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 식민지

 



'''13개 식민지'''
'''Thirteen Colon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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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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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 ~ 1776
위치
아메리카 동부 13개 주
수도
필라델피아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식민지
국가원수

언어
영어, 불어, 독일어
성립 이전
뉴네덜란드
성립 이후
미합중국
1. 개요
2. 역사
3. 성격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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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를 중심으로 전개한 13개의 식민지를 일컫는다. 이 식민지들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켜 자유 민주주의 독립 국가 미합중국을 건국하게 된다.

2. 역사


잉글랜드는 1607년에 버지니아 주에서부터 시작하여, 1732년 조지아 주에 이르는 13개의 식민지를 형성하였다. 이들 식민지는 프랑스의 아메리카 식민지와 달리, 자영농으로 구성된 가족 단위의 정착민이었다. 때문에 인구도 많고 농지 또한 넓었다. 필연적으로 땅을 지키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충돌이 잦았고 영국 국왕은 이에 따라, 자체적인 무장과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625년에 1,980명이었으나 독립전야의 1775년에는 240만명으로 크게 불어나게 된다. 1775년 당시 그레이트 브리튼의 인구수는 약 700만이었다. 잉글랜드에서 550만, 웨일즈가 50만이었으며 스코틀랜드가 125만명이었다. 즉 당시 "13개 식민지"는 잉글랜드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식민지였다. 인구의 구성은 85%가 그레이트 브리튼 출신이었고 9%가 독일, 4%가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다수 농민이었고, 나머지는 상업(주로 밀수) 종사자들이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지배는 상당 부분 유화적인 것이라서 13개 식민지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살았다. 실제로 이들은 미국 독립선언이 이루어지기 일보 직전까지도 영국왕 조지 3세에게 싹싹 빌어서 용서를 빌자고 주장하는 주화파가 많았다.

본격적으로 영국 정부와 13개 식민지 정부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프렌치-인디언 전쟁(7년 전쟁)이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놀라운 전과를 얻는다. 13개 식민지인들은 충성스러운 영국 왕의 신민으로 전쟁에 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축하고 좋아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영국 정부는 1763년에 13개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개척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는 오랜 전쟁으로 군비가 바닥난 상태에서 식민지인들이 서부 개척을 시도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충돌로 또 군비가 지출되어 재정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선언으로 13개 식민지인들은 불만이 상당히 많은 상태에서, 오랜 전쟁으로 재정 지출이 컸던 영국 정부가 이를 식민지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려 처리하려고 했다.[1]
대표적으로 1764년과 1765년 설탕세와 인지세를 식민지인들에게 부과하는데, 13개 식민지 내에서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1766년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2]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에 멈추지 않고 1767년 타운젠드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납, 종이, 페인트, 유리, 홍차 등과 같은 일상 용품 수입에 대해 '''관세를 정한''' 법이었다. 식민지 지역은 해당 품목들을 영국 본토에 팔아넘기며 돈을 꽤 짭짤하게 벌었었는데 관세가 매겨지자, 매출이 급감하게 되어 결국에는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사실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13개 식민지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영국은 13개 식민지가 본토와 별개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13개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회에 진출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비용은 전쟁의 직접적 당사자인 13개 식민지가 부담하기를 원했으며,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로 개척하는데 영국 본토 군인들이 투입되는 것을 꺼려했으며,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의 거래에 관세를 매기려고 했다.
반면에, 식민지인들은 반대로 생각하였다. 13개 식민지인들도 영국인이니 영국 의회에 진출해야 된다고 생각하였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비용은 (식민지 주민을 포함한) 영국인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개척은 영국의 국력을 높여주고 영국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므로 영국 군대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영국과 13개 식민지는 하나의 나라이므로 둘 사이 거래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런 여론의 뒤에는 관세를 물기 싫었던 13개 식민지 수출업자들의 선동도 한몫 했다. 하지만 토마스 페인이 "상식"이라는 소책자를 발매하면서 여론은 완전히 뒤바뀌어버리고, 13개 식민지인들은 스스로가 영국인과 구별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며 독립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폭발은 보스턴에서 시작되었다. 보스턴은 영국이 세관을 설치하여, 집중 대상으로 돈을 뜯어내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불만이란 상상초월이었다. 이상징후를 느낀 세관은 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영국 정부는 군을 파견한다. 1768년 10월 1일 영국 군대는 보스턴에 상륙하였고, 세관 업무는 정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와중, 1770년 2월 22일,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이에 대규모 봉기가 격발되어 동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되어 5명의 식민지 시민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식민지에서 상황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의회는 무언가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종합되었다. 결국, 1770년 4월 12일 타운젠드 법은 철폐되나 홍차에 대한 항목은 제외되었다. 이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여론이 많았고 단단히 빡친 보스턴 주민들은 1773년 12월 16일 밤에 홍차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즐거운 축제를 일으켰다. 영국인들은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는지, 보스턴 항구 봉쇄라는 조치로 맞섰다. 뒤이어 메사추세츠 주 자체를 폐지하려고 준비하였고 이를 알게된 식민지인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서로의 대립각이 날로 높아지는 와중에, 13개 식민지들은 일단 모여서 회의를 해보자는 생각에 1774년 대륙회의를 소집하였으나 진척은 없었다. 편의상 13개 식민지라고 하지만 북아메리카의 각각 독자적인 여러 식민지들 중에서 훗날 미합중국에 가담한 식민지들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일 뿐이고 사실 식민지마다 총독이 따로 파견되고 각자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식민지들은 딱히 동질적인 소속감 같은 것은 없어서 정착민들은 스스로를 '필라델피아인', '매사추세츠인' 등으로 여겼다. 대륙회의가 소집될 때도 사우스 캐롤라이나주나 뉴욕주는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3.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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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식민지는 일반적으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특징에 따라 북부(뉴잉글랜드)/중부/남부로 나눈다.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하는 '''뉴잉글랜드 식민지(북부 식민지)'''는 추운 날씨와 거친 토양 때문에 농업이 힘들었지만 대신 풍부한 목재와 해안 근처 위치를 이용해 어업[3]과 조선업 등 산업이 발달해 초기 자본가노동자 계급이 형성됐다. 종교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건너온 청교도들이 세웠기에 청교도 중심으로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뉴욕펜실베이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식민지'''는 밀을 중심으로 농산물 수출이 성행했지만 상업 또한 발전한 곳이었다. 종교적으론 대부분 관대한 편이었기에 퀘이커, 루터교회, 성공회, 가톨릭 등 다양한 교파의 교인들이 섞여 살았다. 다른 종교나 종파에 우호적인 분위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북부 식민지(뉴잉글랜드)나 남부 식민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버지니아 주조지아 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식민지'''는 비옥한 토질을 바탕으로 플랜테이션 형태의 농업 경영이 대다수였다. 점차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유입되었다. 영국 국왕이 임명한 총독과 함께 노예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농장주들이 정치와 경제를 주도했다. 북부 식민지와는 다르게, 종교나 정치적인 문제 보다는 경제적인 문제로 유입된 인구가 많았으며, 자신이 영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따라서 남부의 상류층은 성공회 신자가 많았으며, 북부 식민지에 비해 종교성이 짙은 부류는 아니었다. 가톨릭 신자들이 세운 메릴랜드를 제외한[4], 버지니아 주·노스 캐롤라이나·사우스 캐롤라이나·조지아 주의 상류층은 대부분 성공회 신자들이었고 영국 정부에 우호적인 경향이 강했다.[5]

식민지군(群)에 따른 분류와 정식명칭 그리고 역사는 다음과 같다.
군의 분류
정식 명칭
구별
약사
뉴 잉글랜드 식민지군
뉴햄프셔 식민지
자치 식민지
1679년 매사추세츠 만 직할식민지로부터 분리.
매사추세츠 만 직할식민지
자치 식민지
1629년 매사추세츠 만 회사에 의해 설립됨.
1691년 폴리머스 식민지(1620년 설립)을 합병.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
자치 식민지
1636년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 설립.
코네티컷 식민지
자치 식민지
1636년 토마스 훅에 의해 설립.
뉴욕 식민지
영주 식민지
1664년 요크 공작( 제임스 2세)의 영지로 시작됨.
중부 식민지군
뉴저지 식민지
영주 식민지
1664년 존 버클리, 조지 캐트렛에 의해 설립.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영주 식민지
1681년 윌리엄 펜(퀘이커교도)에 의해 설립.
델라웨어 식민지
영주 식민지
1703년 펜실베이니아 식민지로부터 분리.
남부 식민지군
메릴랜드 식민지
영주 식민지
1634년 볼티모어 경에 의해 설립.
버지니아 식민지
자치 식민지
1607년 버지니아 회사에 의해 설립.
노스 캐롤라이나 식민지
영주 식민지
1663년, 클라렌 경 등 8명의 귀족들이 설립
1729년, 남북으로 분리
사우스 캐롤라이나 식민지
영주 식민지
1663년, 클라렌 경등 8명의 귀족들이 설립
1729년, 남북으로 분리
조지아 식민지
영주 식민지
1733년, 제임스 오글소프가 설립

4. 여담


  • 타운센드 채널 바로가기 - 타운센드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식민지 시절 미국과 18세기 유럽 식문화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으니 영어가 된다면 참고하기에 좋다.
  • 문명 4 콜로니제이션 게임을 하다보면, 당시 13개 식민지의 고충을 잘 알 수 있다. 왕이 세금을 차츰차츰 늘려 자그마치 99%까지 뜯어내게 된다.[6]
  • 게임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도 등장. 식민지 개척 시대 이후 대영제국의 식민정부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벤트를 통해 독립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위의 문명 4처럼 독립 관련 파라매터의 충족 조건을 맞춰야 한다.

[1] 7년 전쟁 직후 영국 정부의 부채는 1억 3000만 파운드에 달했다. 이는 당시 영국 세수 총액의 약 절반이나 해당한다.[2] 13개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의 곤궁함을 이해하여 세금 부과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허나 이번 기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고자,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성을 갖기를 희망했다. "대표없이 과세없다."란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한다.[3] 북대서양 연안에선 고래잡이가 발달했다.[4]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 메릴랜드의 어원도 아버지인 헨리8세에 의해 개신교(성교회)화되었던 영국을 다시 가톨릭화시키려 했던 메리 1세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5] 이런 배경 덕분에 독립전쟁 당시 13개 식민지 내부에서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북부가 가져갔다. 독립전쟁을 거치며 미국 내 성공회의 입지는 좁아졌고, 이후 건국 과정에서 청교도의 영향력이 더욱 성장하게 된다.[6] 게임 데이터상 그렇다. 실제로는 이 정도 뜯어내기 전에 독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