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카즈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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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이치 현 태생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1. 아마 시절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야구를 하던 어른들 사이에 끼어 볼보이 노릇을 하면서 야구에 눈을 떴다. 현립 오코시 공고에 진학해서는 4번 타자에 에이스로 활약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주니치 드래곤즈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지만 당시 구단의 경영 상 사정이 있었고 야마우치의 모교 오코시 공고의 야구부는 경식이 아닌 연식이었기 때문에 야마우치를 포함한 여러 명의 선수가 실제로 주니치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프로 입문에 실패한 야마우치는 사회인 야구 카와시마 방적에 입사하여 외야수로 전향했고, 팀을 도시대항 야구대회 본선에 진출시키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2. 프로 시절
2.1. 마이니치/다이마이 오리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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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마이니치에 연습생으로 입단하여 바로 정식 선수로 등록된 야마우치는 데뷔 첫 해 44경기에 출장하여 0.336의 타율로 가능성을 보였다. 3년 차인 1954년 시즌부터 주전으로 정착하여 그 해 5월 중순부터 팀의 붙박이 4번 타자로 나섰고, '''97타점'''으로 퍼시픽 리그 타점왕을 따내며 생애 첫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듬해인 1955년에도 '''타율 0.325, 26홈런, 99타점'''의 맹 활약으로 2년 연속 타점왕에 올랐고 1957년 시즌에는 '''29홈런'''에 '''타율 0.331'''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1959년 시즌에도 여전한 활약으로 3관왕까지 노리고 있었지만, 그 해 8월 27일 대 긴테츠 버팔로즈 경기 중 상대 투수 '''글렌 미켄즈'''가 던진 공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부상을 입은[4] 야마우치는 1개월 정도 결장 후 복귀하여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야마 코헤이''' 와의 타격왕 경쟁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더블헤더로 벌어진 난카이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0.323로 1위를 마크하던 스기야마는 벤치에 앉아 있었고, 0.319로 따라붙은 야마우치는 더블헤더 1차전 첫 타석에서 중월 2루타를 치며 0.321로 스기야마 와의 간격을 좁히자 난카이 마운드는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 지시로 두 시합 내내 야마우치를 '''6타석 연속 고의사구'''로 거르는 추태를 보이며 끝끝내 스기야마의 타격 1위를 지켜냈다(...). [5] 야마우치는 그 해 0.320으로 타격 2위에 그쳤지만, '''25홈런'''으로 커리어 첫 홈런왕에 올랐다.
1960년엔 '''타율 0.313, 32홈런, 103타점'''을 남기며 2년 연속 홈런왕과 생애 세 번째 타점왕을 획득했고, 그 해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하며 다이마이[6] 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야마우치와 '''타미야 겐지로''', '''에노모토 키하치''', '''카츠라기 다카오'''[7] 등으로 이어지던 이른바 '''미사일 타선'''[8] 을 앞세운 다이마이는 일본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를 제패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다이요 훼일즈와 맞붙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4경기를 내리 1점차로 다이요에게 내주며 지리멸렬 하는 바람에 감독이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에게 바카야로 라는 폭언을 듣고 격분하여 취임 1년만에 감독 직을 내던지고 말았다(...). 정규 시즌 중 일본 프로야구 최다 타이 기록인 '''18연승'''[9] 을 거두며 승승장구 하던 다이마이 였지만 활활 타오르던 방망이가 정작 시리즈에서는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이후로도 야마우치는 1961년 '''112타점'''으로 타점왕[10] 에 올랐고, 1962년에도 타율 0.334로 타격 2위를 마크하는 활약을 보였지만, 1963년 시즌 후 에이스 급 투수가 필요했던 다이마이와 강타자를 원하던 한신 타이거스의 사정이 서로 맞아 떨어지면서 야마우치는 고야마 마사아키와 유니폼을 바꿔 입는 이른바 '''세기의 맞 트레이드'''를 통하여 한신으로 소속팀을 옮기게 되었다.
한신으로 트레이드 되기 전 까지 야마우치는 장훈, 에노모토 키하치, 노무라 카츠야와 함께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이름을 남겼다.
2.2. 한신 타이거스
1964년 시즌부터 한신의 새로운 4번 타자로 자리매김 한 야마우치는 이적 첫 해에 '''아오타 노보루'''가 갖고 있던 개인통산 최다 홈런인 265홈런을 뛰어 넘는 '''293홈런'''을 기록했고, 31홈런으로 센트럴 리그 홈런더비 3위에 오르며 한신의 리그 우승에 공을 세웠다. 일본시리즈 에서 팀은 난카이 호크스에 밀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야마우치는 2개의 홈런을 날리는 활약을 보였다.
1965년 7월 4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개인 통산 300홈런'''을 마크했고, 1967년 10월 14일에는 쇼와 시대 태생 선수로는 처음이자 일본 프로야구를 통 틀어서는 카와카미 테츠하루의 뒤를 잇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한신에서 뛰던 4년 동안 시즌 최고 타율이 0.261에 불과했는데, 이는 당시 낮 경기가 많았던 퍼시픽 리그와 달리 센트럴 리그, 특히 한신은 주로 야간에 경기를 개최했기 때문에 평소 시력이 좋지 않았던 야마우치 로서는 공을 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합 때 항상 열정적으로 플레이하는 그의 모습은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3. 히로시마 도요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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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시즌이 끝난 후 야마우치는 네모토 리쿠오 감독[11] 의 부름을 받고 히로시마로 이적했다. 1968년 시즌 전 경기에 출전하면서 타율 0.313로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어[12] 타격 3위에 오르며 존재감을 과시했고 히로시마가 창단 후 처음으로 리그 A클래스(3위)에 랭크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더불어 그 해 생애 통산 10번째 외야수 부문 '''베스트 나인'''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9년 부터 야마우치의 타격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야마모토 코지, 기누가사 사치오, 미무라 토시유키 등 당시 히로시마의 젊은 타자들에게 팀 내에서 '''살아 숨쉬는 타격 교보재'''로 존경받았다.
1970년 시즌을 끝으로 야마우치는 개인 통산 400홈런을 불과 4개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의 등번호 8번은 야마모토 코지가 물려 받았다.[13]
야마우치가 19시즌 동안 남긴 통산 성적은 '''2271안타, 타율 0.295, 396홈런, 1286타점''' 이며, '''타격왕 1회, 홈런왕 2회, 타점왕 4회'''를 차지했다.
현역 시절 야마우치는 특유의 배트 컨트롤을 바탕으로 배드볼 히터로 유명했고, 특히 슈트(역회전공) 공략에 능해서 '''슈트 치기의 달인'''이라 불리었다. 수비에서는 주로 좌익수로 나왔지만 가끔 우익수를 보기도 했고, 1962년엔 중견수로 출장했는데 안정된 외야 수비와 정확한 송구로 호평 받았으며 '''175보살'''로 외야수 통산 최다 보살 일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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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타전 MVP 부상으로 오토바이를 받은 야마우치[14]
또한 올스타전에 나왔다 하면 강한 면모를 보이며 통산 16회 출장에 양 리그 최다 득표 6회[15] , 올스타 MVP 3회를 수상하면서 '''올스타의 남자''', '''축제의 남자''', '''상금 도둑'''(...) 등등의 별명이 붙기도 했다.
3. 지도자 시절
197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타격 코치를 시작으로[16] 지도자 생활로 접어들었고, 롯데 오리온즈와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그 외에 한신 타이거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대만 프로야구 허신 훼일즈의 코치를 역임했다.[17]
롯데 감독 시절엔 1980~1981년, 2년 연속 팀을 전기리그[18] 우승으로 이끌며 나름 성과를 보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킨테츠 버팔로즈[19] 와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퇴하는 바람에 일본시리즈와는 인연이 없었다. 1981년 시즌 종료 후 롯데 감독에서 사임하고 해설자로 일하다가 1984년 주니치 감독에 취임하여 첫 해에는 센트럴 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20] 그 후 1985~1986년 2년 연속으로 리그 하위권(B클래스)에 머무르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결국 1986년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감독으로서 '''336승 313패 63무승부, 승률 0.518'''의 통산 성적을 남겼으며 A클래스(리그 3위 이상) 3회, B클래스(리그 4위 이하) 3회를 기록했다.
1980년 5월 28일 현역시절 라이벌이자 후배였던 장훈이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할 당시, 야마우치는 장훈의 소속팀이던 롯데 오리온즈 감독으로 재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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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감독 시절 오치아이 히로미츠(오른쪽)의 타격을 지도하는 야마우치[21][22]
지도자로서의 야마우치는 타격 이론에 대해 굉장히 해박하여 타격에 관하여 얘기를 꺼내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여서(...) 일명 갓파 에비센 으로 통했다. 또한 그라운드에서 누군가의 타격을 지도할 때에는 온갖 손짓 발짓을 동원하고 침까지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는 스타일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인명사전에 실린 자신의 프로필 중 취미 란에 '''타격 지도'''라 적을 정도로 타격을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했고, 심지어 자신의 팀 제자들 뿐 아니라 남의 팀 선수들 타격까지도 열심히 가르치려 들 정도였다(...). 우스갯소리로 나가시마 시게오가 건망증 때매 헛갈려서 상대 팀 선수들 타격을 봐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야마우치는 실화였던 것이다(...).[23]
그의 지도 실력을 바탕으로 카케후 마사유키, 타부치 코이치, 마유미 아키노부, 하라 타츠노리, 코마다 노리히로[24] , 요시무라 사다이키, 오카자키 카오루등의 훌륭한 타자들을 키워냈고, 한신 코치 시절엔 입단 초기 '''한신 사상 최악의 외국인 타자'''라는 딱지가 붙어있던 '''마이크 라인백'''[25] 을 랜디 바스 이전 최고의 강타자로[26] 변모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라인백은 야마우치가 1977년 한신에서 퇴단한 이후 팀 성적이 하락하자[27] '''"야마우치 코치가 나가서 한신이 약해졌다"''' 라고 할 정도로 그에 타격 지도에 대해 엄지를 추켜세운 바 있다. 요미우리에서도 명코치의 진가를 드러냈는데 전해 츠다 츠네미와의 맞대결때 손목분쇄를 당했던 하라보살의 부활과 오카자키 카오루의 대두는 물론 '''의외성의 사나이'''로 불릴 정도로 노답컨택으로 악명높았던 주전포수인 야마쿠라 카즈히로를 리그MVP로 기어이 만들어냈다는거다.
한편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수석 코치 시절, 자신의 타격 지도 방침에 반발한 스즈키 이치로를 2군으로 내려버린 적도 있었지만 이후 이치로가 '''시계추 타법'''으로 일본은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하는 명 타자로 성장하자 야구계 주변에서 "진주를 썩힐 뻔 했다"며 비판받기도 했다.[28]
4. 생애 말년
1999년을 끝으로 허신 훼일즈 코치 직을 내려놓고 일본으로 돌아온 야마우치는 프로야구 마스터즈 리그의 '''삿포로 앰비셔스''' 초대 감독을 맡았고, 2002년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지도자 생활 외에 니혼 TV, '''스포츠 닛폰''' 등의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했다.
2007년 3월 24일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롯데 마린즈의 정규시즌 개막전(대 닛폰햄 파이터즈)에 롯데 OB 대표로 시구 행사에 참가했다.
2009년 2월 2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병원에서 간부전으로 인하여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 본명은 '''和弘'''(읽는 방법은 마찬가지로 '''카즈히로''')였지만 야마우치의 한 팬이 "和弘는 뭔가 둥글둥글한 느낌이니 이름을 一弘로 바꾸는 게 좋다"며 권유했고, 야먀우치는 이를 받아들여 1962년 시즌 도중에 개명했다고 한다.[2] 퍼시픽리그 역대 최저 시즌 최다홈런 기록[3] 시즌 도중 사임.[4] 그 사구의 영향으로 야마우치는 평생 가벼운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5] 공교롭게도 김영덕은 당시 난카이 소속 투수로 뛰고 있었다. 어쩌면 훗날 그가 일으킨 수많은 기록 조작에 관한 논란은 일본 시절에 보고 배운 걸지도 모르겠다...[6] 1957년 시즌 후 마이니치는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흡수 합병하여 팀명이 '''다이마이 오리온즈'''(정식 명칭은 '''마이니치-다이에이 오리온즈''')로 바뀌었다. 그런데 다이마이는 형식상 마이니치 신문과 다이에이 영화사의 공동 경영체제 였지만, 다이에이의 오너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사실상 구단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당시 야구계에선 '''"오히려 마이니치가 다이에이에 역합병 당했다"''' 라는 얘기도 돌았다.[7] 한신 타이거스 소속이던 1970년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오토바이 레이스 승부조작 관여)되어 출장정지 3개월 처분을 받고 그 해 은퇴했다. 2013년 사망.[8] 1960년 퍼시픽 리그 타격 순위는 1위 에노모토(0.344), 2위 다미야(0.317), 3위 야마우치(0.313)로 다이마이 선수들이 전부 상위권을 장악했다(...).[9] 1954년에 난카이 호크스도 18연승을 거두었다.[10] 같은 해 도에이의 장훈은 타율 0.336로 데뷔 첫 수위타자 획득이란 영예를 누렸다.[11] 그 유명한 세이부 라이온즈와 오늘날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다.[12] 저 둘은 71년에 요미우리 메인 타격코치로 부임하면서 한솥밥을 먹게 되고 9년 연속 우승에 일조했다. 나가시마의 타격코칭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13] 야마모토는 1986년 히로시마 에서 은퇴 후 이 8번으로 히로시마 사상 첫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되었다.[14] 승용차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1950~1960년대 일본에서는 오토바이 정도면 근사한 이동 수단으로 대접받았다.[15] 이는 스즈키 이치로와 타이 기록이다.[16] 본인의 우승 커리어가 모두 요미우리 타격 코치 시절이다.(71~73, 89)[17] 그 밖에도 소카 대학(創価大学) 야구부의 임시 코치로도 일했다.[18] 당시 퍼시픽 리그는 전, 후기시즌으로 운영되었고, 전/후기 우승 팀끼리 5전 3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뤄 승리한 팀이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자격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제도였다.(전/후기 전부 우승 시엔 바로 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직행)[19] 9년뒤에 제자들인 하라보살과 코마다 노리히로를 앞세워서 설욕에 성공했다. 다만 감독은 후지타 모토시였고 본인은 1군메인 타격코치였다.[20] 우노 마사루와 오시마 야스노리의 애미가출한 수비때문에 히로시마에게 우승을 허용했지만 왕정치가 이끄는 요미우리 상대로 14연승이나 찍으면서 전용육변기로 만들어 버렸다.[21] 평소 레벨 스윙을 선호하던 야마우치는 오치아이가 롯데에 갓 입단했을 때 흔히 신주(神主) 타법이라 부르던 오치아이 특유의 어퍼 스윙을 고쳐 보겠다고 밤낮으로 매달렸지만, 오치아이는 입단 1년차의 햇병아리 주제에 '''무엄하게도''' 야마우치에게 '''"저는 감독님이 설명하는 타격 방법을 도저히 이해 못하겠는데요?"''' 라면서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바람에 야마우치는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래, 어디 한번 네 맘대로 쳐 보거라!!"면서 '''두손 두발 다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롯데에서 현역 말년을 보내던 장훈이 야마우치도 포기한 오치아이의 스윙에 대해 '''"그 정도면 충분히 잘 칠 수 있다. (스윙을)그대로 유지하라"'''고 격려하면서 논란은 일단락 되었고, 결국 오치아이는 데뷔 3년차인 1981년 퍼시픽 리그 타격왕, 이듬해인 1982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3관왕을 획득하며 롯데 타선의 중심 축으로 성장했다.[22] 오치아이의 타격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내세운 야마우치 였지만, 오치아이는 후일 자신의 자서전에서 '''"처음엔 (야마우치)감독의 지시를 내 능력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전부 맞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라면서 야마우치의 타격 이론을 높게 평가했고 자신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려 든 야마우치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치아이가 1987년 시즌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을 때 감독이던 야마우치는 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직후 오 사다하루 감독의 요청으로 요미우리 타격 코치로 부임해버렸고, 후임 감독은 선수들에게 도깨비같은 존재였던 호시노 센이치 였으니(...). [23] 물론 나가시마도 타격 지도를 좋아하는 점에선 야마우치와 비길 만한 야구인이었다는 점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참고로 야마우치는 교진군 코치 시절 나가시마와 3년간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었고 메인 타격코치로 9년연속 우승에 일조했다. 그리고 87년에 다시 부임하여 1989년 일본시리즈 역스윕에 크게 일조했다. 역스윕때 1번타자를 3차전까지 삽퍼고 있던 오가타 고이치 대신 미노다 고지로 기용할것을 후배감독인 후지타에게 진언했다고 한다. 나가시마의 코칭열성은 감독수업받던 시절 즉 선수겸임 타격보조코치시절 야마우치에게 큰 영향을 받은 거다. 나가시마에 묻혀서 그렇지 현재 요미우리 감독인 하라보살도 만만찮다. 하라보살도 야마우치의 요미우리 시절 직속제자였다.[24] 이쪽은 요코하마의 레전드이자 하라보살의 전임 4번타자였던(제47대) 마츠바라 마코토가 거의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본격적인 중용은 야마우치가 메인타격코치로 부임하고 나서다.[25] Micheal Wayne "Mike" Reinbach(1949~1989). 1976~1980년 한신의 외국인 선수로 뛰었고, 5시즌 통산 '''타율 0.296, 94홈런, 324타점'''을 올리면서 쏠쏠한 활약을 보였다.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활동하다 1989년 5월 20일 운전 미숙으로 인하여 자신의 차량이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39세.[26] 참고로 라인백은 데이터 이스트에서 1988년에 출시한 스타디움 히어로의 T팀 3번타자인 '''파스(パース)'''(0.400, 47홈런)에 필적하는 성적(0.398, 46홈런)을 보유한 대타 요원 '''라인(ライン)'''의 모티브가 된 선수이기도 하다. 라인에게 파스와 맞먹을 만한 스펙을 준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27] 1978년 시즌 한신은 '''창단 이래 최초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라는 굴욕을 맛보았다(...).[28] 사실 이치로의 프로 초창기 타격에 관해서는 야마우치 보다 당시 오릭스 감독이던 '''도이 쇼조'''가 훨씬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특히나 도이는 당시 '''블루 선더 타선'''이라는 별칭으로 대표되던 강력한 타선 중심의 팀 컬러를 수비력 중심으로 바꾸려 한 것 등 때문에 마츠나가 히로미, 부머 웰즈 등 당시 전신이었던 한큐 시절부터 주전으로 뛰어온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켰고, 이들 중 대다수는 도이 감독 재임 시절에 오릭스를 떠나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