으며 저런 타자는 다른 가와카미 데쓰하루뿐이었다. 대단한 타자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토요다 야스미츠는 "타격의 능숙함은 사상 최고이고 칠 수 없는 코스나 높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평하고 있으며, 팀 후배 아리토 미치요는 신인 시절 에노모토의 연습을 보고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에노모토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노무라 카츠야는 현역 시절 가장 무서운 타자 중 한 명으로 꼽고 있다. 노무라는 상대 타자를 「속삭임 전술」로 교란하기로 유명했는데[7], 에노모토의 독특한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속삭임 전술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무라는 에노모토에 대해 "저 정도로 선구안이 좋은 선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내 속삭임도 통하지 않았다. 그토록 무서운 타자는 후에도 먼저도 마주친 적이 없다, 포수 노무라로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자"로 평가했다. 노무라 카츠야는 덧붙여서 "타석에서 처절하게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아슬아슬한 코스를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잡아준 후, 에노모토가 손가락을 3센치정도 넓혀 "이만큼 빠져있다"라고 불쑥 말했다. 실은 나도 그 정도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똑똑히 보고 있는지 몰라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라이벌 팀 에이스 이나오 가즈히사가 에노모토를 상대하기 위해 포크볼을 마스터했으며, 팔꿈치에 부담이 가서 포크볼을 봉인했지만 에노모토에게만 사용했다. "기분 나쁜 정도의 집중력을 느꼈다. 슛도 슬라이더도 깨끗하게 쳐 버리므로, 에노모토에게만 포크를 던졌다. 단 한명의 타자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공을 기억해야만 했다. 에노모토 씨와의 승부만이 야구를 하고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니시모토 유키오는 "지금까지 본 타자 중 가장 정확한 타자가 누구인지 물으면 주저없이 에노모토를 꼽겠다"라고 했다.

에노모토와 오 사다하루를 지도한 아라카와 히로시는 "배트 컨트롤이 좋고, 타자로서의 완성도는 오보다 에노모토가 위"라고 말하고 있다. 둘을 비교한 코멘트로는, "둘 다 연습을 많이 하고 더욱 파고들려고 했지만 파고드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오)사다하루는 운이 좋아서 홈런이 되면 늘 좋아했으나, 에노모토는 홈런이 됐어도 '이렇게 쳤으면 더 좋았을텐데'하고 생각했다.온 힘을 다해 파고들어서 여유과 놀이가 생긴 사다하루는 게으름을 적당하게 피우는 걸 잘했다. 이 점이 세계 최고의 홈런왕이 된 사다하루와 그렇지 못했던 에노모토의 차이가 아닐까"라고 했다.
에노모토가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오, 나가시마, 에노모토는 모두 내 제자지만 그 중에서도 에노모토는 수제자니까 오나 나가시마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때와는 다르다. 고생했다"라고 축복했다.

4. 인물


고지식한 남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만의 독특한 타격폼 조정 방법으로 '배트를 손이나 몸으로 휘두르지마라. 마음으로 휘둘러라'라는 이미지를 충실하고 실행했다. 또한 프리배팅 자체가 적었고 그 때문인지 시합에 들어가기 전까지 배트를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적도 자주 있었다.
일본도로 지푸라기를 베는 교육을 오 사다하루에게 부과했던 아라카와 히로시의 훈련법을 실은 에노모토가 먼저 공부하고 무술과 합기도를 타격이론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현역 시절, 에노모토의 초등학생 아들은 아버지가 집에서 일본도를 흔들며 연습하는 무서운 분위기의 훈련을 보고 겁을 먹은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안타나 홈런을 쳤어도 '제대로 된 타격이 아니다'라고 고민하고 범타로 물러날 때도 고민을 거듭했다. 무안타로 경기를 끝내는 날에는 배트를 쥐고 좌절하는 일도 많았다. 아라카와는 "에노모토는 너무 성실해서 그런지 긴장을 푸는 법을 몰랐다", 오리온스 시절 코치였던 요나미네 카나메는 "그(에노모토)는 야구에 대해 너무 진지했다. 좀 더 야구를 즐겼어야 했는데...:"라고 평한바 있다.
1958년 릿쿄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타격을 시범경기에서 목격하고 "이것은 자신보다 위"라고 통감하고 야구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에노모토는 억울한 나머지 나가시마가 1루에 출루하면 "스모에서 승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59년 게임 전 타구가 팀 동료 야나기 토시오의 얼굴을 직격해 아래턱 골절상을 입고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을 때 에노모토는 얼굴은 창백해지고 떨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누가 에노모토를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은 부상당한 야나기보다 에노모토의 풀이 죽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통산 2,314 안타는 역대 15 위, 통산 타율 .298은 4,000 타수 이상으로 역대 24위이다.
1, 000 안타를 날린 것은 무려 24세 9개월 때의 일이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있다. 스즈키 이치로도 넘지 못한 대기록이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야마우치 가즈히로에 이어 사상 3번째로 일본프로야구 2,000안타를 기록했다.
생전에 존경하는 선배와 라이벌로 3명을 꼽았는데 야마우치, 이나오 가즈히사, 그리고 장훈이었다. 에노모토의 타계 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초청 연사로 초대된 것은 장훈이었다. 장훈은 "에노모토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라이벌로서 야구는 움직이는 공을 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러면 공의 속도를 이겨낼 수 없기에 보통은 반동을 쓰면서 레그 킥도 방법 중 하나. 하지만 에노모토 씨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테이크백도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끄떡하지 않는 정밀 타격 폼에 정확한 미트 힘. 그리고 밀리 단위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 선구안 ......
좌-중-우 전 방향으로 골고루 안타를 날렸던 장훈과 다르게 잡아당기기 전문이었으며 라이너성 타구를 양산하여 관중들이 홈런 타구를 피하지 못하고 졸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내야 안타와 번트 안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에노모토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후 "저는 집 밖에서 아버지의 행동을 알지 못합니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다양하게 아버지에 대해 쓰여져 있습니다만, 전부가 사실은 아닙니다. 금욕하시고, 여러모로 서투른 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라고 술회했다. 덧붙여서 "인터넷에 아버지의 여러 일화가 실리고 나서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의 색종이 편지가 집에 오면 아버지는 "나는 은퇴 후가 더 인기가 있구나"라고 말하시고 정성스럽게 사인을 반환했습니다. 아버지의 손자가 지금 3명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굉장한 야구 선수 였다는 것을 손자들도 어딘지 모르게 알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는 선수가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5. 기행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하기도 했고, 자신의 타격에 만족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방망이로 물건을 깨부수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도 하였다. 또한 계약 갱신으로 방문한 구단 사무소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명상에 잠기거나, 게임 전까지 연습 대신 벤치에서 좌선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주위를 걱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일본프로야구의 선인(仙人)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현역 시절에는 , 담배, 마작 등을 일체하지 않았으며 불결해진다는 이유로 카바레에 갔다가 금방 나오기도 했다.

6. 은퇴 후


OB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야구계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기본적으로 언론사와의 인터뷰 요청을 고사하고 있었으나, 사실 타격코치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무도 권유해 주지도 않고 본인도 사교에 서툴기도 해서 꿈을 이루지 못한듯.

7. 사망


대장암이 발견되어 입원과 자택 요양 생활을 했지만 2012년 3월 14일 병세가 악화돼 도쿄 도내의 병원에서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인 2016년 1월 18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 1962~1984년 퍼시픽리그에서만 단독으로 시상할 땐 희생 플라이출루율 계산에 미포함되었다. 그래서 현행 계산법으로는 (희생플라이가 0개일 경우를 제외하면) 당시 기록보다 낮게 나온다.[2] 현행 계산법상으론 .423[3] 현행 계산법상으론 .434[4] 현행 계산법상으론 .431[5] 훗날 에노모토의 후배인 오 사다하루에게 외다리타법을 전수시켜 최고의 타자로 키워냈다.[6] 이치로가 경신하기 전까지는 리그 1위였다.[7]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다음 공은 머리""맞으면 아플텐데""폼이 그게 뭐냐!" 등 상대방의 속을 긁는 직접적인 말을 하며 타자의 신경을 흐뜨렸다고 한다. 상대팀의 보복이 시작되면서 혼잣말을 하거나 의미를 할수 없는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속삭임 전술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3명을 꼽았는데,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타격폼이 이상한데?"이 말을 하자 타격폼을 바꾸고 홈런을 때리며 돌아오질 않나, 오 사다하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장훈은 헛스윙을 하는척하면서 노무라의 뒷통수를 갈겨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