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

 

Burr-Hamilton Duel
1. 개요
2. 배경과 전개
3. 결과
4.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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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에런 버 부통령과 알렉산더 해밀턴 전 재무장관이 벌인 결투.
미국 현직 부통령전직 재무장관결투로 죽여버린, 황당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사건이다.

2. 배경과 전개


알렉산더 해밀턴에런 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밀턴은 버를 가리켜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인물이라고 버를 비난했으며 버가 권력을 잡으면 미국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해밀턴은 워낙 그 성격때문에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고, 따라서 해밀턴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1] 그리고 그중에서 해밀턴이 정말 인생을 걸 정도로 싫어했던 남자가 바로 애런 버였다.
해밀턴과 버의 사이는 버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제퍼슨파에 합류해 해밀턴의 장인을 선거에서 이기면서 틀어진 것으로 본다. 버는 당대에도 능력은 있던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기에 해밀턴은 버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버를 큰 위협으로 여기면서 사사건건 버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버도 맞불을 놓으면서 둘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었다. 게다가 워싱턴 행정부 당시에 버는 검찰총장 위치에 있었기에 정적들의 약점을 알기 쉬운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해밀턴의 장관 직책을 끝장낸 섹스 스캔들 당시에도 버가 당시 해밀턴과 관계를 가진 여성의 변호인으로 활동하자 버가 해밀턴의 섹스 스캔들에 관여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상호간에 폭로전과 흑색선전을 난무하면서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결국 해밀턴은 '''단지 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2]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연방주의자 표가 제퍼슨에게 몰리면서 애런 버는 2등을 해 부통령 지위에 머물렀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전에 함께 뛰어들지만 당시에는 제도상 대통령 선거 결과 2위가 부통령직을 맡았다. 이 때 대선 결과는 선거인단 기준으로 토머스 제퍼슨 73표, 애런 버 73표, 존 애덤스 65표, 찰스 핀크니 64표였다. 원칙적으로는 존 애덤스와 핀크니처럼 대통령-부통령 표가 1표차 정도 나게 배분을 해야했는데[3], '''뉴욕의 12표가 애런 버를 찍는 바람에''' 제퍼슨과 버의 득표가 동일해진 것. 결국 이 대선은 미국 하원으로 넘어갔고, 하원 투표에서 제퍼슨이 버를 앞섰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해 하원 2차 투표로 넘어간다. 하원 2차 투표는 각 주에서 하원의원 1명이라도 더 확보한 사람의 주로 넘어가는 것이었고, 동수로 투표결과가 나오면 무효가 된다. 여기서 과반수의 주를 확보해야 최종적으로 당선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하원 투표를 하는데 제퍼슨 8주, 버 6주, 무효 2주로 또다시 결과가 안 나온다. 그래서 마지막 투표로 2차투표와 동일한 방식으로 재투표가 반복되었는데[4], 대선이 무효화되어 재선거가 시행될 경우 '''정말 버가 당선될까봐''' 36차 투표 직전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제퍼슨을 지지해서 제퍼슨 10주, 버 4주, 무효 2주로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연히 버도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는데 해밀턴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버를 비난하는 편지를 쓰는 등 버를 계속 방해했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거의 명예훼손으로 콩밥 오래 먹을 수준의 저열한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미국에는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명예훼손을 하든 모욕을 하든 '''공개적으로 쌍욕을 박든'''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므로 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뉴욕 주지사 선거를 바로 앞두고 벌어졌다. 해밀턴은 평소처럼 버에 대해서 '위험한 인간, 정권을 맡겨서는 안되는 인물'이라고 표현했고, 이를 신문보도로 접한 버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부인, 아니면 즉각적인 사과'''(prompt and unqualified denial or an immediate apology)를 요구했다. 하지만 해밀턴의 대응은 버가 원하는 바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열받은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해밀턴도 이에 응하면서 역사적인 결투가 시작된다. 현대에 이런 결투를 했다가는 살인, 폭행죄가 적용될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 식의 결투는 사나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5] 그러나 당시 뉴욕 주는 결투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들의 결투는 뉴욕 법을 적용받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1804년 7월 11일 바로 강너머 뉴저지 허드슨 강변에서 결투가 벌어졌다.[6] 버의 총탄은 해밀턴의 오른쪽 골반을 뚫어 척추에 박혔고 결국 해밀턴은 결투 다음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버는 멀쩡했으며 쓰러진 해밀턴을 내려다 본 후 결투장을 빠져나갔다.

3. 결과


이 사건은 버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내버렸는데 해밀턴이 남긴 말이나 기록을 보면 해밀턴 자신은 결투를 싫어했고[7][8] 결투에 나간 것도 자기 자신이 명예를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며 버가 무사했던 것도 자신이 차마 버를 죽일 수 없어서 '''일부러 맞지 않게 총을 쐈다'''[9]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결투 전날에 쓴 글에서 '나는 종교적이고 실제적 이유에서 결투를 반대한다. 나는 첫발은 넘겨버리기로 결심했다(resolved to reserve and throw my first fire). 그리고 두번째도 유보할까 한다.' 그리고 총에 맞은 다음에도 '나는 일부러 첫발을 빗나가게 쏘려고 했다(I was going to intentionally fire my first shot to the side)라고 말했다.[10][11] 이게 해밀턴의 일방적인 주장이든 사실이든간에 그의 최후의 발언으로서 해밀턴은 '''귀족적인 신사'''로 이미지가 남았다.
한편 버는 안좋은 이미지로 굳어졌고[12] 이례적으로 살인 혐의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버의 경우는 발언이 영 신중치 못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해밀턴이 일부러 총을 빗나가게 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버의 발언은 "'''사실이라면 멍청한 짓이군'''"(Contemptible, if true)이었다. 결투한 다음 날 오후에 버가 한 말은 "'''아침 안개가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면 해밀턴의 심장을 맞췄을 것이다.'''"였다. 문제는 당시의 미국 동북부 상류층은 사실상 신사들이 활보하는 귀족사회나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대공황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처럼 Badass 스타일의 나쁜 남자가 유행하던 시기라면 몰라도 그런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의 이런 행동들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제러미 벤담[13]이 이야기한 "'''버는 살인자나 마찬가지다'''"(Burr is little better than a murderer)라는 표현은 당시의 여론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해밀턴을 정치적으로 용인하던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분노로 다음 부통령 직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후 버는 새로 미국 영토가 된 루이지애나 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비록 대법관 존 마셜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14] 버를 석방하였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버는 미국을 떠나야 했다.
에런 버는 출소 후 제퍼슨의 계속되는 영장질에 지처 프랑스로 망명해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영국 대신 미국을 치게 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에런 버가 개인원한을 해결하려고 프랑스 군대를 이용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탓에 에런 버가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해도 계속 묵살했다.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동안 겪은 일들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15] 결국 버는 1812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하다 사망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연방주의자들의 거두였던 해밀턴이 사망하고 존 애덤스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구심점이 사라져 미국 역사에서 연방주의자들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남북전쟁을 비롯해서 이후로도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의 대립은 미국 역사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4. 기타


야사에서는 그들이 결투를 한 이유는 다름아닌 사랑싸움이었다고 한다. 해밀턴과 애런 버 둘다 한 여자에게 구혼했는데, 여자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명문가 출신이었던 애런 버에게 딸을 주려고 하였으나, 이 여자는 해밀턴을 좋아하여, 결국 해밀턴과 결혼한다. 그후 애런 버는 사사건건 해밀턴을 방해하였으며, 이 때문에 둘의 사이가 악화됐다고 한다. 별로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
2004년 그들의 후손들이 결투 장소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한 후 화해를 했다고 한다.
2015년 초연한 뮤지컬 해밀턴은 바로 이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다. 특히 이들을 단순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야망을 가진 살아 숨쉬는 듯 한 젊은이들로 묘사하고, 버를 일방적인 악당이 아닌 복잡하게 얽힌 라이벌[16]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고어 비달의 미국연대기의 1권이[17] 바로 버에 대한 전기이다. 미국 독립영웅들의 이면을 파해치고 '''미국의 건국이념이 미국사에서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지'''를 고발하는 대하소설인데 여기서 해밀턴과 나름 개념있는 버의 대립 구도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18]
고퀄의 병맛 노래로 유명한 론리 아일랜드의 곡, <나른한 일요일(Lazy Sunday)>의 가사에서 이 둘의 결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10달러 지폐를 간식거리 값으로 내놓으며 "It's all about the Hamiltons, baby"('해밀턴'이 최고라구, 아가씨)라는 구절에 이어 영화표 값으로도 10달러권을 흥청망청 쓰면서 "you can call us Aaron Burr from the way we're droppin' Hamiltons"('해밀턴'을 '''날려버리는''' 우리를 에런 버라고 불러줘)라는 대목에서 이들의 비범한(...) 센스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을 소재로 한 광고도 있다. 심지어 우유 광고(...). 이른바 에런 버 덕후(...)인 주인공이 에런 버와 관련된 모든 물품들(에런 버의 옷, 손수건, 초상화, 심지어는 결투 당시 사용했던 권총 등등)을 수집해놓고 있는데, 어느날 라디오를 들으면서 땅콩버터를 듬뿍 바른 식빵을 먹고있던 도중 라디오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을 쏜 것은 누구일까요?"하는 퀴즈가 나왔고, 그 전화가 바로 에런 버 덕후에게 걸려왔다! 주인공은 자신있게 에런 버 라고 답하지만, 앞서 먹었던 땅콩 버터 바른 식빵 때문에 입이 뻑뻑해서 제대로 답을 말할 수 없었고 이에 우유를 마셔서 넘긴 다음 대답하려고 했는데 하필 우유가 바닥이 나서 실패. 결국 라디오 진행자는 "안타깝습니다. 정답은 에런 버 였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마무리하며 전화를 끊고 주인공은 절규하는 것으로 끝. 이 광고는 Nostalgia Critic 시즌 10 광고 특집에서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이 광고의 제작자가 다름아닌 마이클 베이(!)였다는 사실이 알려져셔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영상
[1] 특이하게 해밀턴은 제퍼슨도 매우 싫어했지만 제퍼슨은 해밀턴의 정치적인 견해와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는 그를 이해했기 때문에 버와 달리 해밀턴을 크게 적대하지 않았다.[2] 원래 해밀턴은 대표적인 연방주의자로 정치적으로는 존 애덤스와 성향이 비슷했다. 제퍼슨이 반연방주의자의 수장이었고 해밀턴과 제퍼슨이 엄청나게 키보드 배틀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독한 행동이었던 것.[3] 이 때문에 연방당에서는 "존 제이"라는 허수후보를 한명 더 세워서 여기에다가 1표를 던져준다.[4] 여기서도 결론이 안 나면 대통령 선거가 무효화되고 재선거를 시행한다.[5] 당시만 해도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이더라도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등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결투로 인한 인명사고가 빈번했다.[6] 100%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뉴저지의 허드슨 강가쪽이라고 한다. 추측되는 장소에는 기념비도 있다. 주변은 그냥 뉴욕 마천루가 멋지게 보이는 고급주택가.[7] 해밀턴의 '''아들'''이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해밀턴과 버가 벌인 결투장은 그의 아들이 결투로 죽은 바로 그 자리였다. 죽은 아들은 장남 필립 해밀턴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이 가장 아끼던 아들이지만, 결투로 인해서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죽했으면 아들이 죽고난 다음해에 부인과 자신 둘다 40이 넘은 나이에 얻은 늦둥이 막내아들에게 다시 필립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8] 그런데 결투를 싫어한 것치고는 해밀턴은 은근히 결투를 많이 해본 인물이었다. 심지어 후에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먼로와도 결투를 벌인 적이 있다. 해밀턴은 약 10번의 결투를 해봤으며, 심지어 결투 직전까지 간 격렬한 언쟁은 수십개에 달할 정도였다.[9] 하늘을 향해 쐈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해밀턴의 총알은 버에게서 다소 떨어져있던 나무에 박혔다.[10] 사실은 해밀턴의 교활한 성격상(해밀턴은 버를 편들어주는 척하면서 뒷담화를 까면서 뒤통수를 친 적이 있다...), 이것도 진심이 아니라 결투에서 질 경우를 대비해서 버를 '''완전히 보내버리기 위해''' 작정하고 준비한 멘트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니까 죽을때 죽더라도 에런 버를 끝장내겠다, 물귀신처럼 같이 죽자 이런 심보. 일종의 언론플레이.[11] 당시에는 결투를 하더라도 일부러 빗맞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동의해놓고서 버가 '''실수로 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골반이라는 애매한 부위에 피격된 것도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당시 총기의 신뢰성이나 명중률은 그야말로 시망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다.[12] 미국 역사에서는 그냥 해밀턴을 결투에서 죽인 남자라고만 알려져버린다[13]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공리주의자.[14] 마셜은 전임 대통령 애덤스가 후임 대통령 제퍼슨을 견제하려고 대법관으로 임명한 인물이였기에 이 판결도 제퍼슨을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자료들을 보면 버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증거나 정황은 없기 때문에 누명인 듯 하다.[15] 비슷한 사례로 베네딕트 아놀드가 있는데 미국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 장교 중 하나였으나 직위가 더 높은 게이츠에게 견제받다가 열받아서 영국에게 붙어버렸다. 사실 아놀드의 경우는 초기 독립전쟁의 영웅급이었고, 게이츠는 만인이 인정하는 꼴통이라 게이츠가 ㄱㅅㄲ라는 결론이 나오기 딱 좋지만 여기에도 여자가 끼어있어서... 게이츠와 아널드가 사랑싸움을 벌인 것은 아니고, 베니딕트 아널드가 후반부에 사귄 페기 슈펜이란 여자가 좀 된장녀 기질이 강했다...[16] 다만 여전히 그의 박쥐같은 정치적 성향/행보는 그대로 묘사한다[17] 참고로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모두 '''버의 자손'''들이다. 1권인 버의 화자 역시 버의 사생아.[18] 의외로 결투는 그냥 넘어가고 버의 반역행위에 대한 고찰이 작품의 주 내용이다.